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닮아가는 유럽 경제

그렇다면 지금 유럽 경제가 일본을 닮아가는 걸까? 유럽중앙은행(ECB)은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지난 3월 10일 창설 이후 최초로 기준금리를 제로(0)로 결정하고 예금과 대출 금리를 일제히 인하하며 양적완화를 확대하는 등 시장에 충격을 주는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ECB는 통화정책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0.05%포인트 인하해 0%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1998년 창설된 이후 ECB가 기준금리를 제로로 낮춘 것은 처음이다. 또한 예금금리는 -0.3%에서 -0.4%로 인하하고, 한계대출금리는 0.3%에서 0.25%로 낮췄다. ECB는 채권 매입 규모도 매달 600억 유로에서 800억 유로(약 105조원)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이런 조치는 유럽 경제가 과거 일본과 같은 어려움에 처했는지를 둘러싼 논란을 가열시킬 전망이다(일본은 20년 이상 장기침체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또 ECB의 이번 조치는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경기부양을 위해 중앙은행이 시중에 돈을 푸는 통화정책)가 유럽의 성장에 도움이 될지 아니면 재앙의 씨앗인지를 둘러싼 논란에도 불을 지필 것이다.
호주 피델리티 인터내셔널의 투자 해설자 마이클 콜린스는 “마이너스 금리의 실험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은 마이너스 금리가 유로존에서 거의 3년 동안 지속됐고 유럽의 다른 지역에선 더 오래 실시됐지만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는 생각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유럽과 일본은 다른 점이 많다. 따라서 특정 이점은 어느 한쪽에만 적용된다. 따라서 유럽 경제가 ‘일본화’할지 여부는 알기 어려운 문제다. 양쪽 모두에서 근로연령층 인구의 감소가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지만 유럽은 이민자를 받아들인 역사가 더 길다. 고통 완화를 위한 정부 지출 확대는 유럽보다 일본에서 실행하기가 더 쉽다. 유럽의 경우 단일통화 유로의 존재가 운신의 폭을 좁힌다. 또 유럽에선 일본과 달리 중앙은행의 개입을 비난하는 반대의 목소리가 아주 크다.
유럽의 일본식 장기침체 문제의 핵심은 디플레이션이다. 물가하락은 직관적인 차원에선 반갑게 들린다. 그러나 제대로 기능하는 자본주의 경제에는 그것이 독이다. 우선 물가하락은 수요의 둔화나 감소를 의미한다. 수익을 원하는 제조사들이 상품 가격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소비자가 충분히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수익을 올릴 가능성이 사라지면 기업은 신규 공장이나 기계 등의 설비 투자나 고용을 늘리지 않는다. 바로 그런 구매의 부재가 디플레이션의 악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유로존의 인플레이션은 극히 낮은 수준이다. ECB는 지난 3년 연속 물가상승률 목표(2%에 근접하는 수준)를 달성하지 못했다. 지난 1월의 허약한 상승률 후 2월엔 물가가 아예 하락했다. 물가의 전반적인 하락을 가리키는 디플레이션의 망령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2012년 유럽의 국가부채 위기 후 경제 전문가들은 유로화를 사용하는 19개국이 혼란에서 벗어날 길을 찾으려고 애썼다. 물가상승률이 지속적으로 낮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유럽 경제가 일본을 닮아간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기 시작했다. 경제학자들은 유럽이 일본처럼 장기침체에 직면한 게 아닌지 의문을 표했다.

디플레이션의 배경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인구 변동이다. 유럽과 일본에선 근로연령층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다. 일본의 경우 1990년대 말부터 감소했고 유럽은 나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약 2008년부터 우려할 수준으로 떨어진다. 근로자가 은퇴하면 그들은 저축을 인출하거나 정부 연금을 받거나 예전보다 지출을 줄인다. 컨설팅업체 하이프리퀀시이코노믹스의 대표 칼 와인버그는 “인구가 감소하면 수요와 국내총생산(GDP)만이 아니라 물가도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유럽은 인구 변동 문제가 일본만큼 심각하진 않다. 또 유럽엔 일본보다 이민자가 많다. 지난 몇 년 동안 내전에 휘말린 시리아와 이라크 등지에서 수백만 명이 폭력을 피해 유럽으로 탈출하면서 난민위기가 발생했다. 만약 그들이 노동력으로 잘 통합될 수만 있다면 건강한 근로연령층 인구가 절실한 유럽 국가들엔 횡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명백한 해결책인 정부 지출 확대는 유럽에선 시행하기 어렵다. 금융 위기에다 국가부채 위기까지 겹치면서 스페인부터 아일랜드, 그리스까지 국고가 고갈됐다. 그에 따라 정부는 경제에서 수요를 되살리는 부양책을 사용할 재량권이 크게 줄었다. 독일처럼 돈을 빌릴 여력이 있는 나라의 정부는 부채 늘리기를 거부한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지난 2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장 회의에서 재정적 부양 공조에 반대하며 그보다 개별 국가의 성장을 강화하기 위해 구조적 개혁에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 여력이 거의 소진됐다며, 성장에 필요한 자금을 위해 부채를 지는 것은 경제의 ‘좀비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추가 부양의 논의는 진정한 과제를 방해할 뿐이다. 일각에서 전망 리스크가 현실화할 경우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지만 독일은 G20의 재정 부양책에 동의하지 않는다.” 쇼이블레 장관은 유가 하락이 이미 ‘막대한’ 수요 부양책을 제공하는 셈이라며 확장적 재정정책이 또 다른 위기의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적어도 일본 정부는 인프라 등의 프로젝트에 투자하기 위해 GDP의 약 150%까지 부채를 떠 안을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가장 힘든 경제 조건에 처한 유럽국들(그리스, 스페인 등)도 그처럼 돈을 빌릴 순 있지만 자체적으로 통화 발행을 통제할 순 없다(그 권한은 ECB에 위임됐다). 따라서 그리스처럼 그 국가들은 국제 투자기관이 설정한 한도에 곧 이를 것이다. 또 그들은 통화를 평가절하할 수도 없다.
더 골치 아픈 문제는 장기침체을 방지하려는 ECB의 정책이 일본식 침체를 막을 기회를 갖기도 전에 힘을 잃는 경우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유로존의 최대 국가인 독일의 관리들을 격분시켰다. 2012년 그는 단일통화 유로의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 마다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말은 국가 부도는 없을 것이며 ECB가 최후에 의지할 수 있는 대출기관이 될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설립 조약에도 없는 ECB의 역할이었다.
이제 마이너스 금리와 채권 매입 확대로 드라기 총재는 미지의 영역으로 한발 더 나아갔다. 일부 독일 관리들은 항의의 표시로 ECB를 떠났고 일부는 드라기 총재의 정책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독일 코메르츠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호에르그 크래머는 드라기 총재의 최근 발표 직후 좌절감을 표했다. 그는 ECB의 수십억 유로에 이르는 부양책으로 유럽의 각국 정부가 시급히 실행해야 하는 필수적인 구조개혁을 미룰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그런 조치가 기업신뢰지수도 떨어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업신뢰지수는 기업들이 벌써부터 허약한 수요를 두려워하는 상황이라 반드시 그 정책의 영향으로 떨어진다는 점을 입증하긴 어렵다.
크래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드라기 총재가 유럽이 두려워하는 일본식 사태를 피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정책을 계획대로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약이 듣지 않으면 버려야 한다. 그러나 ECB는 올해 하반기에 우리에게 지난 번과 거의 비슷한 약을 또 줄 것이다.”
- 카터 다커티 아이비타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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