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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민 기자의 센터링 경제학 ⑦ 유럽 축구계의 ‘홈그로운’ 제도 - 축구판 중소기업·창업 육성책

함승민 기자의 센터링 경제학 ⑦ 유럽 축구계의 ‘홈그로운’ 제도 - 축구판 중소기업·창업 육성책

첼시 소속의 세스크 파브레가스 선수. 그는 잉글랜드 ‘홈그로운’ 자격을 갖고 있지만, 제도가 개정되면 다시 외국인 신세가 될 수 있다.
‘홈그로운(home grown) 적용 축소’. 지난 연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 난데 없는 소식이 퍼졌다. 잉글랜드 축구협회(FA)가 홈그로운 제도 개정을 추진하면서 그동안 ‘잉글랜드 출신’으로 인정받던 세스크 파브레가스(첼시), 가엘 클리시(맨시티), 하파엘(맨유), 슈체츠니(아스날), 슈나이덜린(사우스햄튼) 등이 다시 ‘외국인’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당 선수들이나 소속팀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홈그로운은 2010-2011 시즌부터 EPL이 시행하고 있는 ‘25인 로스터’ 제도에 포함된 개념이다. 25인 로스터는 각 팀이 리그에 참가할 25명의 선수를 사전에 등록하는 제도를 말한다. 경기 직전 발표하는 18명(선발 11명+후보 7명)이 한 경기의 출전명단이라면, 로스터는 한 시즌 전체의 출전명단이라고 보면 된다.
 유소년 육성 위해 ‘홈그로운’ 제도 도입
25명이란 숫자는 구단 입장에서는 그리 넉넉하진 않다. 상위팀의 경우 자국리그를 포함한 리그컵, FA컵과 함께 챔피언스리그(또는 유로파리그)와 같은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빡빡한 일정탓에 보통 사흘에 한 경기, 잦게는 이틀에 한 경기를 치러야 한다. 여기에 부상·징계 등 돌발변수까지 따져야 하기 때문에 구단 입장으로서는 한 명이라도 더 가용한 선수가 로스터에 있는 게 중요하다.

이런 로스터 제도에 까다로운 단서 하나를 덧붙인 게 홈그로운 제도다. 모든 팀은 로스터 25명 중 8명 이상을 홈그로운으로 채워야 한다는 규정이다. 홈그로운은 국적에 관계없이 21세 이전에 잉글랜드(또는 웨일스)에서 3년 이상 훈련 받은 선수에게 주어지는 자격이다. 즉 ‘선수가 어디에서 태어났든 간에 이 땅에서 자라고 훈련 받았으면 잉글랜드 출신으로 본다. 그리고 각 팀은 이런 선수 8명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표는 EPL 첼시의 25인 로스터 명단이다. 오른쪽에 HG라고 표시된 3명이 홈그로운 선수다. 이 중 존 테리와 개리 케이힐은 잉글랜드에서 나고 자란 선수다. 파브레가스는 다르다. 국적이 스페인이다. 단, 파브레가스는 16세이던 2003년에 아스날에 입단해 2011년 바르셀로나로 이적할 때까지 7년 간 잉글랜드에서 훈련 받았다. 21세 이전에 잉글랜드 클럽에서 뛴 기간이 3년을 초과하기 때문에 홈그로운 요건을 충족시킨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첼시의 홈그로운 선수는 규정인 8명을 채우지 못했다. 이 경우는 어떻게 될까? 간단하다. 대신 그만큼 로스터의 숫자가 제한된다. 첼시의 경우 5명의 홈그로운이 부족하기 때문에 로스터를 20명으로 구성해야 한다. 숨가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구단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제재다.

