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법정 공방 끝에 되찾은 가보
8년 법정 공방 끝에 되찾은 가보
많은 사람이 가족의 역사를 기념할 만한 뭔가를 갖고 있다. 혈통에 관해 말해주는 사진이나 그림 등이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국 배우 헬렌 미렌은 부모로부터 오래된 편지 뭉치를 물려받았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러시아에서 살던 시절 그 여자 형제들로부터 받은 편지였다. 영화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에서 미렌이 연기한 마리아 알트만은 가족 대다수를 홀로코스트로 잃었다.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 대의 가족은 역사에 희생되지 않았다”고 미렌은 말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았다. 기적이었다. 스탈린 시절에 살아남은 건 더더욱 큰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조국과 역사를 송두리째 빼앗겼다.”
미렌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뒤 “가느다란 필체의 러시아어로 쓰인” 그 편지들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프라임 서스펙트’(영국 TV 드라마 시리즈)에 출연할 때 촬영장에서 러시아어에 능통한 한 영국인 스태프가 번역해줄 때까지 거기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마치 오랫동안 내려져 있던 무대의 막이 오르는 것 같았다. 고모할머니들의 이름과 그들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증조모가 어디 묻혔는지도 알게 됐다…” 소련이 붕괴한 뒤 미렌은 언니와 함께 러시아로 가서 할아버지가 여자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찾아내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척들을 만났다.
“처음엔 친척들이 우리를 수상하게 여기는 듯했다”고 뉴욕에서 미렌이 말했다(그녀는 현재 브로드웨이 연극 ‘오디언스’에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역으로 출연 중이다). “‘영국에서 온 이 이상한 사람들의 정체가 뭘까? 그들의 말대로 우리 친척이 맞을까?’”
알트만의 경우는 문제가 좀 더 복잡했다. 그녀 집안의 가보인 회화 작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은 나치가 오스트리아에서 약탈해간 미술품 중 하나였다. 1907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알트만의 숙모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를 모델로 그린 작품이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1925년 뇌막염으로 사망하기 전 이 작품을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에 기증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소유하게 된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림을 유족에게 돌려줄 의사가 없었다(하지만 결국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가 사망한 후 그림의 소유권은 작품 제작을 의뢰한 그녀의 남편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유언은 효력이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 정부에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었다”고 미렌은 말했다. “그것은 비엔나에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중요한 수단이 됐다. 사람들은 비엔나에 가면 비엔나 커피를 마시고, 오페라를 구경하고, 클림트가 그린 이 그림을 보러 갔다.” 영화에서 한 변호사는 “냉장고 자석으로 만들어질 만큼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림을 오스트리아 정부가 내놓을 것 같으냐?”고 말했다.
1990년대 말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알트만은 변호사 랜디 쇤베르크(‘그린 랜턴’의 라이언 레이놀즈)를 고용해 그림을 되찾기 위한 법정 소송을 시작했다. 쇤베르크는 알트만과 가장 친한 친구의 아들로 그 집안 역시 비엔나와 연관이 있었다. 작곡가였던 그의 할아버지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나치가 그의 음악을 ‘퇴폐(degenerate)’ 음악으로 규정한 뒤 미국으로 도망쳤다. 랜디는 어린 시절 비엔나에 갔을 때 그 그림[나치는 작품의 출처를 숨기려고 제목을 그냥 ‘금빛 옷을 입은 여인(Woman in Gold)’으로 불렀다]을 봤지만 거기에 얽힌 역사는 전혀 몰랐다.
