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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 바람 불 땐 ‘엄벌’, 경제활성화 분위기 땐 ‘선처’

경제민주화 바람 불 땐 ‘엄벌’, 경제활성화 분위기 땐 ‘선처’

과도한 배임죄 적용 완화 움직임 … 탈세 등은 엄벌해야



2012년 불어 닥친 경제민주화 바람은 죄를 지은 대기업 총수의 엄벌주의로 이어졌다.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인정받지 못했고,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이라는 양형 공식도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해 최근 법원이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재차 논란이 일고 있다. 재벌 봐주기의 부활이라는 비판과 함께, 어려운 경제 여건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판결이라는 옹호론도 나온다. 이 참에 기업인의 자율적 경영활동을 옥죄는 배임죄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단, 탈세 등 죄질이 나쁜 사람까지 봐주는 건 곤란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다른 대기업 총수들의 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거리다.


한화그룹 압수수색으로 시작된 검찰 수사 1245일, 구속 수감 545일 만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영어의 몸에서 풀려났다. 예상치 않은 판결이었다. 재계는 환영했고, 일부 시민단체는 ‘재벌 봐주기의 부활’이라며 성토했다. 2월 11일 서울고법형사 5부(김기정 부장판사)는 김승연 회장의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3년의 원심을 깨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김 회장은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횡령·배임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가 밝힌 양형 이유는 이렇다. ‘기업주가 회사 자산을 개인적 치부를 위한 목적으로 활용한 전형적인 사안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1597억원이 공탁되는 등 실질적 피해 회복 조치들이 이뤄졌다. 피해 위험 규모도 확대 평가된 측면이 있다. 우리나라 경제 건설에 이바지한 공로와 현재의 건강상태를 참작했다.’

앞서 2심(항소심) 재판부는 ‘한화그룹의 실질적 경영자로서 법의준수와 사회적 책임이행을 다해야 할 위치에 있음에도 주식회사 법 제도의 본질적 가치와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훼손하는 범행을 해 실형 선고가 불가피하다’며 징역 3년, 벌금 51억원을 선고했다.

또한 ‘최근 기업의 자율적 경영을 위해 배임죄 확장 제한논의가 있지만 이 사건은 적법 절차 과정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배임죄 논란과 사안이 다르다’고 판시했다. 2심과 파기환송심의 판결 내용이 확 달라진 것이다. 검찰은 1·2심과 파기환송심에서 ‘김 회장이 지능적이고 교묘한 범행 수법을 이용해 계열사로 하여금 자신의 차명소유 회사 빚을 갚도록 했다’며 모두 징역 9년과 벌금 1500억원을 구형했다.



한화그룹 계열 상장사 주가 강세한화그룹은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한화는 ‘판결을 존중한다. 국가경제에 기여하겠다’는 무미건조한 공식 입장을 내놨지만, 잔치 분위기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그동안 재판에 불려간 임직원만 300명이 넘는다”며 “총수 부재라는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는 것만으로 그룹이 안정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 판결소식 후 한화 계열 상장사 주가는 일제히 강세를 보였다.

일단 관심은 김승연 회장의 복귀 시점이다. 당장 현업에 복귀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다수다. 법원이 네 차례나 구속집행정지 연장을 결정한 이유가 김승연 회장의 건강이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조울증·만성폐질환·폐렴·저산소증·호흡곤란·요추골절·낙상 등을 이유로 구속집행이 정지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검찰 역시 김 회장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럼에도 1년 이내에는 김 회장이 복귀할 것으로 재계는 본다. 그룹 현안이 산적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화 계열사에서 근무하는 한 관계자는 “(김승연 회장이 구속된) 2012년 8월 16일부터 한화그룹의 시계는 사실상 멈췄다”며 “주요 임원들이 툭하면 검찰에 불려가거나 관련 업무에 매달리는 통에 조금 민감한 사안은 죄다 ‘결재가 나겠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말했다.

한화생명이 대표적이다. 한화생명 관계자는 “ING생명 아시아 해외법인(홍콩·말레이시아·태국)과, ING생명 한국법인, LIG손해보험 등이 줄줄이 매물로 나왔다. 내부에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김 회장이 부재한 상황에서) 조 단위의 투자 의사결정은 부담스러웠다”고 전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당시 ING그룹은 한화그룹의 보험사 경영 레코드를 신뢰하면서도, 소극적인 태도에 의아해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화그룹 다른 관계자는 “(김 회장의) 복귀시기를 언급하기엔 이르다. 일단 건강 회복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비상경영위원회 체제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한화그룹은 지난해 4월부터 김연배 한화증권 부회장과 홍기준 한화케미칼 부회장, 홍원기 한화호텔앤리조트 사장, 최금암 한화그룹 기획실장 등으로 구성된 비상경영위원회를 출범해 주요 사안을 결정했다.

당분간 비상경영위원회 체제가 이어지더라도 김 회장이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여지가 커질 수 있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비상경영위원회 체제는 당분간 이어진다”고 못 박으며 “다만 금은 아니더라도, 향후 비상경영위원회 운영 과정에서 김승연 회장의 의사를 반영하는 구체적인 과정이 추가될 수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9월 한화그룹이 부회장급으로 영입한 양천식 전 수출입은행장과 김대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움직임도 관심사다. 김대기 한화그룹 부회장은 제조와 서비스 부문, 양천식 한화생명 상임고문은 금융 부문으로 업무를 분장해 각각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대외협력을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흘러나온다.