홈그로운 제도는 각 구단의 유소년 선수 육성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이다. 규정에 맞추기 위해 각 구단이 취할 수 있는 대응은 크게 두 가지다. 홈그로운 선수를 영입하거나, 3년 후 홈그로운이 될 수 있는 18세 이하의 유소년을 키우는 것이다. 키워놓은 홈그로운이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 손해일까? 그렇지 않다. 규정치를 채우기 위한 영입경쟁 때문에 홈그로운 선수는 몸 값이 비싸다. 설령 우리팀의 주전 선수가 되지 않더라도 향후 이적 때 비싸게 팔기 위해서라도 홈그로운 선수를 일단 키우는 게 구단에겐 이익이다. 실제로 지난 시즌 사우스햄튼은 잘 키운 홈그로운 선수들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

첼시의 사례처럼 규정을 맞추지 못하는 팀이 나와도 유소년 육성이란 목표를 크게 해치진 않는다. 로스터 제도의 예외규정 이라는 묘미가 발휘돼서다. 규정에 따르면 21세 이하 선수들은 로스터에 등록되지 않았더라도 1군 팀 경기에 뛸 수 있다. 실제로 첼시는 20명이라는 부족한 선수단 수를 메우기 위해 로스터에 없는 커트 조우마 같은 21세 이하 유소년 선수를 종종 기용 하곤 한다. 구단이 홈그로운을 채우든 못 채우든 결과적으로는 유소년 선수의 활용 기회를 늘리는 것이다.
 홈그로운 선수 몸값 비싸
축구계 유소년 정책을 국가의 중소기업·창업 육성책으로 보면 어떨까. 국가를 하나의 리그, 국가 내 산업은 각 구단, 기업은 선수로 빗댄다면, 대규모 글로벌 기업은 베테랑 스타 선수, 창업 초기의 중소기업은 유소년 선수가 정도로 볼 수 있다. 로스터 제도의 25인처럼 각 산업에는 시장 규모가 있다. 한정된 로스터 자리를 두고 각 팀에서 치열한 주전경쟁을 하듯이, 기업들은 시장의 파이를 두고 경쟁한다.

여기서 딜레마가 시작된다. 주전 경쟁은 당연히 유소년 선수보다 경험 많은 스타 선수에게 유리하다. 사실 리그 입장에서도 일단은 당장 실력 있는 스타 선수가 있는 게 좋다. 각 선수(기업)의 인기와 실력은 팀(산업)의 역량이고 이런 팀들이 모여 리그(국가 경제)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스타 선수의 영입은 짧은 시간에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때로는 해외에서 거물급 선수를 영입하기 쉽도록 장벽을 낮추기도 한다. 자국 경제 활성화를 위해 각국이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거나, 대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내놓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리그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유소년 선수의 성장도 필요하다. 성장의 지속성을 위해서다. 지나치게 스타 선수에게만 의존하다가 그가 늙거나, 다치거나, 이적하기라도 하면 타격이 크다. 뒤가 없다. 팀에게도, 리그에게도 마찬가지다. 잘 나가던 이탈리아 세리에A 리그가 침체되는 것, 삼성과 현대차라는 쌍두마차가 삐걱거릴 때마다 한국 경제에 시름이 깊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혜택 받으려 성장 기피하는 ‘피터팬 증후군’
따라서 미리 유소년 선수를 키워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다만, 유소년을 키우려면 실전 경험이 필요하다. 쟁쟁한 선배들 틈바구니에서 기회를 갖긴 쉽지 않지만, 기회가 없으면 성장도 없다. 이 때문에 리그와 각 팀은 유소년 경기 출전에 대한 각종 혜택을 줘 그들이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선배들의 양보를 얻어내야 하지만, 이는 팀과 리그 스스로의 장기적인 생존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대신 유념해야 할 것은 어린 선수를 언제까지고 온실 속에서만 키울 수는 없다는 점이다. 유소년 선수만 있는 팀은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 성적도 부진하다. 또 스타 선수의 활약을 통한 팀 자체의 수준 향상, 베테랑 선수의 적절한 지도, 경쟁에서 오는 긴장감이 없다면 유소년의 성장은 오히려 더뎌진다. 미래를 버린 현재는 위험하지만, 현재를 버린 미래는 공염불이다.

