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당하기 어려운 비밀

중간에 슬라브 지방의 자작나무 숲을 비추는 장면이 한 번 더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지옥 같은 학살의 현장을 떠날 줄 모른다. 거의 2시간 동안 대학살의 현장을 파고든 뒤 카메라의 초점을 다시 자연으로 되돌린 것은 잔인하면서도 용감한 행동이다. 끔찍한 죽음의 한가운데서 세상의 불변성과 생명의 풍요로움을 상기시키니 말이다. 난 그 장면을 보면서 W H 오든이 피터 브루겔의 그림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을 보고 쓴 시가 떠올랐다.
만사가 어떻게 그 재앙을 그토록 한가롭게 외면하고 있는지(how everything turns away / Quite leisurely from the disaster)
‘사울의 아들’은 외면하기 어려운 영화지만 지켜보기도 그 못지않게 힘들다. 전제는 매우 단순하다. 이 수용소의 헝가리인 포로 사울 아우스랜더는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의 일원이다(존더코만도는 나치 수용소에서 다른 포로들을 가스실로 데려가고 그들이 죽은 뒤 시체를 소각장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던 유대인 작업부대를 말한다). 오프닝 장면에서 사울은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한 소년을 발견한다. 그 소년은 곧 나치 친위대 의사(사실상 흰 가운을 입은 살인자다) 손에 질식해 숨진다. 사울은 그 소년의 시체를 빼돌려 유대식으로 장례를 치러주기로 마음먹는다.
유대식 장례는 사후 24시간 이내에 치르도록 돼 있다. 영화 ‘사울의 아들’은 암묵적으로 이런 시간 제한의 영향을 받는다. 모든 사건이 하루 반 안에 펼쳐진다. 종교적 관습은 둘째치고 사울에겐 시간이 많지 않다. 사울은 동료 포로인 의사를 설득해 그 소년의 시체 부검을 실시하지 않도록 조치한다. 하지만 그는 소년의 시체를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장례식을 주관할 랍비를 찾는 동안 그는 소년의 시체를 자신의 숙소에 감춰둔다.
한편 사울의 존더코만도 동료들은 반란을 계획한다. ‘비밀의 운반자들(Geheimnisträger)’인 그들은 ‘최후의 해결책’(Final Solution, 나치 독일의 유대인 말살 계획)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단기간 이용당하다 죽을 운명이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챈 그들은 수용소를 탈출하기로 한다. 사울도 이 반란에 동원됐지만 소년의 시체를 지키려는 일념 때문에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사울 역을 맡은 게자 뢰리히는 미국 뉴욕에 사는 헝가리 출신의 배우 겸 시인이다. 뢰리히는 소화하기 어려운 주제뿐 아니라 네메스의 가차 없는 카메라와도 씨름해야 했다. 네메스는 뢰리히의 어깨 위나 얼굴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끊임없이 그에게 초점을 맞췄다. 영화에 벌거벗은 시체가 많이 나오지만 흐릿한 영상으로 처리된다. 사울이 이제 그것들을 얼마 전까지도 살아 움직이던 사람이 아니라 단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야 하는 고깃덩어리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용소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찍은 장면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시체 소각장 외부도 전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뢰리히의 얼굴을 거의 모든 각도에서 잡는다. 가운데가 움푹 패인 코끝과 음울한 눈, 입술 왼쪽의 멍 자국, 우울함이 묻어나는 입술 등. 대다수 배우가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어 한다. 하지만 뢰리히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는 사울에게 생명이 빠져나간 빈 껍데기 같은 분위기를 부여했다. 그는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들여보낸 다음 그 앞에 서서 그들의 비명 소리를 듣는다. 내가 본 영화 장면 중 가장 끔찍한 30초였다. 사울의 감정 결핍은 병적인 게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전략이다.
사울이 장례를 치러주려고 하는 소년은 맥거핀(영화에서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매우 중요한 것처럼 꾸며 관객의 주의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게 하는 속임수)이다. 우리는 그 소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며 사울은 한 동료 포로에게 그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거짓말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잘 모른다고 해서 감정을 느끼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 소년은 가스실에서 (단 몇 분이라도) 살아남음으로써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들에게 승리한 것이다. 결국 그들은 소년을 죽이지만 사울은 그의 존엄성을 되살리려 한다. 그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과 아직 살아있는 모든 이들의 존엄성을 되살리려는 의도다.
