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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해킹하라

소설을 해킹하라

작가 데이비드 쉴즈는 “요즘 사람들은 허구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논픽션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소설이 기거하는 집의 기초는 1000년 전 레이디 무라사키가 세웠다(레이디 무라사키는 일본의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편소설로 꼽히는 ‘겐지 모노가타리’의 저자다.) 그 기초 작업에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쓴 고대 로마의 시인 호메로스와 ‘길가메시 서사시’를 점토 서판에 새겨 넣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필경사들이 도움이 됐다. 헨리 필딩(18세기 영국 소설가)은 벽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줬고, 세르반테스(‘돈키호테’를 쓴 17세기 스페인 소설가)는 창문을 냈다. 19세기의 위대한 러시아 문인들은 든든한 대들보를 올렸고, 찰스 디킨스와 제인 오스틴은 거실을 만들고 벽난로를 놓았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는 수수한 현대식 부속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토머스 핀천은 정원에 외설적인 요정 석상들을 세웠다.

하지만 영원히 건재한 집은 없다. 최근 들어 소설은 망각의 늪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소설이 스토리텔링의 주요 수단이 됐다는 것이 큰 이유다. 하지만 이야기 전달의 수단으로서만 볼 때 책은 영화와 경쟁이 안 된다. 소설가 조너선 프랜즌은 1996년 문예지 ‘하퍼스’에 쓴 획기적인 수필에서 이런 현실을 우려했다. “우리는 진지한 예술의 전반적인 노후화로 보이는 현실에 봉착했다.” 당시는 ‘소프라노스’(미국 TV 드라마 시리즈)와 ‘그랜드 세프트 오토’(액션 게임)가 나오기 전이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심지어 프렌드스터(초기 소셜네트워크 중 하나)도 나오기 이전이었다. 프랜즌은 종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독서가 여전히 비현실적 현실에 도달하는 주요 수단인 사람들을 위해 종이 위에 글을 썼다.

소설이 사멸의 위기에 처한 지금 살아남기 위해선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
소설의 죽음은 그동안 많이 논의돼 왔다. 한때 웅장하고 화려했지만 지금은 흉물스럽게 변해버린 저택 같은 신세라고 할까? 소설의 종말을 논하고, 그 확실한 죽음에 대한 해설 기사를 쓰는 것은 곧 닥칠 재앙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피력하는 것이다. 문화적 재앙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또 어디선가 서점 하나가 문을 닫았는가? 미국인의 독서 습관에 관한 최근 보도를 읽었는가?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엔 이른지도 모른다. 어쩌면 부활이 가능할 수도 있으니까. ‘돈키호테’ 시절처럼 눈부시게 빛나던 과거로의 회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당시에는 언덕 위를 바라보면 (소설 말고) 다른 저택은 없었지만 요즘은 야한 넷플릭스 궁전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독서는 인간 본연의 행위다. 내가 알기로 그것은 제프 베조스(아마존의 설립자 겸 CEO)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고 우리의 망막 신경이 뇌까지 연결되는 한 지속될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인간 활동의 중심이다. 이야기는 어제 실제로 일어난 일뿐 아니라 일어날 뻔 했던 일, 그리고 1000일 전에 일어난 일과 앞으로 1만 일 후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관한 것이다. 소설은 이런 목적에 잘 맞았다. 하지만 소설이 사멸의 위기에 처한 지금 살아남기 위해선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 디지털 원주민들(digital natives, 컴퓨터·휴대전화 등 디지털 기기에 둘러싸여 성장한 세대)은 그 변화를 해킹이라고 부른다.

