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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KCHON | 사람 냄새나는 도심 속 ‘타임머신’

BUKCHON | 사람 냄새나는 도심 속 ‘타임머신’

아띠인력거 이인재 대표는 북촌에서 인력거를 끈다. 사업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2년 동안 골목 구석구석 다니는 사이 ‘북촌 예찬론자’가 됐다.
이인재 대표가 모는 인력거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부드러운 힘이 있다. 북촌에서 인력거 손님과 행인이 인사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저기 있는 백송(白松) 한 그루 보이시죠? 이 백송에는 흥선대원군과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1860년대 초 흥선 대원군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물리치고 왕정을 추진할 때였어요. 당시 흥선대원군은 백송의 밑동이 유난히 희게 변한 것을 보고 자신의 계획이 성공하리라 확신했답니다. 백송이 ‘좋은 변화의 징조’이기 때문이에요. 백송의 예언대로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습니다.”

청년은 인력거를 백송 앞에 세우더니 도란도란 설명을 이어갔다. 기자를 대뜸 인력거에 태워 북촌 곳곳을 다니다가 “가장 좋아하는 곳을 보여주겠다”며 찾은 장소였다. 인력거가 멈춘 곳은 헌법재판소 내 작은 공원. 백송의 나이는 600세다. 조선 개국 당시 중국의 한 사신이 한양에 가져와 심은 유서 깊은 나무다.

청년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개화파 박규수의 집터도 이 근처에 있다”며 “변화를 외치던 개화파도, 법을 바꾸는 헌법재판소도 백송과 함께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력거에 손님을 태워 북촌 곳곳을 다니는 사업을 한다. 아띠인력거의 이인재(30) 대표다.

이 대표는 소위 말하는 ‘모범생’이었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가 웨슬리안대를 졸업(역사·철학 전공)하고 한국에 돌아와 맥쿼리 증권에 근무했다. 맥쿼리는 전 세계 28개국에 1만3400명의 임직원을 둔 글로벌 금융그룹이다. 하지만 그는 1년 만인 2010년 돌연 사표를 던졌다.

“증권사를 다니면서 금융 분야는 제 꿈과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인 윤동주, 이상을 좋아하는데 그들은 젊었을 때 업적을 남겼거든요. 그때 좋은 아이디어도 많이 떠오르고 열정도 높기 때문이에요. 하루라도 젊었을 때 원하는 일을 해야한다는 조바심이 드니까 주저 없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처음엔 반대했지만 제 뜻을 이해하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그때 인력거 사업을 하기로 맘먹었다. 이 대표가 미국 유학 시절 염두에 뒀던 일이었다. 친한 후배가 공부하던 캠퍼스를 놀러왔는데 지체 장애가 있어 마음껏 구경시켜줄 수가 없었다. 이 대표는 자전거에 휠체어를 묶어 학교 곳곳을 돌아다녔고 후배는 무척 즐거워했다.

창업을 결심한 후 서울 종로구 원남동에 얻은 차고에서 3개월 동안 숙식하며 사업을 준비했다. 국내에 인력거를 생산하는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 대표는 중국에서 인력거를 공수해 왔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 이동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인력거를 몰고 다닐 장소를 물색했다.

그렇게 처음 둥지를 튼 곳이 북촌이었다. “일단 건물이 낮으니까 마음이 뻥 뚫린 기분이더군요. 빌딩 숲에 갇혀있는 기분이 아니라서 좋았어요. 나무도 많고 풍경도 좋으니까 인력거를 탄 손님들이 좋아할 것 같았죠. 그래서 북촌에 끌렸던 것 같아요.” 북촌 곳곳을 꼼꼼히 살피며 코스도 정했다. 한옥마을, 윤보선가, 국립현대미술관, 빨래터, 헌법재판소 등을 두루 다니는 코스였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이야깃거리가 있는 곳이 코스 선정 기준이었다. 2012년 7월 말 시작한 아띠인력거는 2년 만에 이용객 1만 명을 넘었다. 인력거 수는 처음 2대에서 14대로 7배 늘었다. 이용요금은 1시간에 1인당 2만5000원이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박원순 서울시장, 배우 안성기 씨 등도 아띠인력거를 탔다. 사업도 성장세를 보여 초기 대비 매출이 20배 늘었다. 올해부터는 충남 서천 국립생태원에서 인력거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사람 냄새나는 북촌 만들고 싶어2년이 지난 지금 이 대표가 바라보는 북촌은 어떤 모습일까. “북촌은 마치 서울 한가운데 놓인 타임머신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큰 빌딩 숲에서 길 몇 개만 건너면 오래된 골목이며 이야깃거리가 곳곳에 숨어있죠. 궁궐도 오래된 공간이지만 관람만 하는 곳이 잖아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은 북촌이 거의 유일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인력거는 창경궁 길 끄트머리에 있는 빨래터에 다다랐다. 이곳에서 조선시대 궁녀들이 빨래했었다는 이 대표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빨래터에는 돌 빨래판이 남아 있었다.

