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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books - 다지털 반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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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끄고 자신과 대화하라고 조언하는 에거스의 신작 소설 ‘더 서클’
데이브 에거스(사진)는 호모디지투스 인종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다.



코미디 영화 ‘애니멀 하우스(Animal House)’의 배경을 이루는 가상의 페이버 칼리지. 창업자 에밀 페이버의 조각상에는 “지식은 좋은 것(Knowledge is good)”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학교생활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 이념이다. 데이브 에거스의 신작 소설 ‘더 서클(The Circle)’에도 마찬가지로 모호하고 관념적인 신조가 깔려 있다.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옐프(지역생활정보 사이트), 인스타그램(사진공유 서비스)을 하나의 부도덕한 개체로 집약한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첨단기술 업체 이야기다.

한번은 서클을 지배하는 3명의 현자 중 하나가 말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나중에 그는 극히 엄숙하게 선언한다.

“우리 모두 가능한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집단으로서 세상에 축적된 지식의 주인이다.” 구약성서 전도서는 지식이 안겨주는 슬픔에 관해 경고하지만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구글 본사가 자리잡은 도시)에선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애니멀 하우스’와 마찬가지로 ‘더 서클’은 바깥 세상의 관심사와 유리된 목가적인 캠퍼스 환경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역시 순수함의 상실을 다룬 스토리다. 하지만 존 랜디스 감독이 코미디 감독이라면 에거스는 음울한 풍자작가다. 적어도 독자를 즐겁게 하는 만큼 교훈 또한 주려 한다. ‘더 서클’과 가장 닮은꼴은 ‘애니멀 하우스’가 아니라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이다.

언어의 미학으로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소설들이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도덕적으로 혐오감을 주는 ‘롤리타’ 대신 콘크리트의 냉각을 소재로 다뤘다면 많은 사람이 읽었을지도 모른다. 필립 로스 등의 다른 작가들은 캐릭터들에 삶의 온갖 수많은 광기를 채워 넣는다. 그러나 ‘더 서클’의 언어는 아름답지 않다. 주인공 메이 홀랜드와 그녀의 동료 서클러(Circlers) 모두 심리적으로 정확하게 묘사되지 않는다(서클러라는 별명이 탐욕스러운 콘도르를 연상케 한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힘은 번개처럼 내리 꽂히는 아이디어다. 디지털 문화는 우리의 숨통을 조인다. 게다가 널리 인간에게 혜택을 준다는 기만적인 가면을 쓰고 그런 행동을 한다. 니컬러스 카의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The Shallows: What the Internet Is Doing to Our Brains)’ 이래 픽션이든 저널리즘이든 우리 일상 속에 난무하는 트윗과 ‘좋아요(페이스북의 기능)’에 대한 경각심을 이만큼 일깨워준 책은 일찍이 없었다.

‘더 서클’은 에거스의 4번째 소설이다. 그는 ‘놀라운 천재의 가슴 아픈 작품(A Heartbreaking Work of Staggering Genius)’으로 회고작가(그리고 풍자작가)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뒤로 갖가지 새로운 모험을 시도했다. 청소년 대상의 글쓰기 단체 ‘826 발렌시아’를 설립하고, 홍수가 일어났던 뉴올리언스에 사는 한 시리아 이민자의 고난을 기록했다(그의 유일한 책 분량 기록문학).

이는 뉴욕타임스가 한때 묘사했던 그의 “남 눈치 보지 않는 진지한 미국 사랑”의 표현이었다. ‘나자와 사자’의 작가 노먼 메일러를 연상케 했다. 이는 과장이지만 또한 사실인 측면도 있다. 가장 진지하고 절정에 있을 때의 에거스는 조너선 프랜즌(‘인생수정’)과 그밖에 조너선 새프란 포어(‘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 타오 린(‘Eeeee 사랑하고 싶다’) 같은 젊은 소설가들을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한다. 자아도취에 빠져 보잘것없는 장난감을 휘두르는 아이들 말이다.

하지만 ‘더 서클’의 첫 장을 넘기면 금방 아이러니가 눈에 띈다. “세상에, 여긴 천국이야, 메이가 생각했다.” ‘더 서클’은 오히려 천국의 정반대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이 디지털 원형교도소(panopticon)는 구글의 경영철학이라는 ‘악행을 하지 말라(do no evil)’ 같은 이념 안에서 그 야심을 영리하게 드러낸다.

독점 규제와 프라이버시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리고 메이는 승진을 거듭할 동안 ‘투명성’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정체성을 갈수록 회사에 더 많이 양보한다. 결국에는 모든 “비밀은 거짓”이며 지식은 “인간의 권리”라고 믿게 된다. 서클이 전달하고 공유하고 저장하고 상품화하는 지식 말이다.

