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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땅’ 탈출한 잊혀진 난민들

‘금단의 땅’ 탈출한 잊혀진 난민들

인도의 티베트 난민 학생들은 달라이 라마를 정신적 지도자로 떠받든다.
인도 뉴델리의 마지누카틸라 티베트 난민촌은 9번 국립 고속도로와 야무나강 사이에 있다. 좁은 골목과 초라한 콘크리트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번잡한 동네다.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티베트 난민을 한데 모으기 위해 1960년대 만들어졌다. 티베트 식당, 여인숙, 포장마차, 공예점이 즐비하다. 거리엔 인력거, 거지, 유기견, 머리에 짐을 가득 인 아낙네로 붐빈다.

여느 인도 거리나 비슷하게 혼란스럽다. 그러나 다른 점이 곧바로 눈에 띈다. 이곳의 벽은 ‘티베트 해방’이라는 낙서와 달라이 라마의 포스터로 도배돼 있다. 동네 한가운데 있는 사찰 앞에 걸린 대형 포스터엔 티베트 독립운동가 3명의 단식투쟁 일수가 적혀 있다.

마지누카틸라에서 여인숙을 운영하는 로프상 셰라프(35)는 “이곳엔 인도에 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고 말했다. “티베트 상황이 얼마나 끔찍하면 그러겠나.” 그의 부모는 달라이 라마가 망명을 떠난 1959년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를 탈출했다. 셰라프는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인도 국적도 여권도 없다. ‘모국’ 티베트에 돌아갈 수도 없다. “중국은 인도에서 출생한 티베트인을 받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티베트가 독립한다면 당연히 돌아가겠다. 부모님도 같은 생각이다.”

오스트리아 등반가 하인리히 하러는 1957년 저서 ‘티베트에서의 7년(Seven Years in Tibet)’을 통해 그곳 체험을 이야기했다. 그는 티베트를 ‘금단의 땅’(Forbidden Land, 1950년 중국의 침공 전엔 외국인의 입국을 거의 완전히 금지했다는 의미다)으로 불렀다. “수도 라사에서 5년을 지내는 동안 만난 외국인은 7명에 불과했다.”

인도에 사는 티베트 난민은 언젠가 독립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다.
지금의 티베트는 외국인에게 개방돼 있다. 중국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해 약 1500만 명이 티베트 자치구를 방문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침공 후 65년이 지난 지금 티베트는 전제가 다를 뿐 여전히 금단의 땅이다. 티베트가 그곳에 사는 티베트인의 감옥이 됐다는 뜻이다.

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안보부 부장관 카르마 린첸은 “티베트의 티베트인은 자기 마을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수도 라사로 가려면 최소한 허가증 5개가 필요하다. 중국 정부가 티베트 내부에서 티베트인의 이동을 완전히 통제한다.”

티베트인은 이유도 없이 구금되고 고문당한다. 고유의 문화와 종교, 역사와 언어가 말살됐다. 달라이 라마는 그것을 중국 공산당의 ‘문화 학살’이라고 불렀다. 중국 내 티베트인의 분신 자살이 잇따르자 그는 2011년 11월 “문화 학살 같은 절박한 상황으로 인해 그런 슬픈 사건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티베트 망명정부에 따르면 2009년 이래 티베트인 141명이 분신 자살을 기도했고 그중 122명이 현장에서 또는 그 직후 사망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시위가 티베트 곳곳에서 벌여졌다. 중국 당국은 달라이 라마를 시위의 배후로 지목하고 티베트인의 자유를 더욱 탄압하며 감시를 강화했다. 티베트 난민에 따르면 수도 라사에선 중국 공안이 티베트인의 휴대전화를 임의로 압수해 달라이 라마나 티베트 국기의 사진이 들어 있으면 무조건 체포한다.

다람살라의 티베트 도서관 밖에서 네충 카페를 운영하는 소남 체링(30)은 “인도로 탈출한 티베트인 100명 중 99명은 티베트 문화와 언어를 배우려고 이곳에 온다”고 말했다. “티베트의 학교에선 중국어만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철학과 종교, 우리의 언어와 문화가 다 죽어간다.”

