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 음식 이야기 (4) 갑각류는 ‘일관성 없는 행동’을 상징한다
명화 속 음식 이야기 (4) 갑각류는 ‘일관성 없는 행동’을 상징한다
간혹 남의 노력에 대해 쉽게 말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댁 같은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겠지만, 그 따위로 써놓으면 미치게 아프다고요. 아세요? 우린 노력한다고요.” 자신의 음식에 대해 악평을 쓴 음식평론가에게 셰프는 분노를 폭발시킨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의 이야기다. 노력하는 사람은 보답을 받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셰프에게 보답이란 별 것 없다. 고객이 자기 음식을 맛있게 먹고 만족해주는 것.
음식평론가와 다툼이 있던 날, 셰프는 고용주에게 해고되고, 차라리 이 악재를 기회로 그는 자유롭게 꿈을 펼치기로 마음먹는다. 푸드 트럭을 타고 이 도시 저 도시로 옮겨 다니게 된 그는 그 지역의 시장에서 장을 보고, 그날그날마다 조금씩 다른 재료를 입수해서 환상적인 쿠바 샌드위치를 탄생시킨다.
내용보다는 요리 장면이 주가 되는 영화이지만, 마음에 남는 대사도 있다. 셰프가 푸드 트럭에서 처음으로 샌드위치를 만들던 날이었다. 일을 도와주던 아들이 샌드위치 빵을 조금 태웠는데, 이 정도면 대충 사람들에게 줘도 괜찮지 않겠냐고 묻자, 셰프가 정색하며 답한다. “내가 뭐든지 잘하는 건 아냐. 완벽하지 않아. 최고의 남편도 아니고. 하지만 이건 유일하게 잘 하는 거야. 나는 음식으로 사람들의 삶을 어루만질 수 있고, 그러면서 나도 힘을 얻어. 이래도 저 탄 샌드위치 손님 줘야 할까?”
셰프의 정열을 실은 푸드 트럭은 입소문을 탔고, 손님들이 그 앞에서 줄을 서기 시작했다. 맛있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들. 그중엔 예전에 악평을 했던 그 음식평론가도 끼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변명한다. “신랄하게 말하는 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원래 하는 일이에요. 적당히 듣기 좋은 말만 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까요.”
‘말은 하는 것이 아니라 해지는 것’이라고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언급한 바 있다. 음식의 영양이나 맛에 대한 지식도 대부분은 정처 없이 말해지는 것들이다. 어떤 것은 믿을 만하겠지만, 어떤 것은 무시해도 된다.
과거 서양의 화가들은 체질에 대한 개념적인 그림을 종종 남겼다. 개인의 기질은 세상을 이루는 기본 4원소인 공기, 흙, 불, 물의 네 가지 특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공기는 따스하고 흙은 차며 불은 건조하고 물은 축축하다. 따라서 따스함, 냉함, 건조함, 축축함의 기질은 공기, 흙, 불, 물의 환경적 본성이기도 하다.
음식은 인간이 조화롭게 살도록 조절해주는 역할을 한다. 따스하고 젖은 식재료는 건조하고 차가운 식재료와 같이 제공되는 것이 건강식단의 기본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요리사들은 재료를 썰거나 다지는 일에 시간을 많이 들였다. 상극의 식재료들을 혼합하기 위해서다. 끓이기 방식으로는 젖고 따스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데, 여기에 굽기 방식의 다른 요리를 곁들이면 건조한 특성을 추가할 수 있다. 와인으로 음식의 균형을 맞추기도 한다. 가령 독일 화가 에른스트 하일만(Ernst Heilemann,
1870~1936)의 ‘석화’에 등장하는 건조하고 차가운 백포도주는 촉촉한 생선 요리나 굴 요리에 곁들이면 궁합이 잘 맞는다. 한편 달콤한 맛의 와인은 쓰거나 신맛의 음식을 먹을 때 미감을 부드럽게 하면서도 각각의 맛을 더욱 선명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가 그린 ‘가재가 있는 정물’은 찬찬히 뜯어보면 4원소와 관련되어 있다. 화면의 왼편에 사냥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방금 잡은 야생 토끼와 새들을 사냥터 흙바닥에 그냥 던져놓은 것 같은 분위기인데, 이상하게도 거기에 가재가 끼어있다. 설마 가재를 총으로 잡은 건 아닐 테고. 껍데기가 빨간 것으로 봐서, 이 가재는 이미 삶거나 찐 상태이다.