실제로 1944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존더코만도의 반란이 있었지만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사울은 그들의 조잡한 계획이 나치 친위대의 감시를 뛰어넘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모든 세속적인 희망을 소년의 장례식으로 승화시킨다. 반란 계획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한 대원이 사울에게 “죽은 자를 위해 삶을 버리느냐?”고 말한다. 난 사울이 현대판 안티고네라고 생각한다. 소포클레스의 연극 ‘안티고네’에서 그녀는 크레온 왕이 매장을 금지하고 들판에 버려둔 자신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땅에 묻어 주려고 애쓴다. “내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도록 내버려 두라”고 그녀는 반항적으로 말한다.
‘사울의 아들’은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등 사람들이 기대하고 받아들이는 홀로코스트 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쉰들러 리스트’와 ‘인생은 아름다워’는 나치의 학살 현장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하지만 네메스는 좀 더 진실된 뭔가에 초점을 맞췄다. 그가 그린 수용소는 유럽 곳곳에서 모인 유대인들이 쓰는 다양한 언어(그래서 포로들끼리 의사소통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로 시끄럽고 부산하다. 또 그 사이로 끊임없이 들려오는 독일어 고함 소리는 소름 끼칠 만큼 기분 나쁘다.
시체 소각장은 습하고 쇳소리가 철커덕거리는 죽음의 공장이다. 힘들고 단조로운 일상 속으로 간간이 공포가 엄습한다. 이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새로 도착한 포로들을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어 태워 죽이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전쟁의 광기를 이 정도로 끔찍하게 표현한 영화는 ‘지옥의 묵시록’(1976)밖에 없었다.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마을 습격 장면은 정말 소름 끼쳤다.

‘사울의 아들’은 ‘쉰들러 리스트’ 같은 영화보다 알렉산더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같은 소설과 더 공통점이 많다. 이 소설은 소련 강제수용소에 갇힌 한 포로의 경험에 초점을 맞춘다. 고통을 예술로 표현하는 데는 재능이 요구된다. 하지만 네메스와 솔제니친처럼 고통을 끔찍한 일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좀 더 희귀하고 어두운 기술이 필요하다. 그런 기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작가 프리모 레비 등 많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유대인을 죽음으로 이끈 존더코만도를 나치의 공범자로 볼 것인가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네메스는 그 질문에는 관심이 없다.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도덕적 진퇴양난의 문제는 무궁무진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다행한 일이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질문은 사울이 왜 이름도 모르는 이 소년의 장례를 치러주려고 그렇게 애쓰는가 하는 점이다. 그 수용소에서 한줌의 재로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과 다를 게 없는데 말이다.
그 소년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한 것이 그에게 자유를 향한 욕망보다 더 큰 의무감을 불러일으켰다. 뢰리히는 사울의 고통이나 용기를 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늘게 찡그려 뜬 그의 눈 속에서 그 고통과 용기를 읽을 수 있다. 간간이 그가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귀신에 씐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좋은 영화는 많지만 그것들이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건 아니다. 난 ‘앵커맨’을 즐겨 보지만 그 영화의 주인공 론버건디의 존재가 세상에 보탬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사울 아우스랜더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 오늘날 동유럽에서는 난민 유입이 봇물을 이룬다. 그들을 반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경멸한다. 70년 전 유대인 50만 명을 강제수용소로 보낸 헝가리 사람들이라면 특히 그럴 것이다. 지난해 11월 파리 테러 이후 파리 시내 곳곳에 군인과 경찰이 배치됐다. 벨기에에서는 경찰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또 다시 독재자의 손아귀에 들어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며 툭하면 서방을 조롱한다. 시리아에서는 ‘칼리프 국가’ 설립을 꾀하는 극악무도한 이슬람국가(IS)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언제 이란과 전쟁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이다.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울의 아들’은 교훈을 주려는 영화가 아니지만 그 속엔 놓칠 수 없는 교훈이 숨어 있다. 20세기는 우리에게 가스실과 핵폭탄을 남겼다. 21세기의 전쟁은 이미 무인기 공격과 사이버 공격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탄생시켰다. 앞으로도 틀림없이 새로운 살상수단이 개발될 것이다. 존더코만도가 간직했던 비밀은 나치 수용소의 실상뿐 아니라 인간 마음 속의 어두운 구석에 관한 좀 더 끔찍한 뭔가가 아니었을까?
- 알렉산더 나자리안 뉴스위크 기자 /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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