체링은 1994년 9세의 나이로 인도에서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가족을 두고 홀로 티베트를 탈출했다.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로 탈출하는데만 23일이 걸렸다. 그는 가족을 21년 동안 보지 못했다. “우린 언젠가 티베트가 해방된다는 희망을 늘 갖고 있다. 우리가 달라이 라마를 100% 믿고 따른다면 티베트를 되찾을 수 있다.”

티베트 난민이 모여 사는 인도의 상점에는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사진과 포스터가 곳곳에 걸려 있다.
인도 북부 라다크주의 주도 레에서 몇㎞ 떨어진 초그람사르에는 소남링 티베트 난민촌이 있다. 이곳에선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싼 황량한 흙색 히말라야 봉우리가 새파란 하늘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해발 3500m로 공기가 희박하고 싸늘하다. 하지만 햇볕을 걸러주는 대기가 부족해 태양은 뜨겁다. 그늘에선 떨다가 벗어나면 땀이 흐른다.

적갈색 승복을 입은 승려들이 먼지 날리는 거리를 배회하고 모터사이클과 소, 합승택시가 붐빈다. 식당에선 버터차와 참바(볶은 보릿가루)를 내놓는다. 행인들은 길가에 늘어선 전경기(기도할 때 돌리는 바퀴 모양의 경전)를 돌리며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한다.

소남링처럼 인도와 네팔 곳곳에 흩어져 있는 티베트 난민촌은 1950년 중국의 침공 전 티베트 문화의 타임캡슐이 됐다. 소남링에 사는 토프기알 체링(47)은 “1991년 티베트에 가서 두 달을 지냈다”고 말했다. “티베트가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졌고 전통문화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밭을 가는 야크도 없었다. 지금은 그곳 사람들이 전통복을 입지도 않는다. 일부에선 티베트어가 금지됐다.”

티베트 난민이 현지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불확실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전통문화를 보존해야 할 필요성과 언젠가 독립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 때문이다. 체링은 “인도 사회에 통합되면 고유문화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중국이 우리 문화를 말살하는 것이지만 젊은 티베트 난민의 서구화도 문제다. 그들은 뿌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공동체가 나서서 문화를 보존해야 한다.”

춘두에(25·티베트에 있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성은 밝히지 않았다)는 마지누카틸라에서 티베트 공예점을 운영한다. 그의 가게 계산대 뒤에는 달라이 라마 사당이 차려져 있다. 그는 2008년 시위 이후 티베트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 직접 대화하기가 위험해졌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티베트 동부 캄 지역에 있는 승려인 형을 통해 소식을 전한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입밖에 내지 못한다. 중국 공안이 대화를 도청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중국 당국에 내가 죽었다고 거짓말했다.”

춘두에는 10세 때 삼촌과 함께 히말라야를 넘어 에베레스트산 부근의 네팔로 탈출했다. 어린이 2명을 포함해 30명이 함께 이동했다. 그는 “어렸을 때였지만 아주 무서웠다는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의 외모와 말하는 태도가 서구인 같다. 진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콧수염을 약간 기르고 머리도 위에는 길고 옆은 바짝 깎았다. 영어도 유창했다. “한겨울에 히말라야를 넘었다. 중국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서 밤에 이동해야 했다. 삼촌이 내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나는 졸리고 너무 추워 삼촌에게 끌려가다시피 했다.”

첫 며칠이 지난 뒤 그들은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모두 큰 배낭을 머리에 지고 걸었다. 거의 다 건넜을 때쯤 얼음이 깨지면서 춘두에가 물에 빠졌다. 그가 두꺼운 얼음 아래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 삼촌이 가까스로 그를 끌어올렸다. 춘두에는 “그 후 바지가 젖어 산을 올라갈 때 마치 장작개비처럼 뻣뻣하게 얼어붙었다”고 돌이켰다.

