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자폭탄을 꼭 투하해야 했을까

오늘날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악명 높은 역사의 묘비다. 70년 전인 1945년 8월, 미국은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하나씩 투하하면서 25만 명에 육박하는 인명을 앗아갔다. 사망자 중엔 군인도 많았지만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첫 폭발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폭발에서 살아남은 사람 상당수는 방사선에 노출돼 사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문명의 시작과 함께 이어진 급속한 과학 발전과 끝없는 자원·힘·지배욕이 다다른 종착역이었다. 어쩌면 그 진짜 끝은 핵 전쟁으로 인한 인류 멸망일지도 모른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리틀보이’가, 뒤이어 9일 나가사키에 보다 강력한 ‘팻맨’이 투하된 이래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70년 동안 수정주의자들은 기존 합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미국이 민간인 다수가 포함된 25만 명을 희생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전쟁 종식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 수행된 대량 학살은 아닐까?
아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얽힌 기존 합의를 가장 잘 요약한 사람은 군사역사가 맥스 헤이스팅스일 것이다. 그는 원자폭탄 투하 60주년에 가디언에 이렇게 썼다. “오늘날 히로시마 폭격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가끔 보면 지도자들의 약점을 인정할 줄 아는 겸허함을 잃은 듯하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우리 세대가 겪을 일이 없었던 고도의 딜레마와 씨름했다.”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원자폭탄이 사용된 해의 70주년을 맞이해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를 비판하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검토해봤다.
일본은 원자폭탄 투하 전에 이미 항복할 태세였다

수년의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 경제·자원·군사력은 거의 전부 소모됐다. 일본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맹렬한 폭격을 당했다. 게다가 소련은 일본과의 상호불가침 조약이 효력을 다했다고 몇 달 전부터 밝혔다. 수정주의자들은 일본 정부가 체제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항복 제의를 받았다면 수락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 정보부가 입수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일본 고위급 인사들은 끝까지 싸울 의지로 충만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미국의 선택은 차악이었다. 만약 연합군이 일본 본토를 공격했더라면 전투 중에 일본인·미국인·중국인·러시아인·영국인 등 수백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미국은 핵무기의 막강한 파괴력을 선보임으로써 일본 정부에 싸워봤자 절대 이기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이후에도 일본 정부에서 항복은커녕 아무런 반응도 나오지 않자 미국은 3일 뒤 팻맨을 나가사키에 떨어뜨렸다.
“태평양 전쟁을 끝낼 열쇠는 미국이 아닌 일본이 쥐고있었다”고 전쟁역사가 리처드 B 프랭크는 1999년 저서 ‘몰락: 대일본제국의 종말(The End Of The Imperial Japanese Empire)’에 썼다. “원자폭탄이 아니더라도 일본이 항복했으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일본의 운명을 좌우하던 군사참의관회의 의원 6명·옥새상서·일왕과 관련된 아무런 증거도 내놓지 못했다.
또 프랭크는 “그와 관련된 전시 문서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전쟁범죄 재판에서 사형의 위협을 받은 일본 지도자들 중 누구도 항복하려 했다는 주장을 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히로히토 일왕의 일기 역시 연합군이 다른 방법으로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으리라는 단서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일본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소련 때문에 항복했다

1941년 일본과 소련은 1939년 나치 독일과 소련이 맺었던 것과 유사한 상호불가침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 덕분에 일본은 소련과 마주한 동부전선을 걱정하지 않고 온전히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5년 2월 영국·미국·소련이 마주한 얄타회담에서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 대통령은 독일 패배 후 3개월 내로 일본과의 상호불가침 조약을 폐기하고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도록 이오시프 스탈린을 설득했다.
그해 4월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 폐기를 선언했다. 소련 외교부 장관은 소련이 일본의 우방인 독일과 전쟁 중이므로 그 조약이 “의미를 잃었으며 지속이 불가능해졌다”는 성명을 일본 대사에게 전했다.
7월 베를린이 함락되고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권고했다. 새로 선출된 해리 S 트루먼 미 대통령은 “우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시엔 그동안 지구상에서 볼 수 없었던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태평양 전쟁은 계속됐다. 8월 6일 리틀보이가 히로시마에 투하됐다.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그 다음날 나가사키에 팻맨이 떨어졌다.
하세가와 쓰요시 캘리포니아대학 사학자는 기존 합의와 수정주의의 중간 입장을 옹호한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가 일본 지도층을 긴장시켰지만 결정타는 소련의 선전포고였다는 입장이다. 일본은 오랜 전쟁에 힘이 부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과 전쟁을 계속하려면 소련과의 평화가 필요했다. 두 전선에서 전쟁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원자폭탄 투하는 이미 전쟁에서 일상적이던 폭격을 새로운 방식으로 실시한 것뿐이었다. 일본은 이미 연합군의 폭격으로 온통 불바다였다. 그런 상황에서 원자폭탄이 일본 지도층의 생각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이유가 있었을까? 일본은 무조건 항복 대신 소련을 통해 협상조건을 제시했다. 전쟁을 끝내는 대신 전쟁범죄 재판을 피하고 권력을 유지한다는 조건이었다. 하세가와는 소련이 이 전략을 무너뜨린 것이 원자폭탄보다 전쟁 종식에 더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로시마 역사: 수정주의의 신화(Hiroshima in History: The Myths of Revisionism)’를 편집한 역사가 로버트 매덕스는 일소 상호불가침 조약 파기가 중요하긴 했지만 “원자폭탄처럼 큰 충격으로 다가오진 않았다”고 히스토리뉴스네트워크에 말했다. “일본은 소련이 극동지역에서 병력을 증강하는 모습을 몇 달 전부터 눈여겨 보고 있었다.”
인구가 없는 지역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수도 있었다

