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S·P·E·C’ 갖춘 인재여 오라
진짜 ‘S·P·E·C
취업 준비생 사이에서는 스펙 5종 세트(학벌·학점·토익점수·어학연수·자격증)도 모자라, 스펙 8종 세트(5종+봉사활동·인턴·수상경력)가 필수라는 말이 나돈 지 오래다. 구조적인 청년 고실업과 학력 과잉, 부실한 대학 교육, 지나친 대·공기업 선호 현상, 천편일률적인 기업 채용방식에 취업 준비생의 불안이 겹친 기현상이다.
그런데, 기업 인사담당자와 인사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스펙은 중요치 않다”고 입을 모은다. 취업포털인 잡코리아가 최근 기업 인사담당자 316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3%는 ‘입사 지원자들의 스펙이 과하다’고 답했다.
채용에 불필요한 스펙으로는 어학연수·봉사활동·학벌·토익점수·수상경력을 순서대로 꼽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지난해 말 325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한 ‘2013년 신입사원 채용실태’ 보고서에서 ‘조사기의 65%가 스펙을 최소한의 자격 요건 판단 목적으로만 활용한다’고 밝혔다.
하고 싶은 일 하려는 인성 좋은 사람이 만점 지원자실제로 많은 기업 인사담당자와 인사 전문가들은 “기업 채용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기업교육 전문가인 이민영 티앤디파트너스 소장은 최근 채용 트렌드를 스‘ 펙보다는 인성’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이 소장은 “요즘 신입사원을 뽑을 때 합숙 평가를 하는 기업이 많은데 게임이나 미션(임무)을 수행할때 지나치게 승부욕이 강한 지원자는 오히려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서류전형·필기시험을 통해 기본 능력이 검증된 지원자들이 모였을 때 인사담당자들은 조직에서 얼마나 잘 협동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본다는 것이다.
취업 준비생들이 스펙 쌓기에 몰두한 나머지 중요한 부분을 놓친다는 지적도 있다. 리더십 컨설팅 및 헤드허팅 회사인 하이드릭앤스트러글스코리아 조미진 부사장은 “본인의 잠재력과 비전 등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없이 외부에서 원하는 조건을 갖추기에만 급급한 경우를 많이 봤다”고 말했다. 그는 “힘들게 대기업에 입사한 뒤 정작 조직과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입사원들이 많은 것은 하고 싶은 일, 자기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했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도 변하고 있다. 기업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기업이 원하는 진짜 ‘스펙(SPEC)’은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고(Story), 인성을 갖추고(Personality), 직무 전문성(Expertise)을 갖췄으며, 소통·협업 능력(Communication)을 겸비한 인재다. 삼성그룹이 자사 채용 사이트인 ‘삼성 커리어스’에 밝힌 인재상은 이렇다. ‘열정과 몰입으로 미래에 도전하는 인재, 학습과 창조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재, 열린 마음으로 소통·협업하는 인재’다. 여기에 덧붙여 직무 전문성을 강조한다.
삼성 미래전략실 홍경선 부장은 “새로 변경된 채용 방식에서는 전문 기술을 쌓은 것과 자신만의 인생 스토리를 만들면 유리할 것”이라며 “예를 들면 해외 연수보다는 실제 직무 수행에 관련된 경험을 쌓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의 인재상은 ‘열린 마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 지속적인 혁신과 창조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하는 사람’이다. 최근에는 ‘인성과 열정·끈기’를 강조한다. 창의력과 전문성·역사관·소통·협력, 도전적 실행도 현대차가 중요하게 보는 사항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융합이라는 자동차 산업 패러다임 변화에 걸맞은 감각과 아이디어를 가진 인재를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직무와 상관없는 어학연수나 봉사활동, 일관성이 없는 대외 활동은 (입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SK그룹 역시 열정과 창조성·패기를 강조한다. SK텔레콤 인사담당자는 “기존의 통신사업 외에도 다양한 영역으로 성장 발판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도전정신과 혁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재를 원한다”고 밝혔다. 이어 “창의력과 패기, 글로벌 감각을 갖추고 회사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을 뽑으려 한다”고 했다. SK그룹은 창의적 문제해결, 과감한 실행, 상호 성장추구, 최고 전문성 추구 이 네 가지를 성공 잠재력이 있는 인재의 특징으로 꼽는다.
‘인화’를 최고 가치로 뒀던 LG그룹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가령 LG생활건강이 유독 강조하는 것은 ‘전문성’이다. 인사부서는 채용 가이드라인만 정해줄 뿐, 현업 부서가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신입사원을 직접 뽑는다. 김흥식 LG생활건강 상무는 “요즘세대는 자기 적성에 맞게 일하고 싶은 분야를 명확하게 정해놓는다”며 “대기업들도 직무별 능력을 보기 위해 전형을 세분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CJ그룹은 실무형·현장형 인재를 강조한다. 이 회사는 아르바이트를 1년 동안 하면 서류전형을 면제해주기도 한다. 또한 10년 넘게 인턴십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CJ그룹 인사담당자는 “소비자와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 그룹 차원에서 공통 역량을 평가하고 계열사별로는 직무 관련 전문 역량을 본다”고 말했다.