고산지대에선 설맹(눈 위로 반사된 자외선에 의한 각막염)을 조심해야 하지만 그와 삼촌은 돈이 없어 선글라스를 마련하지 못하고 대신 검은 쓰레기봉투를 잘라 머리에 맸다. “가는 중간에 선글라스 상인들이 있었지만 700루피나 달라고 해서 못 샀다.”
 중국의 티베트 문화 학살
지난 9월 전통의상을 입은 티베트 난민 예술가가 티베트 망명의회 설립 기념식에 참석했다.
춘두에 일행은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로 들어가는 노선을 택했다. 등산복이나 장비, 충분한 음식 없이 그들은 에드먼드 힐러리가 1955년 저서 ‘대모험(High Adventure)’에서 묘사한 바로 그 위태로운 빙하와 산악지대 중 일부를 통과했다(힐러리는 뉴질랜드의 등산가이자 탐험가로 1953년 5월 29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정복했다).

티베트 난민은 중국과 네팔 국경수비대를 피해 카트만두의 유엔 난민안내소로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자유를 얻고 인도의 난민촌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카트만두에 도착하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난민안내소 문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 춘두에는 “네팔인의 옷을 입고 네팔 사람인 체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우리 4명만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안내소에 도착했다.”

춘두에의 부모는 아들이 중국 문화의 나쁜 영향을 받지 않도록 티베트에서 떠나 보냈다. 그는 과거 달라이 라마의 고향이던 라사에 지금은 사창가와 싸구려 술집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중국은 티베트인이라는 ‘민족’을 말살하려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삼촌에게 나를 데리고 탈출하라고 했다.”

춘두에는 최근 친구 아파트에서 영화 ‘언브로큰’을 해적판 DVD로 봤다. 미국 올림픽 육상 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루이스 잠페리니가 비행기 추락으로 태평양에서 표류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2년 이상 전쟁포로로 지내며 잔혹한 고문에도 끝까지 버텨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춘두에는 그 영화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도 티베트가 자유의 나라가 되는 희망을 갖고 있다. 언젠가 돌아가서 가족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국경통제 강화로 줄어드는 탈티베트인
인도의 다람살라에 사는 티베트 난민들이 달라이 라마의 건강과 장수를 비는 모임을 가졌다.
티베트 자치구의 인권 상황이 2008년 이래 악화되면서 인종차별도 심해졌다. 그곳의 한족은 티베트인과 달리 정부의 감시나 이동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정책연구소의 객원연구원 셰라브 우에세르는 “한족과 티베트인 사이에 긴장이 팽팽하다”고 말했다. 같은 도시에서 서로 다른 구역에 살며 완전히 단절됐다.”

2008년 시위 때 티베트 내부의 민족 긴장이 표출됐다.시위대는 라사의 한족과 그들 소유의 가게를 공격했다. 우에세르는 “중국 안에서 완전히 소외된 티베트인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달라이 라마나 티베트 국기 사진을 갖고 있다가 발각된 승려들은 ‘애국 교육’을 받거나 체포돼 고문당한다. 중국 정부는 1994년 티베트 수도원에서 달라이 라마 사진을 금지했다. 지금은 티베트인 가정과 스마트폰까지 그 사진의 금지조치가 확대됐다. ‘분리주의자’로 낙인 찍히면 체포된다. 체포된 사람이 때로는 아무런 설명 없이 수년 동안 사라지기도 한다. 고문에 따른 후유증으로 석방된 지 며칠만에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우에세르는 “중국은 티베트의 문화와 종교가 완전히 사라져야 티베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의도적인 차별 외에 통계적인 격차도 민족 긴장을 부채질한다. 중국 자료에 따르면 자치구 안에 사는 티베트인은 중국의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학력이 낮고 수명이 짧으며 소득도 적다. 지난 30년 동안 티베트 자치구는 중국에서 기대수명이 가장 낮았다(2010년 66.33년). 유아사망률도 가장 높다. 티베트 자치구에서 태어나는 아기의 23.5%는 임신 6주에서 생후 1주 사이에 죽는다. 중국 평균 유아사망률 8.6%의 약 3배다. 문맹률도 중국에서 가장 높다. 1990년 이래 상당히 줄긴 했지만 2010년 24.4%로 중국 평균 4%의 6배나 된다. 다람살라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체링은 “많은 부모가 자녀를 이곳으로 보내려 한다”고 말했다. “티베트를 벗어나면 더 나은 삶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티베트 탈출은 언제나 위험했다. 달라이 라마는 1959년 망명할 때 추시강죽 게릴라 전사들의 무장 호위를 받았다. 그로부터 47년 뒤인 2006년 9월 티베트 난민과 함께 낭가 파르바트를 넘어 네팔로 탈출하던 여승 켈상 남초(17)가 중국 국경순찰대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네팔 국경까지 20분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당시 그 부근의 초오유산을 등반하던 루마니아인이 그 장면을 촬영했다.