우연히 놓인 듯 배치된 이 동물들은 서식 습성에 따라 새는 공기를, 토끼는 흙을, 삶은 가재는 물을 뜻한다. 화면의 아래쪽에 지나가는 도마뱀은 불에서도 타지 않는다는 전설상의 샐러맨더(salamander)인 듯하다. 샐러맨더는 불을 상징하는데, 불꽃을 일으킨다기보다는 불이 쉽게 활활 타오르지 않도록 불의 광기를 다스리는 신비로운 역할을 한다.
들라크루아의 정물들은 테이블 위가 아닌 광활한 벌판 위에 세팅되어 있다. 정물화이면서 풍경화도 되는 셈이다. 화면의 뒤쪽을 보면 맨 위에 하늘(공기)이 있고, 그 바로 아래 푸르스름하게 바다(물)가 보인다. 그리고 너르게 펼쳐진 땅(흙) 위에서는 귀족들이 말을 타고 사냥을 즐기고 있다. 4원소 중에서 불은 사냥총의 발사(fire)와 관련지어볼 수도 있겠다. 이 그림은 1차적으로는 정물의 균형 상태를, 2차적으로는 풍경의 조화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좀 더 나아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 정물화를 읽으면, 3차 해석까지 가능하다. 들라크루아가 이 그림을 그린 1827년 무렵의 프랑스는 자유와 평등을 찾으려는 시민들의 궐기들로 인해 여전히 사회가 불안정하던 시기였다. 전조처럼 일어나던 크고 작던 소요들은 결국 몇 년 후 1830년에 커다란 혁명으로 결집된다. 그림에서 불안정한 상황을 암시하는 것은 가재이다. 가재는 외부에 뼈대가 있어서 해마다 자신의 껍데기를 늘려 입어야 한다. 이는 가재가 고정된 틀 속에 안주하지 못하는 듯 여겨지고, 결국 가재에게는 불안정하다는 편견이 따라붙고 만다.
이미지가 지니는 상징의 유래를 보면 지식이란 것도 참 별거 아니구나 싶다. 대상을 관찰하며 말해지던 것들이 그대로 상징체계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갑각류가 상징하는 다른 하나는 ‘일관성 없는 행동’이다. 게걸음처럼 옆으로 이리저리 일정한 방향도 없이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려 보면, 금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피터르 클래즈(Pieter Claesz, 1597~1660)의 ‘게와 가재가 있는 정물’에서도 가재와 게가 출현한다. 여기에 있는 값진 금속 그릇들과 가재 요리는 부유함과 권위를 대표한다. 나이프가 칼집에서 나와 있는 것은, 이 나이프의 주인공이 여기 있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 시절에는 나이프와 포크가 테이블에 세팅되지 않는 게 관례여서 귀족들은 각자의 식사 도구를 휴대하고 다녔다. 레몬 껍데기는 벗겨져 있고 빵도 잘라져 있어서 자연스러운 흐트러짐을 연출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도 치밀한 계획 하에 배치된 흐트러짐이다. 왼편의 와인 디캔터를 한 변으로 하는 완벽한 직삼각형의 구도에서부터, 레몬 껍데기의 나선형과 금속 주전자의 구부러진 손잡이 형태가 의도적으로 반복된 것을 눈여겨 보라.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 중에는 집에 걸어놓고 물질적 부를 과시하고 싶은 용도로 그려진 작품이 많았다. 그런 정물화의 궁극적인 주제는 바니타스(vanitas: 덧없음)이다. 먹는 것과 관련된 그림이지만 여기서도 바니타스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우선 왼편 아래쪽에 시계가 보이는데, 이는 유한함을 뜻한다. 아무리 풍요를 누린다 해도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고, 그러니 허무할 뿐이다. 가재의 외피는 장군의 갑옷을 떠오르게 하고, 금속 주전자의 둥근 뚜껑은 언뜻 투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권위 있는 옷을 입고 높은 자리에 있다 한들 무엇 하랴. 이 또한 덧없기는 마찬가지다. 권력이란, 가재와 게가 상징하듯, 늘 불안정한 것이고 일관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상징체계는 세상에 관한 정보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축적된 것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상징은 대상에 대한 인간의 편견들이 굳혀진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하얀 속살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지닌 가재가 자신이 고작 불안정하며 일관성 없는 놈으로 읽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억울하겠는가.
