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NTREPRENEURS | ‘한국의 페이팔’ 나올까

서울 성북구에 사는 주부 박모 씨는 요즘 ‘직구’(해외에서 물건을 직접 구매하는 것)에 빠져 있다. 한국에서는 100만원이 넘는 유명 청소기를 해외 쇼핑몰에서 40만원에 구입했다. 해외 유명 브랜드의 세일 기간에는 두 아이의 옷도 직구했다. “예전에는 국내의 옥션·지마켓·11번가 등을 이용했는데, 이젠 이베이나 아마존을 많이 이용합니다.” 직구를 하면서 인터넷 사용 패턴도 바뀌었다.
그동안 마이크로소프트의 웹브라우저 익스플로러를 사용해야만 전자결제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베이나 아마존에서 구글의 크롬, 애플 사파리 웹브라우저를 사용해도 문제되지 않았다. “페이팔이나 원클릭에 한 번 카드를 등록해 두면 그 다음부터 결제가 너무 쉬워요. 결제할 때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하던데요.” 박 씨는 직구를 하면서 한국의 결제 시스템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박 씨처럼 국내 전자결제 시스템에 불만의 목소리가 거세다. 전자상거래에서 30만원 이상 결제하려면 공인인증서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터넷상에서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전자 인감인 공인인증서는 전자결제 시장의 성장을 가로막는 ‘전봇대’라는 비난을 받았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전지현이 입고 나온 ‘천송이 코트’도 공인인증서의 불편함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외국인이 한국의 인터넷 쇼핑몰에서 천송이 코트를 사고 싶어도 공인인증서 때문에 구입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공인인증서가 창조경제에 역행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정부가 팔을 걷어 붙였다.
지난 4월 3일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전자금융감독규정 시행세칙을 개정한다고 발표했다. 5월 말부터 카드로 전자상거래를 할 때 공인인증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온라인 계좌이체의 경우 현행대로 30만원 이상 결제시 공인인증서 의무 사용은 그대로 존속된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할 때 페이팔같은 편하고 쉬운 결제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김승주 교수는 “공인인증서를 비판하는 것은 보안 시스템의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다”면서 “그로 인해 새로운 전자결제 시스템의 개발이 이뤄지지 않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가 이런 비판을 한 이유가 있다. 1999년 도입된 공인인증서 때문에 사설 인증시장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금융권이 공인인증서라는 정부의 가이드라인만 쫓아가느라 사용자의 편의성과 보안성을 높이는 기술은 전혀 개발되지 않았다. 전자지급결제대행사(PG)가 공인인증서를 대체할 만한 기술을 개발해도 카드사는 “문제가 생기면 너희들이 책임질 수 있냐”며 거부했다.
공인인증서를 사용하면 해킹이나 금융사고가 터져도 손해배상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도 금융권이 기술개발에서 손을 뗀 이유 중 하나다. 김 교수는 “공인인증서만 사용하면 다양한 서비스 개발이 어려워진다”면서 “외국에서는 여러 인증서 관련 상품이 개발되고 활용되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공인인증서, 편리성과 보안성 취약한국인터넷진흥원의 ‘국가정보보호백서 2013’에 따르면 2011년 한 해 정보보호 관련 지출이 없는 민간 사업체가 73.3%나 된다. IT 예산 중 정보보호 예산 비율이 5% 이상인 사업체는 3.1%에 그쳤다. 그나마 정부 기관의 경우 정보보호 예산이 IT 전체 예산의 10% 이상인 기관이 32.5%로 높았다.
미국과 영국의 IT 예산 중 정보보호 예산 비중이 각각 40%, 50%로 알려졌다. 공인인증서라는 만능키(?) 덕분에 정부기관과 민간기업의 정보보호 투자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카드사가 공인인증서를 책임 회피 수단으로 사용하지 못하면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공인인증서는 한국의 독특한 인터넷 환경과 맞물려 악명이 높다. 한국은 유독 익스플로러 점유율이 높다. 정보기술 통계포털인스탯카운터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한국의 익스플로러 점유율은 75.04%다. 익스플로러는 한때 국내에서 90%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공인인증서를 사용하려면 익스플로러의 플러그인인 ‘액티브엑스’를 설치해야만 한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결제할때면 시도 때도 없이 ‘프로그램을 설치하라’는 문구가 나오는 이유다.