쇤베르크는 이 소송(오스트리아 대 알트만)을 계기로 미술품 반환 소송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소송이 진행된 8년 동안 알트만과 절친한 사이가 됐다. “그 8년 동안 내게 큰 변화가 있었다”고 쇤베르크는 말했다. “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우리 가족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영화에서 이런 자각은 그가 한 홀로코스트 추모비 제막식에 참석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희생된 증조부의 이름을 발견하고 흐느끼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한 비평가는 라이언 레이놀즈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언급하면서 ‘웨인스타인식(Weinsteined)’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쇤베르크는 말했다. ‘우먼 인 골드’를 제작한 웨인스타인 컴퍼니를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장면은 내가 시나리오 작가 알렉스 카예 캠벨에게 이야기한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난 그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을 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 뒤편에 서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우먼 인 골드’는 영화의 바탕이 된 실제 이야기와 구세계(알트만은 결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쇤베르크와 함께 다시 그곳을 방문해야 했다), 그리고 알트만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영위한 현대적 삶(그녀는 2011년 9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절제된(때로는 약간 경직된) 분위기로 묘사됐다.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고 사이먼 커티스 감독(‘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이 말했다. “알트만과 이 그림 모두 비엔나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였을 때,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고의 중심지였을 때 그곳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커티스 감독은 빌리 와일더 감독이 젊은 시절 비엔나에서 기자로 일하던 때 극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같은 날 오전 중에 인터뷰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 일은 당시 비엔나가 얼마나 특별한 곳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술과 지적 창조성의 중심이라는 명성이 무색해진 비엔나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이 영화의 백미다. 나이 든 알트만이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아가는데 지금은 상점으로 변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결혼식 날 밤 가족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심지어 젊은 시절 자신(‘오펀 블랙’의 타티아나 마슬라니)과 손님들 옆에서 춤까지 춘다. “유대인이 지은 그 집들은 아주 우아했다”고 미렌은 말했다. “유대인은 비엔나 문화의 일부였다. 그들은 집을 짓고 산업을 일으키고 그림을 주문하고 은 제품을 만들었다. 알트만의 집안은 기막힌 도자기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유대인은 비엔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쫓겨 칫솔로 바닥을 닦는 신세가 됐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알트만이 죽기를 기다리며 법정 공방을 8년이나 질질 끌었다. 하지만 알트만은 미국 연방 제9순회항소법원에서 결국 승소했다. 쇤베르크의 대법원 변론은 이 사건의 클라이맥스였다. 실제 변론 장면이 영화 속 재현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고등법원 법정에 서는 것은 모든 미국 변호사들의 원대한 꿈(또는 악몽)이다. “대법관 9명 중 1명이라도 우리 편을 들어줘서 9 대 0으로 지지 않기만을 바랐다”고 쇤베르크는 회상했다. 그는 대법원에서 변론을 시작할 때 데이비드 사우터 대법관의 질문을 받고 몹시 당황했다.
“사우터는 아주 명석한 사람인데 뉴잉글랜드 사투리를 썼다”고 쇤베르크는 말했다. “그가 아주 긴 질문(oyez.org에서 들을 수 있다)을 시작했는데 내게는 그저 ‘다-다-다-다’ 하는 소리로만 들렸다. 그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존경하는 대법관님, 죄송하지만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방청석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머지 대법관들은 모두 미소를 지었다. 마치 ‘우리도 이해하지 못했다네. 자네가 물어봐 줘서 다행이야! 저 사람은 늘 저렇다니까!’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일은 그 중요한 순간에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주는 효과를 냈다. 사우터 대법관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질문을 다시 해줬고 나머지 변론은 꿈처럼 잘 풀렸다.” [재판 결과는 인터넷에서 볼 수 있으며 이 그림(2006년 경매에서 1억3500만 달러에 팔렸다)은 뉴욕 노이에 갤러리에 가면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 진정한 긴장감을 더해주는 대목은 알트만의 애매한 반응이다. 그녀는 작품에 대해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냥 있던 대로 내버려두고 싶어 했다. “그녀는 긴 소송 기간 중에 ‘난 너무 늙어서 이 일을 계속할 수가 없다.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미렌이 말했다. “알트만과 쇤베르크는 번갈아 가며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워준 듯하다. 한쪽이 용기를 잃으면 다른 한쪽이 ‘힘내, 우린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미렌은 자기 집안의 유산에 대해 “과거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영국에 온 뒤로 러시아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칠 생각이 없었고 우리가 러시아에 조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원치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지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라’고 가르쳤다. 매우 현명하고 꼭 필요한 가르침이었다. 솔직히 그런 가르침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사람은 과거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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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러시아 혁명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았다. 기적이었다. 스탈린 시절에 살아남은 건 더더욱 큰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조국과 역사를 송두리째 빼앗겼다.”