인도 뉴델리 유엔 사무소 앞에서 티베트 독립 시위 도중 분신자살한 동포의 사진을 두고 기도하는 티베트 난민.
2008년 이래 중국 국경 경비가 심해지고 중국이 네팔 국경순찰대를 지원하면서 티베트인의 탈출이 더 어려워졌다. 린첸 부장관은 “이젠 탈출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중국은 국경을 폐쇄했을 뿐 아니라 티베트인의 여권도 회수했다.” 티베트 망명정부에 따르면 2008년 직후 티베트 난민은 그 전해의 2000∼3000명에서 300∼400명으로 줄었다. 린첸 부장관은 “인도와 중국 사이의 국경은 완전히 차단됐다”고 말했다. “중국은 티베트인의 탈출을 막으려고 많은 예산을 쓴다.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왜 목숨 걸고 탈출하겠는가?”

그의 부서는 망명정부를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인도 정부의 도움으로 달라이 라마의 신변을 보호한다. 또 그들은 다람살라의 중국인 스파이를 색출하고 중국의 사이버공격도 방어하며 최근 탈출한 난민으로부터 티베트 내부 정보를 얻는다. 린첸 부장관은 중국의 정보 통제 탓에 난민 면담이 현지 정보를 얻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인권침해가 더 잘 폭로된다. 일부 티베트 블로거들은 목숨 걸고 내부 사정을 외부에 알린다.

초에기알 푼초크(25)는 “인도에 도착해서야 우리가 왜 떠나야 했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다람살라에서 공예점을 운영하며 야크 뼈로 만든 염주와 ‘티베트 해방’이라고 새긴 팔찌를 판매한다. 그도 10세 때인 2005년 티베트를 탈출해 갖은 고생 끝에 네팔로 갔다. 그는 “도중에 시신을 여러 구 봤다”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자녀가 중국 공산당의 ‘세뇌’에서 벗어나 교육을 받도록 험난한 탈출길에 올랐다.

난민들에 따르면 티베트의 중국 교사는 학생에게 중국 문화와 중국어만 가르치고 역사를 왜곡한다. 티베트가 독립국이었던 적이 없으며 1950년 중국의 침공은 서방 제국주의로부터 티베트를 ‘해방시킨 것’이었다고 가르친다.

푼초크는 다람살라의 티베트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첫 몇 년을 중국 공산당 선전을 걸러내는 ‘해독’ 과정에 비유했다. “티베트인은 인도에 오면 교육 받고 티베트 문화도 제대로 배울 수 있다. 나도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올바로 알고 나니 무척 화가 났다.”

그는 인도에서 성장했고 교육 받았지만 인도에서의 삶은 일시적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티베트가 독립하면 ‘생각해볼 것도 없이 달려가겠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 나라로 반드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 NOLAN PETERSON / 번역 이원기



[ 필자 놀란 피터슨은 헤리티지 재단의 온라인 뉴스매체 데일리 시그널의 특파원이다. 이 기사는 데일리 시그널에 처음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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