CJ그룹은 ‘정직하고 열정적·창의적인 인재, 글로벌 역량과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이상적으로 꼽는다. 최근에는 강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갖추고 두 가지를 조화하며 성과를 내는 ‘강유인재’를 내세우고 있다.
고객 대하는 능력 강조하는 금융권금융권에서는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하는 곳이 많다. KB국민은행은 신입사원 채용 때 인문학 도서를 선정하고 토론을 하는 면접을 시행한다. 우리은행도 자기소개서에 감명 깊게 읽은 인문학 서적 3권과 느낀 점을 적는 항목이 있다. 한국사·국어·한자 등 관련 자격증을 소지한 사람을 우대한다.
이와 관련, 국민은행 인사담당자는 “은행은 젊은층부터 고령층까지 두루 만나기 때문에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교감 능력이 필요하다”며 “업무능력도 중요하지만 고객을 대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인문학 소양평가를 통해 최종 합격한 신입 행원들은 실제로 각 근무 영업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실무진·임원 면접이 주류였던 금융권에서는 최근 다양한 방식의 면접이 시행된다. 신한은행은 자기소개서만으로 1차 전형을 하고 나머지는 합숙 면접 없이 종일 면접으로 끝낸다. 신한은행은 조직과 동료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조직형 인재를 선호하는 편이다. 다른 은행에 비해 학군장교(ROTC) 출신이 많은 이유다. 하나은행은 ‘게임 면접’이라는 독특한 면접을 진행한다.
‘말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만 의사를 소통해 ○○을 수행해 보세요’ 등 은행이 직접 만든 5~6가지의 게임을 시켜보면서 과제 수행 능력과 태도를 평가하는 것이다. 송여익 하나은행 인력지원부 부장은 “1시간 놀이가 1시간 면접보다 다각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현대해상화재보험이 ‘역할 연기’를 면접에 포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대해상 관계자는 “스펙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대해야 하는 업종인 만큼 인성과 마인드가 채용의 중요 항목으로 꼽힌다”고 말했다.
지훈상 교보생명 과장은 “경영환경이 좋지 않을수록 기업들은 고민이 많아지는 데 적극적인 아이디어나 상품 등 적극성을 보여주는 것도 하나의 팁”이라고 말했다. 은행과 달리 증권·카드사는 아무래도 관련 전문 지식이나 자격증을 보유한 응시자에게 가산점을 준다. 김범석 미래에셋증권 팀장은 “증권회사는 은행권과 달리 전문직을 꼽기 때문에 증권업에 대한 지식과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문·잡지 꾸준히 읽어 세상 흐름 따라 잡아야그러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채용전형의 변화에 따라 입사 지원자들이 준비할 항목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기업은 학점이나 영어성적 등의 스펙보다는 역사·문학·교양 등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한다. 특히 ‘융합형 인재’를 강조하며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는 다양한 분야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업무 현장에서 창의력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삼성이 직무적성검사에서 역사 관련문항을 늘리기로 하는 등 지원자의 역사지식을 묻는 기업도 늘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결국 과거를 통찰해 얻는다는 것이다.
기업은 단순히 전공 지식을 암기하는 ‘학생’에서 벗어나 세상의 변화와 흐름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회인’으로 변신할 수 있는 인재를 찾는다. 평소 신문과 잡지, 교양서적을 꾸준히 읽어 사회 여러 분야의 움직임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협력을 통해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조직친화적 인재가 되려면 동호회·인턴십·공모전 등 단체활동 경험을 쌓는 것이 도움이 된다.
삼성그룹이 발표한 새로운 채용전형에 대해 인사담당자들은 다소 엇갈리는 의견을 내놨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학력 차별을 내세웠지만 삼성 입장에서는 SSAT로 인해 매년 수십억 씩 드는 채용 비용을 줄이는 효과도 누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른 기업의 인사담당자는 “삼성그룹의 채용 방식에 대해서는 향후 검증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며 “각 기업이 채용전략의 변화를 줘야 할지 고민하는 계기는 됐지만 당분간 공채 방식의 큰 틀은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류전형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한 시중은행 인사 담당자는 “학력과 나이 제한을 없애고 채용한다는 한 은행의 경우, 신입사원 이력서를 받으면 외주 헤드헌팅 회사에 의뢰해 은행이 원하는 일정 조건에 맞춰 1차로 선별한다”며 “결국 기업들이 원하는 스펙에 맞춰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헤드헌팅업체 관계자는 “스펙을 보지 않는다 해도 이왕이면 관련 자격증 등 준비를 많이 한 지원자가 낫지 않겠느냐”며 “열린 채용을 이유로 기업들이 열정이나 잠재력 등까지 보면 취업자들에겐 더 부담”이라고 말했다. 지원서에 자격증과 해외연수 경험 등의 항목을 삭제하는 곳이 늘고 있지만, 자기소개서에 적어내기 때문에 허울뿐 일 수 있다는 지적도 많다.
매년 기업에서 요구하는 준비 사항이나 요구가 자주 바뀌어 오히려 취업자 부담만 키운다는 목소리도 크다. 김흥식 커리어 맨투피아 사장은 “채용 기준이 바뀌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학벌 중심인 만큼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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