경제기획원 출신인 김대기 부회장은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 청와대 경제수석,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역임했다. 양천식 상임고문도 청와대 금융비서관과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에 대해 한화그룹은 “직책을 맡지 않은 상황에서 고문이나 부회장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김 부회장과 양 고문은) 공식적인 역할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화그룹의 다른 관계자는 “통상 그룹 인사가 연말에 나는데, 아직까지 인사가 나지 않아서 김대기 부회장과 양천식 상임고문의 공식적인 업무가 결정되지 않았다. 본인들도 대놓고 업무에 적극 나서기는 어려운 상황으로 안다. 조만간 그룹 인사가 공식적으로 나면 김 부회장과 양 상임고문을 중심으로 한화그룹의 변화가 추진될 수 있다”며 “한화그룹의 방향성을 판단하려면 이번 인사를 유심히 봐야 한다”고 언급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2월 11일 오후 파기환송심 선고를 위해 구급차를 타고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재계 “기계적으로 과한 형량” 불만김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큐셀 전략마케팅실장이 전면에 나설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현재 김 실장은 그룹의 태양광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영국에서 태양광 사업 수주에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륜과 경험을 고려할 때 김동관 실장이 그룹을 이끌기엔 아직 시기상조라는 게 중론이다.

한화그룹과 무관하게, 김승연 회장 판결을 놓고 여러 이야기가 분분하다. 재계에선 수 년 간 지속된 ‘재벌 엄벌주의’ 기류가 바뀌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 섞인 전망이 나온다. 그동안 재계는 법원이 경제민주화 시류에 따라 범죄 경중에 비해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과한 형량을 선고한다는 불만이 팽배했다. ‘사법 포퓰리즘’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일부 시민단체 입장은 정반대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2월 12일 성명을 내고 ‘이번 사법부 판결은 청와대의 기류에 편승한 정치적 판단에 따른 판결’이라며 ‘사법부의 재벌 총수 비리에 대한 엄단 의지와 사법 정의 실현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기웅 경실련 경제정책부장은 “김승연 회장 이외에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이 각각 집행유예로 면죄부를 받은 바 있다”며 “사회적 약자에게 엄하게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법원이 재벌에게 집행유예를 남발할 경우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경제개혁연대 역시 성명을 통해 “경제발전에 힘쓴 점과 좋지 않은 건강상태를 참작한 것은 과거 재벌들에 면죄부를 주던 판결문과 완전히 동일하다”며 “전형적인 재벌 봐주기 판결로 규정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따로 논평을 내지 않았다.

경제개혁연대의 지적대로 대기업 총수 판결문에 ‘경제발전의 공로’가 언급된 것은 오랜만의 일이다. 지난 대선 전부터 경제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대기업 총수 범죄에 대한 관용과 용인에 대해 비난이 들끓었다. 이른바 ‘3-5 룰(징역 3년, 집행유예 5년)판결’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컸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법정에선 주요 그룹 총수들은 대부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구속을 면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100억원대 조세포탈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1~3심 모두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고, 나중에 특별사면을 받았다.

600억원대 횡령과 1000억원대 배임 혐의로 기소됐던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역시 3심에서 같은 형량을 선고 받았다. 1조5000억원대 분식회계 혐의로 기소된 최태원 SK그룹 회장, 2800억원대 분식회계혐의로 기소됐던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 1100억원대 비자금조성 혐의를 받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모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받은 후 모두 특별사면 됐다.

하지만 2012년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회자 자금횡령 혐의로 기소된 최태원 회장은 1·2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횡령 혐의로 기소된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에게 법원은 2012년 초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했다. 앞서 대법원 산하 양형위원회는 화이트칼라 범죄의 횡령·배임죄 양형 기준을 강화하는 등 ‘대기업에 온정주의 판결을 한다’는 비난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 김승연 회장 판결은 적잖은 논란을 일으킬 전망이다. 경제민주화 이슈가 잦아들고 정부 정책기조가 경제활성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사법 당국 역시 이런 시류에 편승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적지 않다. 실제로 서울고법 형사 5부가 김승연 회장의 유죄로 인정한 배임액은 1585억원이다.

양형위원회가 정한 양형기준에 따르면, 300억원 이상의 배임죄의 경우 기본 형량은 5~8년, 감형을 해도 4~7년을 선고하도록 돼 있다. 이번 판결에 대해 비난이 나오는 이유는 양형에 부합하지 않은 형량을 선고했다는 것과, 경제활성화라는 새로운 시류에 영합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법원 ‘시류 판결’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해일각에선 이번 판결이 재계에 오히려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새누리당의 한 중진 의원은 “김 회장 재판이 이슈화되면서 대기업 오너의 범죄를 가중 처벌하는 법안이 다시 주목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회에 계류 중인 4건의 ‘특정경제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일부 개정 법률안’을 두고 한 말이다.

원혜영·오제세 민주당 의원, 민현주·정희수 새누리당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이 법안들은 기업인의 횡령·배임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모두 2012년에 발의됐다. 원혜영 의원 안은 횡령·배임으로 인한 재산 이득액이 300억원 이상일 경우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 50억~300억원 미만일 때는 최저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법원이 형기의 절반을 감형하더라도 집행유예의 요건인 3년 이하에 해당하지 않도록 해 집행유예 선고 남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민현주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더 강력하다. 재산 이득액이 300억원 이상일 때는 무기 또는 1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네 법안 모두 기업인 범죄에 대한 형량을 높여 집행유예 선고와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를 제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약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면, 김승연 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은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라는 온정주의 판결로 일관한 예전 사법 당국도 문제지만, 기업인에게 엄벌로만 일관한 최근 분위기 역시 문제였다. 법원이 이런 ‘시류 판결’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별 사건별로 양형 기준 원칙에 따라 선고하면 그만이다. 재판이 진행 중인 이재현 CJ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에 대한 판결이 더욱 주목 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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