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파워피플[27] - 할리우드의 르네상스 맨

스티븐 스필버그(67)에게 영화감독은 여러 직업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스필버그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를 위시해 제작자, 엔터테인먼트 사업가 등 영화의 다양한 부문에서 다양한 일을 해왔다. 어느 부문에서든 한결 같이 성공을 거둔 드문 인물이다.
같은 영화 분야라도 그는 40년간 결코 한곳에 머물지 않고 수많은 장르를 고루 섭렵했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항상 새롭고 관심을 모으는 영화를 연출·제작하거나 시나리오를 쓰는 왕성한 창작 열정을 보였다. 드림웍스 스튜디오의 공동창립자이기도 하다.
그가 내놓은 ‘미지와의 조우’를 비롯한 SF물,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같은 어드벤처물,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전쟁물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존 할리우드 주류 영화의 양식을 뒤집어 버리는 가치전복적이고 혁신적인 작품을 줄줄이 내놓은 때문이다. 잘 만든 영화, 완성도가 높은 영화, 스토리가 설득력이 있는 영화, 허구보다 진실에 가깝다고 믿게 되는 영화로 기존의 할리우드 주류 영화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상품성과 작품성 두루 갖춰그는 나이가 들면서 갈수록 익어간다는 평을 들었다. 나이가 아니라 멋이 들었다는 것이다. 오락물로 명성을 얻은 그는 인간의 가치를 다룬 진지한 영화에 집중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쉰들러 리스트’, 노예무역을 다룬 ‘아미스타드’, 전쟁을 다룬 ‘라이언 일병 구하기’ ‘워 호스’, 테러리즘을 다룬 ‘뮌헨’ 등이 그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휴머니즘을 잘 보여주는 주제의 영화다. 주제가 묵직했지만 사람들은 재미있게 즐기면서 스필버그의 스토리와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빨려 들었다. 한마디로 오락성과 작품성, 그리고 사회성을 모두 지닌 원숙한 작품이다. 원숙미가 더해지면 창의성은 떨어지게 마련인데 그는 예외였다는 평이다.
덕분에 스필버그는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리고,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영화인으로 기록된다. 영화로 가장 많은 돈을 손에 쥔 영화 사업가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스필버그가 올린 영화 매출은 전 세계에 걸쳐 85억 달러로 추산된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는 올 3월 스필버그의 개인 재산을 32억 달러로 추산하며 그를 세계 부자 순위 423위에 올려 놨다.
미국의 영화정보 사이트인 더넘버스닷컴이 조사해 11월11일 발표한 ‘수익성 지수(Bankability Index)’ 보고서에 따르면 스필버그는 할리우드에서 지난 3년 간 최고의 수익을 냈다. 이 사이트가 할리우드 영화산업 종사자 6만5000여 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다. 스필버그는 3년 간 한 해 평균 2740만 달러(약 293억5000만원), 영화 1편당 1370만 달러의 돈을 각각 벌었다. 그는 2011년 ‘트랜스포머3’ ‘워 호스’, 지난해 ‘맨인블랙3’ ‘링컨’ 등을 기획·제작하거나 연출했다.
2위는 새뮤얼 L 잭슨(연 2440만 달러, 영화당 620만 달러), 3위 배우 조니 뎁(연 2430만 달러, 영화당 1050만 달러), 4위 톰 크루즈(연 2400만 달러, 영화당 1710만 달러), 5위 톰 행크스(연 2400만 달러, 영화당 1200만 달러) 등 스타 배우 일색이다. 그 속에서 스필버그는 스타 감독으로 자신의 위상을 선명하게 보여줬다.
스필버그는 말 그대로 최고의 흥행사다. ‘조스’(1975), ‘레이더스’(1981-‘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첫 에피소드), ‘ET’(1982), ‘인디애나 존스-미궁의 사원’(1984), ‘인디애나 존스: 최후의 성전’(1989), ‘쥬라기 공원’(1993) 등 6편의 영화를 그 해의 최고 흥행작품 명단에 올렸다. 모두 여섯 해에 걸쳐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영화인은 스필버그가 유일하다. 심지어 이 가운데 ‘조스’ ‘ET’ ‘쥬라기 공원’은 그때까지의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흥행은 물론 영화의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그가 받은 영화 관련 상이 이를 증명한다. 스필버그는 올해까지 아카데미상 등 각종 영화상에서 231차례 후보에 올라 126차례 수상했다. 그는 아카데미 최우수 감독상 후보에 세 차례나 올라 1993년 홀로코스트를 다룬 대작 서사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 네 명의 형제 중 셋이 전사한 병사를 찾아 집에 보내는 내용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로 두 차례 수상했다.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는 9차례 올라 쉰‘ 들러 리스트’로 수상했다. 스필버그만큼 흥행과 비평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영화감독도 드물다. 영국·독일·이탈리아·벨기에 등지에서 영화에 기여한 대한 공로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스필버그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글로벌 브랜드다. 1997년 월스트리트저널은 기업 장래 평가 지면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에는 단 두 개의 브랜드만이 있을 뿐이다. 디즈니와 스필버그가 그것이다’라는 표현을 쓰기까지 했을 정도다. 영화·엔터테인먼트 전문 주간지인 엠파이어는 2005년 그를 역대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사이코’ ‘이창’ ‘버티코’ 등을 만든 세기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코크부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SF영화의 빅뱅을 이뤘다는 평가를 들은 스탠리 큐브릭,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로 유명한 마틴 스코시스 등 수많은 선배 감독들이 그를 칭찬했다.