미렌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뒤 “가느다란 필체의 러시아어로 쓰인” 그 편지들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프라임 서스펙트’(영국 TV 드라마 시리즈)에 출연할 때 촬영장에서 러시아어에 능통한 한 영국인 스태프가 번역해줄 때까지 거기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마치 오랫동안 내려져 있던 무대의 막이 오르는 것 같았다. 고모할머니들의 이름과 그들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증조모가 어디 묻혔는지도 알게 됐다…” 소련이 붕괴한 뒤 미렌은 언니와 함께 러시아로 가서 할아버지가 여자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찾아내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척들을 만났다.
“처음엔 친척들이 우리를 수상하게 여기는 듯했다”고 뉴욕에서 미렌이 말했다(그녀는 현재 브로드웨이 연극 ‘오디언스’에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역으로 출연 중이다). “‘영국에서 온 이 이상한 사람들의 정체가 뭘까? 그들의 말대로 우리 친척이 맞을까?’”
알트만의 경우는 문제가 좀 더 복잡했다. 그녀 집안의 가보인 회화 작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은 나치가 오스트리아에서 약탈해간 미술품 중 하나였다. 1907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알트만의 숙모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를 모델로 그린 작품이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1925년 뇌막염으로 사망하기 전 이 작품을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에 기증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소유하게 된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림을 유족에게 돌려줄 의사가 없었다(하지만 결국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가 사망한 후 그림의 소유권은 작품 제작을 의뢰한 그녀의 남편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유언은 효력이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 정부에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었다”고 미렌은 말했다. “그것은 비엔나에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중요한 수단이 됐다. 사람들은 비엔나에 가면 비엔나 커피를 마시고, 오페라를 구경하고, 클림트가 그린 이 그림을 보러 갔다.” 영화에서 한 변호사는 “냉장고 자석으로 만들어질 만큼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림을 오스트리아 정부가 내놓을 것 같으냐?”고 말했다.
1990년대 말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알트만은 변호사 랜디 쇤베르크(‘그린 랜턴’의 라이언 레이놀즈)를 고용해 그림을 되찾기 위한 법정 소송을 시작했다. 쇤베르크는 알트만과 가장 친한 친구의 아들로 그 집안 역시 비엔나와 연관이 있었다. 작곡가였던 그의 할아버지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나치가 그의 음악을 ‘퇴폐(degenerate)’ 음악으로 규정한 뒤 미국으로 도망쳤다. 랜디는 어린 시절 비엔나에 갔을 때 그 그림[나치는 작품의 출처를 숨기려고 제목을 그냥 ‘금빛 옷을 입은 여인(Woman in Gold)’으로 불렀다]을 봤지만 거기에 얽힌 역사는 전혀 몰랐다.