- 이주은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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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평론가와 다툼이 있던 날, 셰프는 고용주에게 해고되고, 차라리 이 악재를 기회로 그는 자유롭게 꿈을 펼치기로 마음먹는다. 푸드 트럭을 타고 이 도시 저 도시로 옮겨 다니게 된 그는 그 지역의 시장에서 장을 보고, 그날그날마다 조금씩 다른 재료를 입수해서 환상적인 쿠바 샌드위치를 탄생시킨다.
내용보다는 요리 장면이 주가 되는 영화이지만, 마음에 남는 대사도 있다. 셰프가 푸드 트럭에서 처음으로 샌드위치를 만들던 날이었다. 일을 도와주던 아들이 샌드위치 빵을 조금 태웠는데, 이 정도면 대충 사람들에게 줘도 괜찮지 않겠냐고 묻자, 셰프가 정색하며 답한다. “내가 뭐든지 잘하는 건 아냐. 완벽하지 않아. 최고의 남편도 아니고. 하지만 이건 유일하게 잘 하는 거야. 나는 음식으로 사람들의 삶을 어루만질 수 있고, 그러면서 나도 힘을 얻어. 이래도 저 탄 샌드위치 손님 줘야 할까?”
셰프의 정열을 실은 푸드 트럭은 입소문을 탔고, 손님들이 그 앞에서 줄을 서기 시작했다. 맛있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들. 그중엔 예전에 악평을 했던 그 음식평론가도 끼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변명한다. “신랄하게 말하는 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원래 하는 일이에요. 적당히 듣기 좋은 말만 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까요.”
‘말은 하는 것이 아니라 해지는 것’이라고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언급한 바 있다. 음식의 영양이나 맛에 대한 지식도 대부분은 정처 없이 말해지는 것들이다. 어떤 것은 믿을 만하겠지만, 어떤 것은 무시해도 된다.
과거 서양의 화가들은 체질에 대한 개념적인 그림을 종종 남겼다. 개인의 기질은 세상을 이루는 기본 4원소인 공기, 흙, 불, 물의 네 가지 특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공기는 따스하고 흙은 차며 불은 건조하고 물은 축축하다. 따라서 따스함, 냉함, 건조함, 축축함의 기질은 공기, 흙, 불, 물의 환경적 본성이기도 하다.
음식은 인간이 조화롭게 살도록 조절해주는 역할을 한다. 따스하고 젖은 식재료는 건조하고 차가운 식재료와 같이 제공되는 것이 건강식단의 기본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요리사들은 재료를 썰거나 다지는 일에 시간을 많이 들였다. 상극의 식재료들을 혼합하기 위해서다. 끓이기 방식으로는 젖고 따스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데, 여기에 굽기 방식의 다른 요리를 곁들이면 건조한 특성을 추가할 수 있다.
가재는 불안정한 상황을 암시
1870~1936)의 ‘석화’에 등장하는 건조하고 차가운 백포도주는 촉촉한 생선 요리나 굴 요리에 곁들이면 궁합이 잘 맞는다. 한편 달콤한 맛의 와인은 쓰거나 신맛의 음식을 먹을 때 미감을 부드럽게 하면서도 각각의 맛을 더욱 선명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가 그린 ‘가재가 있는 정물’은 찬찬히 뜯어보면 4원소와 관련되어 있다. 화면의 왼편에 사냥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방금 잡은 야생 토끼와 새들을 사냥터 흙바닥에 그냥 던져놓은 것 같은 분위기인데, 이상하게도 거기에 가재가 끼어있다. 설마 가재를 총으로 잡은 건 아닐 테고. 껍데기가 빨간 것으로 봐서, 이 가재는 이미 삶거나 찐 상태이다.