‘글래디에이터’를 만든 리들리 스콧, ‘터미네이터’ 시리즈와 ‘타이태닉’ ‘아바타’를 연출한 제임스 캐머런, ‘인디펜던스 데이’의 롤런드 에머리히, ‘데스페라도’ ‘신시티’ 등 개성 있고 창의적인 범죄영화로 이름을 날린 로버트 로드리게스 등이 스필버그의 영향을 받은 감독으로 꼽힌다.
하지만 스필버그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에 대한 비판은 ‘관객을 어린아이 취급해 엄청난 음향과 웅장한 화면으로 황당한 스토리를 대충 얼버무리면서 영화에 대해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는 의식을 무디게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겠다. 지나치게 감상적이며 애국주의를 강조해 그런 면에서는 진부해 보인다는 비판도 있다.
작품에 미학적 깊이가 부족하고 리스크를 피해 지나치게 정형화된 영화만 지향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그런 점까지 더했으면 얼마나 더 위대한 감독이 될 수 있었을까’하는 아쉬움으로 들리곤 한다. 그가 영화 역사에서 가장 창의적이며 관객의 심리를 잘 읽고 의미와 재미가 어우러진 영화를 만들었다는 면을 부정하진 않는다.

민주당 지지자로 미국 정가에서도 영향력스필버그는 미국 정가에서도 영향력이 만만치 않다. 그는 미국 민주당 지지자로 이 당의 대선 후보를 공공연하게 지지해왔다. 그는 지금까지 민주당과 이 당 소속 대통령 후보에게 8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특히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는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배우 출신인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공화당 소속임에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나왔을 때 그를 지지했다. 개인적인 친분 때문으로 풀이된다.
2007년 미국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격돌했을 때 스필버그는 클린턴을 지지했다. 하지만 경선 경과 오바마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결정되자 그를 소개하는 비디오를 제작하며 지원했다. 그 결과 이듬해 1월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 때 초청받았다. 스필버그는 2008년 동성결혼 합법화를 지지하며 10만 달러를 내놓는 등 민주당의 상대적 진보가치를 실현하는 다양한 행사에 재능과 돈을 아낌없이 기부하고 있다.
유대인인 그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2007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당시 구호활동에 쓰라고 10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아랍연맹은 그의 영화를 거부하는 투표까지 벌였다. 그는 10대 때 4년 동안 헤브루 학교에 다녀 유대인의 정체성을 익혔다.
어린 시절부터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열심히 했으며 성인이 된 뒤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그의 영화관에 나타난 질서·헌신·협동·애국 등의 가치는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는 미국 보이스카우트 연맹에 성추행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았다고 고문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10대에 8mm 영화 만들어 친구들에게 입장료 받기도그는 1985년 여배우 에이미 어빙과 결혼했으나 아들 하나를 낳고 1989년 이혼했다. 당시 그는 결혼 전 냅킨에 장난처럼 흘려 쓴 내용을 판사가 혼전계약 증거로 인정하는 바람에 1억 달러라는 거액의 위자료를 지급했다. 이 액수는 지금도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역대 가장 비싼 이혼의 하나로 꼽힌다. 그의 이혼은 이후 할리우드에서 냉정한 혼전계약에 따른 결혼을 유행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스필버그는 1991년 여배우 케이트 캡쇼와 재혼했다.
케이트는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애나 존스: 미궁의 사원’에 출연해 ‘위험한 순간마다 마구 고함지르는 것 말고는 별 연기를 보여준게 없다’는 평을 들었던 여배우다. 당시 캡쇼는 딸 하나를 둔 이혼녀로 아들 하나를 입양해 키우던 상태였다. 미국성공회 신자였던 캡쇼는 결혼 전 남편의 종교에 맞춰 유대교로 개종했다. 두 사람은 세 자녀를 낳았으며 캡쇼가 한 명을 추가 입양해 현재 모두 일곱 자녀를 두고 있다.
스필버그의 첫 결혼은 파경으로 끝났지만 두 번째 결혼에서는 가족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등 가정을 중시하는 생활로 주목을 받았다. 중요한 비즈니스도 집에 사람들을 불러 부인이 해주는 식사를 함께하면서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해왔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스필버그의 세계를 파악하는 기본이며, 그와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스필버그의 어린 시절은 교육 분야에서 자주 인용된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이를 직업으로 삼아 최고의 성공을 거둔 인물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스스로 해보도록 도와주는 자유로운 창의교육이 왜 필요한지를 그만큼 잘 말해주는 인물도 드물다.
식당을 운영하며 피아노도 연주했던 어머니 리아와 전자기기 엔지니어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 제작은 물론 관련 비즈니스에도 관심을 보였다. 10대 때 그는 8mm 영화를 만들어 집에서 동네 친구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보여줬으며 여동생은 손님들에게 집에서 만든 팝콘을 팔아 용돈을 벌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스필버그는 고교 졸업 뒤 남가주대에서 연극영화방송을 전공하며 두 차례 다녔으나 중퇴했다. 남가주대는 그가 유명해진 뒤인 1991년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이후 롱비치 캘리포니아 주립대에 입학했으며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들어가 무보수로 주7일간 근무하는 인턴으로 일하기도 하고 편집부 객원직원으로 일했다.
1969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최연소 장기 계약 감독이 되면서 학교를 그만뒀다. 하지만, 입학 35년 만인 2002년 졸업 작품을 제출하면서 롱비치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영화제작과 전자 예술’ 분야의 영화비디오 제작 전공으로 졸업장을 받았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성 스필버그에 주목한다. 독일어에서 ‘경기하다’ ‘게임하다’는 뜻의 동사 슈필렌(spielen), 경기나 게임을 뜻하는 명사 슈필(Spiel), 선수를 뜻하는 슈필러(Spieler)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영어에서도 스필러(spieler)는 웅변가, 손님 끄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는 타고난 흥행사이자 영화계의 살아있는 신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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