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모종혁의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① - 13세기 양조장에서 탄생한 중국의 자부심
Travel 모종혁의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① - 13세기 양조장에서 탄생한 중국의 자부심
중국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000~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술은 중국 문명이 태동할 때부터 중국인과 생활 속에서 함께 한 여흥거리였다. 특히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는 각 지방마다 다양한 술을 제조하고 발달시켜 왔다. 술은 지방의 역사와 문화, 풍습 등을 반영하고 시대상까지 투영한다. 중국 각지에 산재한 명주를 통해 해당 지역의 역사와 사회·경제, 독특한 문화풍습을 알아보고 술에 담긴 이야기와 더불어 꽃핀 음식도 살펴본다.
1998년 8월 중국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 남부의 주류기업 췐싱(全興)의 양조장. 낡은 시설을 보수하던 인부들은 땅을 파던 중 특이한 지하 유적을 발견했다. 인부들은 즉시 회사에 이 사실을 알렸고 췐싱은 공사를 중단했다.
이듬해 3월 청두박물원 문물고고연구소 주도로 정식 발굴이 시작됐다. 수 개월에 걸친 발굴 작업 끝에 13세기 원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술을 양조한 시설임이 밝혀졌다. 당시 발굴팀장이었던 천젠(陳劍) 연구원은 “각기 다른 지층에서 곡식 발효지, 아궁이 터, 술 저장고, 나무 기둥과 주춧돌 등이 발견돼 맥이 끊겼던 중국 고대 양조장의 원형이 세상에 드러났다”고 말했다. 그는 “술잔·주전자·항아리·질그릇 등 수 세기에 걸친 술과 관련된 유물도 쏟아졌는데 가장 오래된 유물은 800년이나 됐다”고 밝혔다.
2000년 8월 췐싱은 새로 개발한 고급 술을 선보였다. 천 연구원을 비롯한 고고학자들을 동원해 고대 양조장 유적의 발굴 성과를 먼저 발표했고, 주인공인 술은 나중에 공개했다. 술 이름도 특이했다. 고대 양조장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지은 것. 오늘날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 받는 중국 술 ‘쉐이징팡(水井坊)’은 이렇듯 흥미로운 탄생 비화를 안고 태어났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청두는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시다. 춘추전국시대 청두에서는 제후국 중 하나인 촉(蜀)나라가 흥기했다. 기원전 316년 진시황이 보낸 대군의 말발굽 아래 무릎을 꿇었지만, 그전까지 촉은 황하문명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꽃피웠다. 촉을 멸망시킨 진나라는 청두에 선물 하나를 남겼다. 당시 지방관이었던 태수 이빙(李泳)이 건설한 두장옌(都江堰)이다. 두장옌은 청두 서쪽에 흐르던 민강(岷江)을 막아 여러 갈래로 흐르게 한 수리관개 시설이다.
청두는 우리에게 친숙한 곳이다. 3세기 삼고초려 끝에 출사한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하삼분책을 내놓는다. 이에 당시 익주(益州)였던 청두에 들어와 촉한(蜀漢)을 세웠다. 유비와 유선 두 임금을 모시고도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제갈량의 충심과 기개는 지금도 청두에 남아있다.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 우허우츠(武侯祠)가 그것이다. 760년 안사의 난을 피해 청두에 정착한 시성(詩聖) 두보는 우허우츠를 즐겨찾았다.
두보는 제갈량을 기리며 주옥 같은 시 ‘촉상(蜀相)’을 남겼다. ‘…세 번 다시 찾게 한 번거로움은 천하를 위한 계책으로(三顧頻煩天下計) / 두 임금을 섬겨 나라를 구하려던 노신의 마음으로 나타났네(兩朝開濟老臣心) / 전쟁에 나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어(出師未捷身先死) / 후세의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을 옷깃에 적시게 하네(長使英雄淚滿襟)’.
쉐이징팡 유적은 두장옌에서 흘러나온 진강(錦江)을 사이에 두고 우허우츠에서 2㎞ 떨어진 남쪽에 있다. 중국 국가문물국은 쉐이징팡을 ‘1999년 중국 10대 고고학 발굴’ 중 하나로 평가해, 2001년 6월 전국 중점 유적지로 지정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흥미로운 것은 이 유적지에서 바이주(白酒) 쉐이징팡의 원료가 발효된다는 점이다.
이는 췐싱의 신상품 개발 및 마케팅 전략과 맞물려 있다. 췐싱은 1993년 쓰촨제약이 청두술공장(酒廠)을 흡수해 설립한 국유기업이다. 청두술공장은 1951년 문을 연 주류업체로, ‘췐싱다취(全興大曲)’라는 중저가 술을 주로 생산했다. 췐싱다취는 1786년 청나라 건륭제 때부터 빚어진 전통 있는 술이다. 1824년 첸싱 양조장에서 상품 판매를 시작해 20세기 전반까지 청두 술시장을 독점했다. 이를 1949년 사회주의정권 수립 후 국영화한 것이 청두술공장이다.