쇤베르크는 이 소송(오스트리아 대 알트만)을 계기로 미술품 반환 소송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소송이 진행된 8년 동안 알트만과 절친한 사이가 됐다. “그 8년 동안 내게 큰 변화가 있었다”고 쇤베르크는 말했다. “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우리 가족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영화에서 이런 자각은 그가 한 홀로코스트 추모비 제막식에 참석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희생된 증조부의 이름을 발견하고 흐느끼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한 비평가는 라이언 레이놀즈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언급하면서 ‘웨인스타인식(Weinsteined)’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쇤베르크는 말했다. ‘우먼 인 골드’를 제작한 웨인스타인 컴퍼니를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장면은 내가 시나리오 작가 알렉스 카예 캠벨에게 이야기한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난 그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을 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 뒤편에 서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우먼 인 골드’는 영화의 바탕이 된 실제 이야기와 구세계(알트만은 결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쇤베르크와 함께 다시 그곳을 방문해야 했다), 그리고 알트만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영위한 현대적 삶(그녀는 2011년 9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절제된(때로는 약간 경직된) 분위기로 묘사됐다.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고 사이먼 커티스 감독(‘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이 말했다. “알트만과 이 그림 모두 비엔나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였을 때,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고의 중심지였을 때 그곳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커티스 감독은 빌리 와일더 감독이 젊은 시절 비엔나에서 기자로 일하던 때 극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같은 날 오전 중에 인터뷰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 일은 당시 비엔나가 얼마나 특별한 곳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술과 지적 창조성의 중심이라는 명성이 무색해진 비엔나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이 영화의 백미다. 나이 든 알트만이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아가는데 지금은 상점으로 변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결혼식 날 밤 가족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심지어 젊은 시절 자신(‘오펀 블랙’의 타티아나 마슬라니)과 손님들 옆에서 춤까지 춘다. “유대인이 지은 그 집들은 아주 우아했다”고 미렌은 말했다. “유대인은 비엔나 문화의 일부였다. 그들은 집을 짓고 산업을 일으키고 그림을 주문하고 은 제품을 만들었다. 알트만의 집안은 기막힌 도자기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유대인은 비엔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쫓겨 칫솔로 바닥을 닦는 신세가 됐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알트만이 죽기를 기다리며 법정 공방을 8년이나 질질 끌었다. 하지만 알트만은 미국 연방 제9순회항소법원에서 결국 승소했다. 쇤베르크의 대법원 변론은 이 사건의 클라이맥스였다. 실제 변론 장면이 영화 속 재현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고등법원 법정에 서는 것은 모든 미국 변호사들의 원대한 꿈(또는 악몽)이다. “대법관 9명 중 1명이라도 우리 편을 들어줘서 9 대 0으로 지지 않기만을 바랐다”고 쇤베르크는 회상했다. 그는 대법원에서 변론을 시작할 때 데이비드 사우터 대법관의 질문을 받고 몹시 당황했다.
“사우터는 아주 명석한 사람인데 뉴잉글랜드 사투리를 썼다”고 쇤베르크는 말했다. “그가 아주 긴 질문(oyez.org에서 들을 수 있다)을 시작했는데 내게는 그저 ‘다-다-다-다’ 하는 소리로만 들렸다. 그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존경하는 대법관님, 죄송하지만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방청석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머지 대법관들은 모두 미소를 지었다. 마치 ‘우리도 이해하지 못했다네. 자네가 물어봐 줘서 다행이야! 저 사람은 늘 저렇다니까!’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일은 그 중요한 순간에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주는 효과를 냈다. 사우터 대법관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질문을 다시 해줬고 나머지 변론은 꿈처럼 잘 풀렸다.” [재판 결과는 인터넷에서 볼 수 있으며 이 그림(2006년 경매에서 1억3500만 달러에 팔렸다)은 뉴욕 노이에 갤러리에 가면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 진정한 긴장감을 더해주는 대목은 알트만의 애매한 반응이다. 그녀는 작품에 대해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냥 있던 대로 내버려두고 싶어 했다. “그녀는 긴 소송 기간 중에 ‘난 너무 늙어서 이 일을 계속할 수가 없다.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미렌이 말했다. “알트만과 쇤베르크는 번갈아 가며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워준 듯하다. 한쪽이 용기를 잃으면 다른 한쪽이 ‘힘내, 우린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미렌은 자기 집안의 유산에 대해 “과거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영국에 온 뒤로 러시아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칠 생각이 없었고 우리가 러시아에 조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원치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지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라’고 가르쳤다. 매우 현명하고 꼭 필요한 가르침이었다. 솔직히 그런 가르침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사람은 과거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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