우연히 놓인 듯 배치된 이 동물들은 서식 습성에 따라 새는 공기를, 토끼는 흙을, 삶은 가재는 물을 뜻한다. 화면의 아래쪽에 지나가는 도마뱀은 불에서도 타지 않는다는 전설상의 샐러맨더(salamander)인 듯하다. 샐러맨더는 불을 상징하는데, 불꽃을 일으킨다기보다는 불이 쉽게 활활 타오르지 않도록 불의 광기를 다스리는 신비로운 역할을 한다.
들라크루아의 정물들은 테이블 위가 아닌 광활한 벌판 위에 세팅되어 있다. 정물화이면서 풍경화도 되는 셈이다. 화면의 뒤쪽을 보면 맨 위에 하늘(공기)이 있고, 그 바로 아래 푸르스름하게 바다(물)가 보인다. 그리고 너르게 펼쳐진 땅(흙) 위에서는 귀족들이 말을 타고 사냥을 즐기고 있다. 4원소 중에서 불은 사냥총의 발사(fire)와 관련지어볼 수도 있겠다. 이 그림은 1차적으로는 정물의 균형 상태를, 2차적으로는 풍경의 조화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좀 더 나아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 정물화를 읽으면, 3차 해석까지 가능하다. 들라크루아가 이 그림을 그린 1827년 무렵의 프랑스는 자유와 평등을 찾으려는 시민들의 궐기들로 인해 여전히 사회가 불안정하던 시기였다. 전조처럼 일어나던 크고 작던 소요들은 결국 몇 년 후 1830년에 커다란 혁명으로 결집된다. 그림에서 불안정한 상황을 암시하는 것은 가재이다. 가재는 외부에 뼈대가 있어서 해마다 자신의 껍데기를 늘려 입어야 한다. 이는 가재가 고정된 틀 속에 안주하지 못하는 듯 여겨지고, 결국 가재에게는 불안정하다는 편견이 따라붙고 만다.
이미지가 지니는 상징의 유래를 보면 지식이란 것도 참 별거 아니구나 싶다. 대상을 관찰하며 말해지던 것들이 그대로 상징체계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갑각류가 상징하는 다른 하나는 ‘일관성 없는 행동’이다. 게걸음처럼 옆으로 이리저리 일정한 방향도 없이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려 보면, 금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피터르 클래즈(Pieter Claesz, 1597~1660)의 ‘게와 가재가 있는 정물’에서도 가재와 게가 출현한다. 여기에 있는 값진 금속 그릇들과 가재 요리는 부유함과 권위를 대표한다. 나이프가 칼집에서 나와 있는 것은, 이 나이프의 주인공이 여기 있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 시절에는 나이프와 포크가 테이블에 세팅되지 않는 게 관례여서 귀족들은 각자의 식사 도구를 휴대하고 다녔다. 레몬 껍데기는 벗겨져 있고 빵도 잘라져 있어서 자연스러운 흐트러짐을 연출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도 치밀한 계획 하에 배치된 흐트러짐이다. 왼편의 와인 디캔터를 한 변으로 하는 완벽한 직삼각형의 구도에서부터, 레몬 껍데기의 나선형과 금속 주전자의 구부러진 손잡이 형태가 의도적으로 반복된 것을 눈여겨 보라.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 중에는 집에 걸어놓고 물질적 부를 과시하고 싶은 용도로 그려진 작품이 많았다. 그런 정물화의 궁극적인 주제는 바니타스(vanitas: 덧없음)이다. 먹는 것과 관련된 그림이지만 여기서도 바니타스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우선 왼편 아래쪽에 시계가 보이는데, 이는 유한함을 뜻한다. 아무리 풍요를 누린다 해도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고, 그러니 허무할 뿐이다. 가재의 외피는 장군의 갑옷을 떠오르게 하고, 금속 주전자의 둥근 뚜껑은 언뜻 투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권위 있는 옷을 입고 높은 자리에 있다 한들 무엇 하랴. 이 또한 덧없기는 마찬가지다. 권력이란, 가재와 게가 상징하듯, 늘 불안정한 것이고 일관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상징체계는 세상에 관한 정보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축적된 것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상징은 대상에 대한 인간의 편견들이 굳혀진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하얀 속살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지닌 가재가 자신이 고작 불안정하며 일관성 없는 놈으로 읽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억울하겠는가.
- 이주은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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