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 5일 반 동안의 반짝 세계여행
TRAVEL - 5일 반 동안의 반짝 세계여행
동유럽 어디쯤의 늦은 저녁 시간. 난 에티하드 항공(아랍에미리트연합의 국영 항공사)의 런던발 아부다비행 비행기 맨 뒷줄에 앉아 있다. 5일 반 동안의 반짝 세계여행을 시작한 지 하루가 지났다. 소음방지 헤드폰으로 AC/DC의 록 음악과 최면을 일으킬 듯한 목소리의 코란 낭독 방송을 왔다갔다 하며 듣는다. 두 가지 다 기내 오락 시스템으로 제공되는 콘텐트다. 내 옆 자리에 앉은 두바이 출신의 10대 청소년은 지루한 표정으로 아이폰을 갖고 논다.
창 밖으론 해가 진다. 하지만 뉴욕 시간에 맞춰진 내 생체시계는 한낮을 가리킨다. 코란과 하드록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 브래드 피트의 최신 영화 ‘월드 워 Z’를본다. 서양식 정장 차림의 다국적 승무원들이 저녁 식사를 서빙한다. 여승무원들은 머릿수건을 썼다. 그사이 기내방송에서는 승무원들이 구사할 줄 아는 언어의 목록이 소개된다. 10개까지 세다가 그만뒀다.
영국에서 아랍에미리트연합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 머릿속은 예기치 않은 광경들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로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닷새 반만에 세계를 돌아보는 이 여행에서 내가 마주치게 될 다양한 경험들을 제대로 예고한 게 아닐까? 카메라 한 대와 작은 여행가방 하나, 그리고 메모장 한 권이 내 짐의 전부다. 어떤 곳에서도 24시간 이상 머물지 않을 생각이다.
사실 난 곧 세상에서 자취를 감출 더글러스 DC-10 항공기를 타 보기 위해 이 여행을 시작했다. 이 항공기는 현재 방글라데시에서 이착륙하는 비행편에만 이용되고 있다. 이 여행의 또 한 가지 목적은 고도로 세계화된 세계의 지상과 하늘을 132시간 동안 돌아보면서 지역별로 차이점과 공통점을 찾아보는 것이다.
목요일 밤 뉴욕에서 출발했다. 신기하게도 특이한 것을 찾아 떠나는 이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맨해튼의 한 사무실에서 특이한 경험을 했다. 비만 방글라데시 항공은 현재 세계에서 DC-10을 운항하는 유일한 항공사다. 1970년대에 제작된 엔진 세 개짜리이 항공기는 보잉 747과 함께 대륙간 여행을 대중화하는 데 일조했다. 그 중 비행 가능한 마지막 두 대가 2013년 말 운항을 중단한다. 항공 마니아들은 이 항공기의 마지막 비행편을 타보려고 앞다퉈 몰려든다.
그래서 나는 DC-10 항공기로 아부다비에서 다카(방글라데시의 수도)까지, 또 다카에서 홍콩까지, 두 편의 비행을 중심으로 이 여행을 계획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비만 항공의 웹사이트에서 그 두 비행편 중 한 편에 대해서만 내 비자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비만 항공 뉴욕 사무실 대표가 나를 사무실로 초대했다. 웹사이트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는 동안 그와 나는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눴다.
어떤 서양 항공사가 그렇게 하겠는가? 미국이나 유럽 항공사의 고위 간부가 평일 오후에 예비 승객을 사무실로 초대해 한가하게 차를 대접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 대표는 또 내게 회사 CEO의 e메일 주소를 주었고, 그 다음엔 다른 고위 간부들로부터 항공권을 예약하려는 이 “귀하신 승객” 앞으로 메시지가 줄줄이 왔다. 난 결국 다카 공항의 비만 카운터에서 현지 지폐 한 뭉치를 내고 항공권을 구입했다.
하지만 그 항공권으로 DC-10을 탈 수는 없었다. 비만 항공의 이해하지 못할 일정 변경으로 두 비행편 모두 다른 항공기로 교체됐다. 아부다비에서 다카까지는 비만 항공이 몽골 항공에서 대여 받은 항공기로 비행했다. 몽골 승무원들과 방글라데시 승객들 사이에 서양인은 나 혼자였다.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의 칸막이 벽에는 칭기즈칸(몽고 제국의 시조)의 탄생 850주년을 기념하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방글라데시 승객들이 칭기즈칸을 어떻게 생각할지, 아니 그가 누구인지 알기나 할지 궁금했다.
하루 뒤 다카에서 DC-10이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기 전 그 항공기를 타 볼 내 마지막 기회마저 사라져 버렸다. 탑승구 근처에 세워진 DC-10 한 대를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내가 홍콩까지 타고 갈 항공기는 아니었다. 그 DC-10은 중국이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행이었다. 아열대성 비가 쏟아진 뒤 석양 속에 서 있는 그 항공기의 사진을 휴대전화로 찍어 뒀다. 그 항공기를 타려고 1만4500km를 날아왔다. 하지만 비행기를 눈 앞에 두고도 결국 타 보지는 못했다.
다카를 떠날 때 경찰관이 내 여권에 출국 도장을 찍어주면서 돈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결국 “팁을 달라”고 말했다. 그 말을 무시하자 그는 체크인 카운터까지 따라와 내 여행가방을 잡으며 미국 달러를 달라고 했다. 시차로 피곤했던 나는 안 그러는 편이 좋은 줄 알면서도 화를 냈다.