에거스가 완전히 오해했다는 비판도 있다. 예컨대 뉴리퍼블릭 잡지는 ‘데이브 에거스가 인터넷에 관해 근본적으로 착각하는 5가지’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로이터의 블로거 펠릭스 새먼은 이렇게 평했다. “에거스가 신빙성과 너무 거리가 멀어 그의 저서는 거의 풍자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뉴욕데일리뉴스의 마거릿 에비도 그를 비판했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 바깥 세계에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하지 않는다.”

뉴욕타임스는 웅변하듯 물었다. “그가 풀어 놓는 고고한 척하는 장광설은 캐릭터들에 인격을 부여하지 못하고 주제에서 벗어난다. 그가 조준을 잘못했는가?” 이런 비난이 모두 맞을지 모르지만 또한 핵심을 비껴간다. 에거스는 실리콘밸리의 역사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특이한 호모 디지투스(homo digitus) 인종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다. 그 인종의 곤경은 항상 연결돼 있을 법한데도 언제나 단절돼 있다는 점이다.

그가 세부적으로는 그르쳤을지 모르지만 디지털 관련 세부 항목은 갈수록 침식당하는 메이의 정신활동에 비하면 비중이 크게 떨어진다. 소설의 몇몇 흥미진진한 장면에서 그녀는 인터넷 전반의 동료 서클러들과 단순히 상호 소통하는 데 그친다. 메이가 서클에 깊숙이 개입할수록 그녀 인간성의 실체가 작아지는 듯이 느껴진다. 마침내 공기 속으로 무의미한 단어들을 쏟아내는 공허한 원천에 지나지 않게 된다.

“내 딸이 부탁한 거 봤어? 그가 물었다. 메이는 스크린을 훑어보며 에드워드의 딸이 보낸 메시지를 찾았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딸이 다른 성을 갖게 됐으며 뉴멕시코주에 있는 학교에 다닌다고 설명했다. 그 주의 들소가 처한 곤경에 대한 문제 의식을 고취하는 중이라고. 메이에게 서명 운동에 참여하고 가능한 한 많은 포럼에서 그 캠페인을 언급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메이는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고마워! 에드워드가 썼다. 이어 몇 분 뒤 그의 딸 헬레나로 부터 고맙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 책은 머리 속의 침묵에 관한 소설이다. 위대한 소련계 미국인 시인 조셉 브로드스키는 1995년 다트머스대 연설에서 지루함의 “단조로운 찬란함”을 열렬히 찬미했다. 그것을 “시간의 무한성을 들여다보는 자신만의 창”이라고 표현했다. ‘더 서클’은 그 창을 닫고자 한다. 소설의 가장 무시무시한 장면에서 서클러들이 무인기(drones)를 띄워 머서를 추적한다.

메이의 옛 남자친구인 그는 디지털 세계에 환멸을 느껴 오리건주의 자연 속으로 잠적한다.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현미경 조사를 피하고 싶어한다는 사실, 서클에 ‘동참’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메이는 울화가 치민다. 머서의 죽음에 관한 에거스의 묘사는 오웰에 견줘도 손색이 없다.

게다가 소설은 ‘산만함을 위한 변명’ 같은 멍청한 주장을 질타한다. ‘뉴욕’ 잡지에 실린 그 기사에서 샘 앤더슨은 “단순히 더 조용한 시간으로 물러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더 서클’에 빠져드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자율이라니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메이의 몰락(아니면 부상일까?)은 그와 같은 포기의 대가를 명확히 보여준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대립자를 꼽으라면 톰 스텐턴이다. 분명 구글 CEO 에릭 슈미트를 모델로 삼았다. 그의 디지털 유토피아론은 항상 기이하게 들린다. 그는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있는 곳을 안다. 당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슈미트의 이야기이지 그의 소설 속 도플갱어(분신)를 말하는 게 아니다. 스텐턴도 나름 그런 특징을 잔뜩 갖고 있지만 말이다.

2008년 언론인 니콜라스 카가 잡지 애틀랜틱에 게재한 에세이 ‘구글이 우리를 멍청하게 만드는가’는 많은 화제가 됐다. 이는 훗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로 출판되어 2011년 퓰리처상 최종 결선에 올랐다. 카의 질문에 대한 답은 (슈미트 같은 부류가 뭐라고 주장하든) 절대적인 ‘예스’다.

에거스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읽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상당히 뚜렷하게 ‘구글 시대’에 대해 그가 품은 의심의 논리적 바탕을 이룬다. 이들 두 책 모두 한 목소리로 스마트폰의 전원을 끄고 밖으로 나가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카는 e메일에 파묻혀 링크들을 따라가며 탄식한다. “옛날의 내 두뇌를 분실했다.” 메이는 안타깝게도 그런 후회를 하지 않는다. “삶의 이기적인 물건 집착증 … 인간의 온갖 추잡함”에 코웃음을 친다. ‘더 서클’이 온갖 혼란을 제거하고 모든 어둠에 빛을 비추리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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