데이비드 쉴즈는 4년 전 저서 ‘리얼리티 헝거(Reality Hunger: A Manifesto)’에서 그런 해킹을 자신 있게 제안했다. 신랄하면서도 특이한 형태의 문학 비평서인 이 책에서 그는 소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원래의 형태를 떨쳐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롯과 캐릭터, 주제로 이뤄지는 소설의 기본 틀을 완전히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홈랜드(Homeland)’ 같은 TV 드라마가 훨씬 더 유리한데 왜 계속해서 그 틀을 고집하는가? 할 말이 있다면 소설의 유치한 변장 수단을 동원하지 말고 분명하고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쉴즈는 “소설은 하나의 형태일 뿐이며 그런 형태들은 문화에 기여한다”고 말했다. “그 형태들이 죽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들이 더는 살아 있음을 상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쉴즈는 창조적인 논픽션[그가 서정적 수필(lyrical essay)이라고 부르는 예술의 한 형태로서의 수필]이 소설의 예술적 기교를 유지하면서도 그 인위적 속임수를 버릴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요즘 사람들은 허구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논픽션을 좋아한다.” ‘리얼리티 헝거’에서는 서정적 수필과 함께 회고록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몽테뉴나 조안 디디언식의 자기진단으로서의 스토리텔링으로 가짜 삶이 아니라 진짜 삶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분은 분명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허구적인 줄거리를 이야기하지 않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내 생각엔 소설이 아니다. 쉴즈는 일종의 혼합 형태를 제안한다. 실제로 일어난 일과 꾸며낸 일, 생각과 관찰, 심사숙고와 추측이 뒤섞인 브리콜라주(도구를 닥치는 대로 써서 만드는 미술 작품)다. 그는 허먼 멜빌의 소설 ‘백경’과 셰익스피어의 연극 ‘햄릿’의 몇 부분에서 이런 특성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소설의 여러 장치를 무시하고 단순히 독자에게 진실을 말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플롯이라는 개념을 중학교 때 배운 대로 알고 있다. 쉴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처음 제시했던 그 개념은 화면 하단에 버튼이 잔뜩 달려 있던 킨들의 최초 버전만큼이나 시대에 뒤졌다고 말한다.

소설에 대한 쉴즈의 생각이 옳다는 사실이 최근 독서가들에 의해 입증된 듯하다. 칼 우버 크나우스가드의 ‘마이 스트러글(My Struggle)’은 지난 3년 동안 세계 문학계 최대의 화제작으로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총 6권으로 나온 이 작품은 소설을 가장한 자서전이다. 크나우스가드의 작품을 읽으면서 플롯을 찾으려 하는 것은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에서 저질 농담을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쉴즈가 제시한 새로운 소설의 형태에 가까운 크나우스가드의 작품들은 큰 인기를 끌었다. ‘허리케인으로 발이 묶인 저 두 연인은 어떻게 될까?’하는 궁금증이나 ‘폭탄으로 볼티모어가 초토화되기 전에 주인공이 그 폭탄을 찾아내면 좋을 텐데’하는 바람보다 더 깊은 욕구를 만족시키기 때문인 듯하다.

미국 소설가 리브카 갤천은 뉴욕타임스에 실린 ‘마이 스트러글’ 제3권에 대한 평론에 이렇게 썼다. “처음엔 독자들이 그렇게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만큼 참을성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그렇게 적은 정보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목격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지난해에는 수필도 인기를 끌었다. 레슬리 제이미슨의 ‘공감 시험(The Empathy Exams)’과 율라 비스의 ‘면역력에 관해(On Immunity: An Inoculation)’는 가장 널리 칭송 받은 수필집 두 편으로 꼽힌다. 이 수필들은 ‘미국 역사 403: 루이지애나 매입의 사회 시학(American History 403: The Socio-Poetics of the Louisiana Purchase)’이나 ‘월간 이론 세포물리학(Theoretical Cellular Physics Monthly)’에서 읽을 수 있는 종류와는 다르다. 오락거리 제공 이상의 뭔가를 의도한 젊은 여성들이 쓴 개인적이고 탐구적이며 생동감이 넘치는 글이다. 값싼 스릴을 원한다면 TV 드라마 시리즈 ‘매드 멘(Mad Men)’을 보면 된다.

L 매거진(뉴욕에서 발행되는 예술·문화 평론 잡지)에서 한 평론가는 찰스 담브로시오의 수필에 관해 이렇게 썼다. “지금 수필이 인기를 끄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 미국의 문화 담론은 하나의 단호한 결론에서 또 다른 단호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양면 가치나 의미의 미묘한 차이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의견과 결론의 빈곤한 흐름이다. 하지만 수필은 일상의 어두운 요소인 모순과 당혹스러움, 불확실성을 엿볼 수 있는 장르다.”

물론 소설이라는 집은 여전히 서 있다. 하지만 작은 부지 위에 크고 화려하게 지은 집처럼 불안해 보인다. 소설의 어휘는 시대에 뒤졌고 형태 역시 한물간 지 오래다. 2014년 원래 길이대로 출판된 소설 중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은 한 편도 없는 듯하다. 내가 읽은 소설 대다수는 라스콜니코프(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우중충한 건물 안마당을 배회할 때부터 줄곧 이어져 내려온 공식을 반복했다.

그렇다면 쉴즈의 말이 맞는 걸까? 크나우스가드가 우리의 구세주일까? 수필이 새로운 소설로 자리 잡을까? 소설은 중세 채색 필사본과 같은 길을 걷게 될까? 모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에즈라 파운드의 단호한 격언을 되새기기 딱 좋은 때다. ‘새롭게 하라(Make it new).’

-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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