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렘린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1시간 반 정도 대화를 나눴다. 여느 때처럼 핸섬한 그는 할 말이 많았고 패기만만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큰 아파트 구석구석을 보여주면서 부총리 시절의 기념품 몇 점을 자랑했다.
넴초프는 1996년 옐친의 대통령 재선 후 러시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옐친은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약 400㎞ 떨어진 니지 노브고로드의 젊은 개혁가 주지사였던 넴초프를 제1 부총리로 발탁했다. 에너지를 포함해 러시아 경제의 대부분을 관장하는 막강한 자리였다.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그 시절의 올리가르히를 제어하는 일이었다.
1990년대 내가 뉴스위크 모스크바 지국장으로 일할 때 ‘올리가르히’는 러시아에서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체제의 일원이라는 일반적 의미와는 아주 다른 뜻으로 사용됐다. 당시의 올리가르히는 가치 높은 국영업체를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했다.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을 줄이고 에너지, 통신, 자동차 같은 기간산업을 민영화하는 방안의 일환이었다.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뀌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그런 어마어마한 부의 이전에는 정치적인 요소도 들어 있었다. 민영화로 혜택을 본 올리가르히가 옐친의 재선을 지지했다. 1991년 러시아 혁명의 영웅이던 옐친은 겐나디 주가노프 러시아 공산당 당수를 상대로 선거전을 치렀다. 옐친의 경제 참모 아나톨리 추바이스는 옐친이 승리하면 구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 옐친의 승리에 올리가르히의 돈이 필요하다면 그 돈을 끌어다 써야 한다고 믿었다.
‘강도’ 자본주의 비난하며 개혁에 앞장서

넴초프는 부총리 시절 실제로 일을 하기보다 과시적인 쇼맨십으로 더 잘 알려졌다. 예를 들어 그는 정부 관리들에게 벤츠 승용차 대신 니지 노브고로드에서 만든 차를 타도록 했다. 사실 그런 평판은 약간 부당했다. 그는 올리가르히에게 쓴소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7년 4월 넴초프는 가장 막강한 올리가르히 7명을 개별적으로 만나 앞으론 국영자산 매각에서 조작된 입찰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워싱턴포스트지 모스크바 지국장을 지낸 데이비드 호프먼은 나중에 저서 ‘올리가르히(The Oligarchs)’에서 “당시 넴초프는 옐친, 추바이스, 재벌 체제 아래서 형성된 올리가르히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생각이었다”고 적었다.
그해 넴초프는 젊고, 카리스마 넘치며 옐친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러시아에서 떠오르는 스타였다. 옐친이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포퓰리스트 성향도 있었다. 머리가 비상하지만 기술관료였던 추바이스와 정반대였다. 그때까지 러시아를 무시했던 투자의 귀재 조지 소로스도 넴초프가 너무 마음에 들어 러시아에 투자하기로 생각을 바꿨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올리가르히와 정부는 국영 전화회사의 민영화를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에 휘말리며 방향을 잃었다. 그러다가 1998년 금융위기가 닥쳤다. 러시아는 막대한 부채에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하고 루블화 가치를 평가절하했다. 정부는 신뢰를 잃었고 넴초프도 쫓겨났다.
다음해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고 정신마저 오락가락하게 된 옐친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전 KGB 요원인 무명의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임명했다. 1999년 제야 새 천년이 시작되려는 순간 옐친은 급작스럽게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푸틴이 대통령 직무대행이 됐다. 넴초프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옐친 시절의 혼란이 초래한 탈진감을 이야기했다. 나를 비롯해 짐 콜린스 당시 러시아 주재 미국대사,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 등이 그랬듯이 넴초프도 적어도 푸틴은 젊고 원기왕성하며 어쩌면 유능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러시아에 일편단심 국익을 추구하는 지도자가 있는 게 오히려 나을지 모른다.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나 곧 넴초프는 반체제 편에 서게 됐다. 푸틴이 권력을 강화하고 본색을 드러내면서 러시아에선 반체제 세력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졌다. 지난 2월 27일 자정 무렵 넴초프가 총격에 쓰러졌을 때 그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내전 개입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행진을 이끌기 이틀 전이었다. 그 시위에서 크렘린이 부인하는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사태 개입에 관한 증거를 담은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이런 일이 응징 없이 끝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일편단심 국익을 추구하는 지도자’ 푸틴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실제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잘 안다. 태동하던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소멸됐다. 옛 소련권 국가였던 조지아에서, 그리고 지금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언론인과 반체제 인사들이 피살되거나 투옥됐다. 어디가 끝이고 어떻게 끝날 것인가?
스탈린의 굴라그(강제노동수용소)에서 18년을 보낸 예프게니 긴즈버그는 저서 ‘회오리바람 속으로의 여행(Journey Into the Whirlwind)’에서 이렇게 썼다. “이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의도적으로 그럴 수 있었을까?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런 놀라움 때문이었다. 나는 피해자이면서 관찰자였다. 나는 계속 혼잣말을 했다. 이런 일의 결과가 무엇일까? 이런 일이 응징 없이 그냥 끝날 수 있을까?”
이제 바로 그런 의문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서방 지도자들에게 던져졌다. 지금 그들은 허약하고 분열됐으며 아주 현실적인 다른 수많은 문제 때문에 주의가 산만한 상황이다. “이런 일(넴초프의 피살)이 응징 없이 그냥 끝날 수 있을까?”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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