난 그에게 “당신은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고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다. 난 당신에게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쏘아붙였다. 그랬더니 그는 갑자기 온순하게 물러섰다. 내가 본 중에 가장 이상한 경찰관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내가 DC-10을 타지 못한 것을 보상하는 작은 모험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 경찰관은 132시간 동안 다섯 나라를 거친 이번 여행에서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이상했다. 하지만 그 말고도 인상에 남는 사람이 또 있다. 아부다비의 출입국 관리관이다. 아랍인인 그는 내 여권에 출생지가 이탈리아로 돼 있는 걸 보고는 완벽한 이탈리아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런 다음 내 목적지를 확인하더니 아랍어로 ‘다카, 축하합니다!”라고 말했다. 처음엔 재미있게 여기는 듯하더니 나중엔 “거기 가서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하는 투로 들렸다.
체크인 카운터에 있던 그의 동료도 같은 생각이었던 듯하다. 그는 한 무리의 방글라데시 승객 가운데서 유일한 서양인인 나를 발견하더니 별도의 카운터를 열어줬다. 내가 그들 사이에 섞여 줄을 서지 않아도 되도록 배려해 준 것이다. 방글라데시 승객 대다수가 가난한 육체노동자처럼 보였다. 그들은 마분지 상자와 노끈으로 묶은 보따리를 들고 여행했다.
도쿄에서 뉴욕까지 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한 일본인이 내 옆에 앉았다. 내가 우리줄의 다른 빈 좌석을 가리키자 그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듯했다. 그래서 승무원에게 부탁해 그에게 빈 좌석을 놔두고 13시간 동안 비좁게 딱 붙어 앉아서 갈 필요가 있겠느냐고 전해달라고 했다. 그제서야 그 승객은 자리를 옮겨 앉았다.
다카 공항에서 만난 벨기에의 젊은 공무원도 기억에 남는다. 나보다 더 열렬한 항공기 팬인 그 역시 DC-10을 타려고 그곳에 왔다. 그는 이란에 들러서 오는 길이었다. 이란은 금수 조치 때문에 서양 항공사들이 오래 전 폐기 처분한 빈티지 제트기들을 여전히 운항하고 있다.
다카의 어린이들도 생각난다. 인구 1500만 명(추정치)에 혼란스럽기로 유명한 그 도시의 숨결을 느껴 보려고 반나절 동안 걸어 다녔다. 어딜 가나 아이들이 수십 명씩 눈에 띄었다. 방글라데시는 인구밀도가 매우 높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젊은 나라로 꼽힌다. 이번 여행 일정에서 사막의 부자 도시 아부다비와 멋진 옷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 가득한 아시아의 진주 홍콩 사이에 끼여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대조적으로 보였다. 세계화의 모순을 한눈에 보고 싶다면 하룻밤은 개발도상국에서 보내고 그 다음날 밤은 선진국의 별 네 개짜리 호텔에서 지내 보라.
다카를 떠나 홍콩의 티끌 하나 없는 초현대식 공항에 도착하니 꿈만 같았다. 오감을 자극하던 방글라데시 대도시의 공기가 물러가고 중국 대도시의 두터운 스모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하지만 홍콩에서는 노란 스모그도 아름답게 보였다.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도쿄로 가기 전 아시아에서 보낸 마지막 날 홍콩에서 꼭 해보고 싶던 두 가지를 하기로 했다. 맛있는 중국 음식을 먹고, 엉터리 영어로 된 이상한 간판을 찾아 보는 일이었다. 홍콩에는 이 두 가지가 넘쳐난다. 내가 묵던 호텔 방엔 ‘힘을 얻으려면 이곳에 열쇠를 넣으세요[Insert (your room key here) to gain power]’ 라고 써 있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방에 불이 들어왔지만 힘이 솟지는 않았다. 그래도 웃음이 났다.
여행하는 내내 영어로 말했지만 생각은 이탈리아어로 했다. 비행기 안에서 읽은 이탈리아 소설 덕분이다. 카오룽 거리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밖에서 마주친 야한 잡지 표지 속의 이탈리아어는 그곳에 영 어울리지 않았다. 어린 시절 슈퍼마켓에 가면 볼 수 있던 타블로이드판 잡지를 연상케 했다.
점심을 먹으러 들린 국수 집의 영어 메뉴판엔 엉터리 시구처럼 들리는 음식 이름들이 올라 있었다. 영어 원어민이 아닌 사람이 중국어를 영어로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 ‘c 포크(cpork)’ ‘머니 벨리(money belly)’ ‘퀸 오브 프레시 레저(queen of fresh leisure)’ 등 무슨 뜻인지 짐작도 안 가는 이름들이 수두룩했다.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아시아식 엉터리 영어만 모아 놓은 웹사이트들도 있다. 난 그날 홍콩에서 이상한 영어의 살아 있는 용례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중에 침사추이 거리를 걷다 보니 또 다른 이상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간판은 마치 “당신이 여행하는 세상은 좁아도 가는 곳마다 놀라운 차이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미국이 지배하는 상업의 대도시 홍콩의 거리를 걷노라면 뉴욕의 쌍둥이 도시 속을 걸어다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모든 것이 익숙하게 느껴지지만 어느 순간 매우 낯선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 어지럼증은 홍콩의 지독한 스모그 때문일까? 아니면 12개의 시간대를 쉴 새 없이 지나와서일까? 그도 아니면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의 리메이크작(홍콩의 엉터리 영어 번역 간판들을 빗댄 말) 속에 들어와 있어서일까? 무엇이 원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한바탕 웃고 나니 초세계화된 세계의 의미 찾기는 이 간판(사진)에 새겨진 말로 요약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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