재계에서 중소기업·창업 지원책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하는 바도 이런 점이다. 규모에 따라 회사가 작을수록 혜택은 늘리고 규제는 줄이다 보니, 계속된 지원을 받기 위해 성장을 기피하는 이른바 ‘피터팬 증후군’이 나타난다. 자생력 없이 지원으로 연명하는 ‘좀비 기업’의 증가도 달갑지 않은 현상이다. 일각에선 “대기업의 후려치기는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이게 가능한 것도 구조적으로 보면 기술력이 비슷한 중소업체가 지나치게 많아 그 사이의 경쟁이 심해진 탓”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만약 어떤 리그에서 유소년 선수에게 20경기 이상의 출전을 보장하기로 했다고 치자. 그런데 유소년의 기준이 나이가 아니라 실력이다. 실력이 늘지 않아야 출전이 보장된다면 선수들은 굳이 연습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실력은 그대로인데 출전이 보장되니 다른 곳 으로의 이적이나 은퇴 등 자연도태도 적다. 갈수록 선수단의 규모는 커져 이렇게 남은 낮은 실력의 선수가 20명에서 100명으로 증가한다. 보장된 20경기의 출전 시간을 100명이 나눠 가지면서 출전 경험과 실력 향상의 기회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리그와 구단에서 유소년을 키우는 이유는 엄밀히 말하면 유소년 선수가 많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이들을 스타 선수로 만들기 위해서다. 스타가 된 유소년이 지금의 스타 선수와 시너지 효과를 만들기도, 이들의 자리를 대체하기도 하면서 팀과 리그가 발전하는 것이다. 스타가 될 잠재력과 의지가 없는 유소년 선수는 구단에 부담을 줄 뿐이다. 중소기업과 국가 경제의 관계도 이와 같다.

이런 측면에서 유럽 축구계의 홈그로운은 여러모로 치밀하게 짜인 제도다. 이 제도 아래에서 유소년 선수는 당장이야 혜택을 받겠지만 이것이 영원하지는 않다. 시간이 지나 성인 선수가 되면 자연스럽게 무한경쟁에 노출된다. 유소년 딱지를 떼고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호를 받는 동안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성인 선수와 도 겨룰 만한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

사실 경쟁은 유소년 시절부터 시작이다. 성인 선수와의 경쟁에서는 지원이라는 갑옷을 입지만, 똑같은 지원을 받는 유소년 사이의 경쟁은 맨몸으로 부 딪치는 것과 같다. 이 과정에서 성인 선수와 도 겨룰 수 있는 튼튼한 몸을 만드는 셈이다. 다만, 적어도 유소년 시절 동안만은 성인 선수의 빈 주먹에 나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확실한 지원과 보호가 전제돼야 한다.

한편 또 하나 홈그로운 제도의 재미있는 부분은 ‘국적에 상관 없이…’다. 이 단서는 굉장히 이중적이다. 외국인 선수를 위한 문을 열어둔 것 같기도 하지만, 18세 이전부터 잉글랜드에서 훈련을 받아야 함을 감안하면 자국 유소년에게 훨씬 유리한 조항으로 볼 수도 있다. ‘자국 유소년’으로 제한을 두기 보다 유소년 육성에 비중을 뒀다. 이를 통해 외국인 선수도 적극 유치하면서 자국선수에게도 간접적인 혜택이 가는 방식이다.
 외국인 선수를 위한 문 열어둬
아쉬운 점은 EPL의 홈그로운 제도에 변화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FA 회장 그레그 다이크는 지난해 5월 84장에 달하는 보고서를 공개하며 잉글랜드 축구의 대대적인 개혁을 천명했다. 현재의 홈그로운 자격을 ‘21세 이전 3년 훈련’에서 ‘21세 이전 5년 훈련’으로 바꾸고 로스터 내 필수 홈그로운 수를 8명에서 14명으로 확대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그만큼 외국인 선수의 EPL진출은 까다로워진다. 이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이 여러 국가대항전에서 맥을 추지 못하자 ‘유소년’보다는 ‘자국선수’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각국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무역장벽을 세우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이 부분은 여덟 번째 센터링경제학 ‘축구와 경제, 보호주의의 딜레마’에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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