인적이 드문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긴 담벼락이 나왔다. 인력거 코스 중 하나인 이곳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가옥인 ‘윤보선 가옥’이다. 1870년 조선 고종 때 지은 집으로 당시 민가로선 최대 규모인 99칸이다. 1910년대에 윤보선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윤치소 씨가 매입했다. 이곳은 김구, 조병옥, 김성수, 이승만 등이 참여했던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산실이다. 가옥 건너편엔 망루 형태의 건물이 있었다. 이 대표의 설명이 이어졌다.

“당시 정보기관이 윤 전 대통령을 감시하려고 세운 건물이라고 전해집니다. 윤보선 가옥은 1950~70년대 정치 탄압을 피해 야당 사무실·회의실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한참을 운전하던 이 대표가 땀을 좀 식히겠다며 인력거를 돌렸다. 안국동 풍문여고 앞 감고당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다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가자 정독도서관이 나왔다. 그늘이 드리운 의자에 걸터 앉자 이곳에서도 타임머신 여행이 시작됐다.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는 정독도서관은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로 과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1900년 개교한 경기고등학교가 1976년 강남구 삼성1동으로 이전하면서 학교 건물에 도서관을 개관했다. 이 대표는 “이곳은 대한제국 시절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이란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북촌에 애정을 가질수록 아쉬운 점도 많다. 옛 가옥이 점차 사라져 가는 것도 그중 하나다.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한옥이 1만2000세대나 됐는데 지금은 10분의 1 밖에 안 남았어요. 잘 유지했더라면 유럽 중세도시들처럼 가치가 높지 않았을까 싶어요. 오래될수록 빛나는 곳이 북촌이거든요. 인력거 운전을 하다보면 외국인들이 북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 인력거 승객이야기를 들려줬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가족을 태운 적이 있어요. 그중 한 외국인은 앞이 보이지 않았죠. 인력거를 타면서 북촌을 이야기해주고 걷고 느낄 수 있게 해줬어요. 한국에서 경험한 것 중에 제일 재미있고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감동시킬만큼 가치가 높은 게 우리 옛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촌을 어떻게 보존할지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이 대표는 인력거 사업을 통해 북촌을 ‘사람 냄새나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 하자 그가 행인 한 명에게 크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했다. 행인은 당황하면서도 멋쩍게 웃으며 손인사를 건넸다. 이 대표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치면 서로 눈인사라도 하는 문화를 북촌에 만들고 싶어요. 현대인들이 바빠지면서 여유가 너무 없어졌거든요. 걸어다니면서 하면 어렵겠지만 인력거를 타고선 가능합니다. 북촌에서만이라도 같이 숨쉬고 사는 여유를 느꼈으면 해요. 공동체는 옛부터 내려온 우리의 가장 좋은 문화입니다.”

땀이 송글송글 맺힌 그에게 보람이 뭔지 묻자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수신 문자 한 통을 보여줬다. “행운 빌어주신 덕분에 면접을 잘 봤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대표가 인력거에 태운 첫 손님의 문자였다. 날씨가 추운 날 그는 정독도서관 앞에서 추위에 떠는 학생을 무료로 집까지 데려다 줬다. 다음 날이 면접이라는 학생에게 “인력거를 탄 것이 행운이니 잘 볼 것”이라며 덕담도 건넸다. 학생은 면접에 합격해 문자를 보냈고, 한 달 후 그의 인력거를 다시 탔다. 그가 바라는 북촌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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