췐싱다취는 한때 중국 전역에서 명성을 떨쳤다. 1963년 중국 전역의 술이 자웅을 겨루던 술품평회 2회 대회에서 8대 명주 중 하나로 선정됐다. 1984년과 1988년에 열린 4, 5회 술품평회에서도 국가 명주로 뽑혀 전성기를 보냈다. 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쓰촨성 내의 강력한 경쟁자들이 개선된 물류환경을 발판으로 췐싱의 입지를 잠식해 나갔다. 우량예·루저우라오자오·젠난춘 등이다.
다른 지방 술의 공세에 점유율이 떨어지자, 청두시 정부는 청두술공장을 췐싱에 통합해 몸집을 키웠다. 그러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청두 시민만이 마시는 서민 술로 고정된 브랜드 이미지가 문제였다. 1996년 증시 상장으로 모은 돈을 기반으로 새로운 술 개발에 나섰다.
췐싱의 출시 전략은 치밀했다. 췐싱은 2000년 600위안(약 10만4000원)에 쉐이징팡을 시장에 내놓았다. 당시 바이주로는 최고가였다. 주류 도매상들은 “마오타이(茅臺)나 우량예도 아니면서 뭐가 그리 비싸냐”고 반발했다. 그러나 췐싱은 “이 술은 800년의 역사를 지닌 유적지에서 발효됐다. 마시고 나서 판단하라”며 고가 정책을 밀고 나갔다. 고급 브랜드에 걸맞은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규모와 수준을 갖춘 도매상과 판매점에만 쉐이징팡을 공급했다. 고가의 술을 소비할 수 있는 연해 대도시와 청두를 집중 공략했다.
출시 10년 만에 마오타이의 경쟁자로무엇보다 쉐이징팡의 독특한 맛과 향이 주당들을 열광시켰다. 부드러우면서 입에 달라붙는 듯한 맛은 다른 바이주에서 경험할 수 없는 새로움이었다. 병마개를 따자마자 코를 자극하는 향은 은은하고 향긋했다. 강력한 경쟁력을 갖춘 쉐이징팡은 곧 중국 술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마오타이와 자웅을 겨루는 비싼 술로 자리매김했다. 홈그라운드인 청두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굳힌 것이 결정적이었다. 청두는 2012년 현재 인구 1410만명에 달한다.
중국에서 충칭·상하이·베이징에 이은 4위다. 많은 인구만큼이나 소비 시장의 규모도 크다. 2011년 기준 소비 총액은 2861억 위안(약 50조원)으로, 중국 내 도시 중 8위를 차지했다. 1위인 베이징(6900억 위안)에는 못미치지만, 연해 대도시인 쑤저우(蘇州)나 난징(南京)보다 앞선다.
중국 내륙 최대의 소비도시답게 고급 상품의 매출도 고공행진 중이다. 2011년 기준 청두는 베이징에 이어 자동차 등록대수 2위다. 청두 왕푸징(王府井) 백화점에 입점한 에스티로더 매장은 2011년 전 세계 매출 1위를 차지했다. 루이비통·샤넬·까르띠에 등 명품 소비액은 100억 위안(약 1조7400억원) 규모로 베이징·상하이에 이어 3위다.
청두 사람들은 풍족한 물산을 바탕으로 외부에 대한 동경심이 많고 개방적이다. 차 마시기를 좋아하고 한담을 즐기는 등 여유로운 삶을 지향한다. 이런 도시문화로 인해 저축보다는 소비를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다.
청두 술시장을 기반으로 췐싱의 실적은 크게 좋아졌다. 2000년 쉐이징팡을 갓 시장에 내놓은 췐싱의 판매 매출은 12억8055만 위안(약 2228억원), 영업이 익은 1억 7896만위안(약 311억원)이었다. 이는 제약·유통 등 다른 부문을 포함한 수치다. 이후 매년 두 자릿수 이상 성장을 계속한 췐싱은 2012년 16억3618만 위안(약 2847억원)의 매출과 5억998만 위안(약 887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기업 구조조정 후 오직 주류판매에만 의지해 이룬 성과였다. 2009년에는 회사 이름을 아예 쉐이징팡으로 고쳤다.
2012년 쉐이징팡은 회사의 주인이 바뀌는 변혁기를 거쳤다. 조니 워커, 베일리스 등 생산하는 영국 주류업체 디아지오가 쉐이징팡을 사들인 것. 디아지오는 잉성(盈盛)투자홀딩스가 보유하고 있던 주식 100%를 사들여 쉐이징팡 전체 지분의 39.71%를 확보해 대주주가 됐다. 2005년 말부터 지분 투자를 시작해 7년간 공들인 성과였다. 중국에서 국유 주류기업이 외국기업에 인수·합병(M&A)된 첫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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