이 뿐만 아니다. 공인인증서는 대법원, 국세청 등 정부부처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서류를 발급받고 결제하는 데도 꼭 필요하다. 공인인증을 하려면 수많은 액티브엑스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한다. 정부부처 사이트에서 사용하는 액티브엑스가 충돌해 한쪽에서는 서류를 발급받았는데, 또 다른 곳에서는 서류를 발급받지 못할 때가 있다. 이때는 먼저 설치해놓은 액티브엑스를 제거한 후 새로운 액티브엑스를 깔아야 한다.
심지어 익스플로러 버전이 맞지 않으면 공인인증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설치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정부부처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하려면 컴퓨터 전문가가 돼야만 하는 실정이다. 정부는 보안성을 높인다는 이유로 공인인증서를 도입했지만 이용자의 편의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공인인증서만 믿게 되면서 보안성도 흔들렸다. 공인인증서 해킹 사례도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공인인증서 맹신이 가져다 준 결과다. 공인인증서 때문에 전자결제 시장도 발전하지 못했다.
페이팔은 전자결제 시장 활성화를 말해주는 좋은 예다. 지난 한 해 동안 페이팔을 통해 193개국에서 1800억 달러의 거래가 이뤄졌다. 페이팔 매출액은 66억 달러였다. 현재 26개 통화로 이용 가능하다.
공인인증서 의무사용 폐지로 한국에서 페이팔같은 결제전문 민간기업이 나올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현재는 어렵다”고 단언했다. 공인인증서 의무사용은 폐지됐지만, 카드사가 여전히 공인인증서 사용 여부를 결정하는 키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카드사가 계속 공인인증서만 인정한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인인증서를 대체할 수 있는 금액인증 결제시스템을 개발한 PG업체 페이게이트 박소영 대표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액티브 엑스설치 없이 결제할 수 있는 금액인증 결제시스템은 ‘인증방법평가위원회’의 허가도 받아냈다. 편의성과 보안성을 모두 인정받은 것. 하지만 카드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 대표는 “공인인증서 의무 사용은 폐지되지만, 전자상거래 이용시 ‘인증’의 문제는 아직 존재한다”면서 “인증방법을 제공하는 카드사가 공인인증서 대체 시스템을 거부하면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관련 업계에서도 “카드사의 태도 변화가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인터넷 서점 알라딘도 페이게이트 결제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카드사의 결제 거부로 곤욕을 치뤘다. 이 같은 상황은 바뀌지 않고 있다. 알라딘 관계자는 “정부의 발표 이후에도 태도가 변한 카드사가 한 곳도 없다”면서 “페이게이트가 개발한 금액인증 방법도 핑계를 대면서 확답을 주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태도 변화 없는 카드사옥션·11번가 등 오픈 마켓도 카드사의 눈치를 보는 중이다. 옥션·지마켓은 ‘스마일페이’라는 모바일 간편결제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현대카드와 삼성카드만 참여했다. 11번가에서 내놓은 모바일 간편결제인 ‘페이핀’에도 KB국민카드, 우리은행, 부산은행만 참여했다. SK플래닛 관계자는 “신용카드사와 PG업체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우 결제 독점권을 카드사가 갖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카드사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해시키는 것 밖에 없다.”
카드사는 느긋하다. 공인인증서 사용 여부는 카드사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공인인증서 의무사용 폐지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공식적인 답변”이라며 “공인인증서를 대체할 만큼 보안이 완벽한 수준의 기술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부 부처도 손을 놓고 있다. 카드사의 결정을 강제할 수 없다는 이유다. 금융감독원 IT금융정보보호단 관계자는 “카드사가 공인인증서 의무사용 폐지에 리스크를 느낄 수 있겠지만, 카드회사와 PG업체가 결정할 문제”라며 “점진적으로 바뀌어 나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시장 자율에 맡긴다는 얘기다.
카드사와 정부의 움직임은 더디기만 하다. 김승주 교수는 “전자결제 시장은 엄청나게 커질 수밖에 없다”면서 “페이팔이나 원클릭 같이 편의성과 보안성을 함께 갖춘 시스템을 마련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지적했다. 카드사와 정부의 적극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많이 본 뉴스
MAGAZINE
MAGAZINE
Klout
Klout
섹션 하이라이트
섹션 하이라이트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 모아보기
- 일간스포츠
- 이데일리
- 마켓in
- 팜이데일리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현대약품, 영남권 산불 피해 주민에 구호물품 지원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45세’ 김종민 경사…공개 열애 8개월만, 오늘(20일) 결혼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대학서 강의한 아파트 관리소장 징계받은 이유[슬기로운회사생활]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한화에어로 유증 여전히 물음표…또 제동 걸렸다[위클리IB]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마켓인
마켓인
[동물실험 폐지 명암] 투심 쏠린 토모큐브, 빅파마가 주목하는 까닭①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