오늘날의 기준과 맥락을 과거에 적용하는 것은 항상 위험을 동반한다. 1945년엔 민간인 희생자는 파시즘 위협을 격퇴하는 데 필수적인 대가라고 여겨졌다. 미국인을 제외한 모든 참전국 민간인이 공격당했다. 원자폭탄은 인명을 살상하고 기간시설을 파괴하는 일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이었다. 끔찍하지만, 그게 바로 전쟁이다. 규모는 달랐지만 원칙은 같았다. 원자폭탄 하나를 투하하는 것과 항공 편대를 보내 도시에 폭탄을 퍼붓는 것 사이에 도덕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
트루먼은 스탈린을 위협하고 싶었을 뿐이다
소련이 원자폭탄의 파괴력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목적에 불과하다. 궁극적인 목적은 일본의 항복이었다. 앞서 밝혔듯이 일본의 항복이야말로 미국의 최우선 사항이었음은 명백하다. 안 그랬다면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데 훨씬 많은 생명이 희생됐을 테니 말이다.
-SHANE CROUCHER IBTIMES 기자 / 번역 이기준
[박스기사] 사상 최악의 ‘불행 중 다행’

야마구치 쓰토무는 두 번의 원자폭탄 공격을 모두 겪고도 93세까지 생존했다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사상 최초로 투하한 두 원자폭탄으로 약 25만 명이 사망했다. 두 폭탄의 화력은 TNT 3만6000t에 해당한다.
70년 전 한 남자가 그 두 폭탄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게다가 93세까지 살았다. 그 주인공 야마구치 쓰토무는 아마 역사상 가장 행운아이자 불운아일 듯하다.
1945년 8월 6일 엔지니어로 일하던 야마구치는 히로시마에 출장 중이었다. 그날 아침 그는 세 달만의 귀가를 앞두고 미츠비시중공업의 동료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그 도시의 조선소로 향했다. “아주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특별할 것은 전혀 없었다.” 2005년 야마구치가 돌이킨 내용이다. “당시 나는 혈기왕성했다. 걸어가는 데 비행기 한 대가 날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하늘을 보니 폭격기 B-29가 있었다. 거기서 낙하산 두 개가 떨어졌다.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그네슘이 산화하는 듯한 섬광이 번쩍였다. 하늘이 섬광으로 가득찼고 나는 뒤로 날아갔다.”
미 공군 조종사 이놀라 게이가 막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떨어뜨린 순간이었다. 야마구치는 오스트레일리아 ABC뉴스에 “해가 땅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폭발 중심에서 고작 3㎞ 떨어진 위치였다. 야마구치는 크게 화상을 입었다. 머리카락은 모두 타버렸고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다친 몸으로 하룻밤을 방공호에서 보냈다. 다음날 그는 나가사키에 있는 집으로 떠났다.
2010년 이코노미스트지에 실린 야마구치의 프로필에 따르면 당시 “강을 잇는 다리가 무너져 있었다”고 한다. “검게 탄 남자·여자·어린이들의 벌거벗은 시체가 마치 나무토막들처럼 강 아래에 얼굴을 파묻은 채 떠다녔다. 야마구치는 이 시체들을 밟고서 강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흡사 인간 뗏목이었다.”
붕대를 감은 상처와 방사선 피폭으로 고통스러웠음에도 야마구치는 8월 9일 출근했다. 의심에 가득찬 직장 상사에게 히로시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해야 했다. 도시 하나가 폭탄 단 한 개로 인해 완전히 초토화됐다고 말이다.
야마구치의 설명을 들은 상사는 그가 “미쳤다”고 했다. 그때 밝은 빛이 유리창 너머로 들어와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B-29가 팻맨을 나가사키에 투하한 순간이었다. 야마구치는 또 한 번 폭발에 휘말렸다. “버섯구름이 히로시마에서 나를 따라왔다는 생각을 했다”고 야마구치는 2009년 나가사키의 자택에서 인디펜던트지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그는 집을 전후에 다시 지었다.
이번에도 야마구치는 폭발 중심에서 3㎞ 반경 안에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다치지 않았다. 우연히도 강철제 계단 위에 서 있었던 덕분이다. 집은 파괴됐지만 아내와 아들 역시 살아남았다. 야마구치의 가족은 방공호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야마구치가 두 번의 폭발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건 2005년이었다. 2009년 일본 정부는 그의 주장이 사실임을 공식 확인했다. 야마구치처럼 두 번의 폭발을 모두 겪은 생존자는 150명 이상이었다고 여겨진다.
“내가 두 번 피폭당했다는 사실은 공식적인 정부 기록”이라고 야마구치는 당시 기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죽더라도 내 경험담은 젊은 세대에게 그 끔찍한 역사를 전달할 것이다.”
야마구치와 그의 아내는 다른 생존자들처럼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질환으로 수년 간 고통을 겪었다. “나는 지옥 밑바닥을 기어다녔다. 진작에 죽었어야 할 몸이다. 내 운명이 나를 살려놓았다.” 야마구치는 죽기 얼마 전 ABC뉴스에 말했다.
야마구치와 그의 아내·아들은 모두 암으로 죽었다. 전후 1948년에 태어난 딸은 아직 살아 있다.
— SHANE CROU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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