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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탄핵정국 어디로] 핑크 타이드 저물고 블루 타이드 시대로
- [브라질의 탄핵정국 어디로] 핑크 타이드 저물고 블루 타이드 시대로

호세프는 표결 전 8월29일 열렸던 마지막 변론에서 인간적으로 호소했다. “과거 20년 간 독재에 맞서 싸웠다. 내 몸엔 당시 고문의 흔적이 남아있다” “군부 독재시절 고문으로 겪었던 죽음의 공포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쿠데타로 인한 민주주의의 죽음이 더 무섭다” “경제 기득권이 아닌 민주주의를 위해 투표해 달라” “일흔 살 가까이 됐고 엄마와 할머니가 됐지만 평생 나를 이끈 신념을 버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등 격정적인 호소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연설은 아무런 메아리가 없었다.
우파가 주류인 브라질 상원의원들은 호세프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3분의 2 이상의 찬성 표결로 그를 권좌에서 쫓아냈다. 이날 수도 브라질리아 의회에서 탄핵 심판을 주재한 히카르두 레반도브스키 대법원장은 “이날 부로 호세프는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고 미셰우 테메르(75)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 직을 승계해 남은 임기인 2018년 말까지 맡게 된다”고 선언했다.
좌파 정권 집권 13년 만에 막 내려
호세프는 대변인을 통해 “연방대법원에 탄핵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지만 결정을 뒤집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룰라 전 대통령을 비롯한 노동자당 지지자들은 대선을 새로 치러 새 대통령을 뽑자고 주장하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 과반수인 62%의 국민이 ‘대선을 다시 치러야 한다’고 응답한 것을 근거로 삼고 있다. 대통령 직을 승계하는 테메르에 대한 지지율이 불과 10% 정도에 그친 것도 명분이 된다. 하지만 국민의 여론이 법과 제도를 앞설 수는 없다. 현행법에서 새로운 대선을 치르려면 대통령 직을 승계한 테메르가 사퇴해야 한다. 하지만 우파의 기수로 좌파 대통령 호세프를 쫓아낸 테메르가 자리에서 물러날 가능성은 없다. 이 때문에 테메르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대선이 다시 치러질 가능성은 없는 상황이다. 브라질의 권력은 국민이 선택한 좌파의 손에서 의회가 선택한 우파로 넘어갔다.
탄핵 전날 호세프는 “테메르가 이번 탄핵 쿠데타의 배후”라며 “그가 대통령직을 강탈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이번 탄핵 정국의 최대 수혜자가 테메르다. 호세프는 “테메르가 대통령에 오르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크게 후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장주의자이며 친기업 정치인으로 통하는 테메르는 최저 임금을 올리는 호세프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어왔다. 테메르는 중도우파 브라질민주운동당(PMDB) 소속의 정치인이다. 한때 노동자당과 연정을 이뤘다. 룰라의 노동자당이 중도 좌파로 경제 재건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세프가 들어서면서 사사건건 맞서왔다.
꼼수 쓴 우파, 빌미 제공한 좌파
우파는 호세프의 전용이 정부재정회계법을 위반한 것으로 탄핵 사유가 된다고 주장한다. 안토니오 아나스타시아 상원의원은 “2010년 8억 헤알 정도였던 국영은행 자금 전용이 2014년엔 무려 59억 헤알(약 2조88억원)로 불어났다”고 지적했다. 그는 “호세프 정권이 상습적으로 재정 적자를 국민에게 숨겼다”며 “이는 명백한 범죄”라고 주장했다. 우파의 보루인 브라질 검찰도 호세프가 재정 ‘분식회계’로 국가에 해를 끼쳤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호세프 측은 물론 좌파 지지자들은 국영은행 자금 차입은 정상적인 통치 행위이며 탄핵 사유가 되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호세프는 의회에서 “국영은행 자금 전용은 전 정부부터 이어진 관례”라고 맞섰다. 그는 국영은행에서 차입한 자금은 최저임금을 올리고 연금을 확대하는 데 사용했다”며 정당한 통치행위라고 반박했다.
브라질 법과 제도상 탄핵의 칼자루는 의회가 쥐고 있고, 의회는 우파가 장악하고 있다. 의회를 장악한 브라질 우파 세력에게 정부재정회계법 위반은 좌파 대통령 호세프를 제거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그들이 노린 것은 탄핵을 통한 정권 재 탈환이었다. 선거로 얻지 못한 권력을 법률 해석과 의회 표결을 통해 이룬 것이다. 이는 의회에 이어 대통령직도 장악한 우파정치권력의 취약점이기도 하다.
좌파는 잇단 부패 혐의와 실정으로 명분과 신뢰를 잃어갔다. 정부재정회계법 위반이 우파가 만든 탄핵 명분이라면 좌파의 부패는 호세프의 무장을 해제한 강력한 변수였다. 특히 과거 룰라 정부와 관련된 좌파 정치인들의 부패 혐의가 드러나면서 호세프는 기운이 빠졌고 우파는 힘을 더했다. 집권당인 노동자당은 물론 함께 연정을 이룬 브라질민주운동당(PMDB) 소속의 주요 정치인들이 브라질 국영석유회사인 페트로브라스 뇌물수수 스캔들에 연루돼 검찰에 의해 기소됐다. 심지어 브라질 좌파의 기수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존경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룰라 전 대통령도 연루 혐의를 받고 있다. 호세프는 이 스캔들과 관련해 룰라가 수사를 받게 되자 그를 수석장관에 임명하겠다고 발표했다. 일종의 ‘방탄 공직 임명’을 시도한 셈이다. 이런 무리한 방식으로 룰라를 보호하려고 했던 호세프의 반격은 여론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결국 수석장관 임명은 취소되고 호세프와 룰라가 동시에 정치적인 타격을 입었다.
재정 적자 불어나고 성장률 마이너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좌우파 할 것 없이 호세프에게 등을 돌렸다. 급기야 지난해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우파 중심의 시위였지만 곧 빈민들까지 나서는 등 좌우파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대는 ‘호세프 퇴진’을 외치기 시작했다. 올림픽이 다가오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시위가 열린 것이다. 우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브라질 하원은 지난해 말 호세프 탄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8월31일 나온 것이다.
결국 정부재정회계법 위반과 좌파의 부패, 호세프의 경제 실정 등이 겹쳐 국민이 등을 돌리면서 우파가 장악한 의회가 ‘탄핵을 통한 정권 교체’라는 꼼수를 부려 성공한 것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도한 일을 벌인 우파도 문제지만 그런 빌미를 줘서 좌파 정권을 종식한 호세프도 문제가 만만치 않다. 호세프는 2011년 대선에서 56%를 득표하며 당선했다. 당시 80% 수준의 경이적인 지지율을 자랑하던 룰라의 지지가 결정적인 힘이 됐다. 호세프의 지지율은 2013년 3월 79%로 올랐다. 그런데 2014년 대선에서 연임에 성공한 후 경기 침체에 따른 높은 실업률에 좌파 정치권의 부패 스캔들이 터지면서 여론은 곤두박질쳤다. 올해 3월 10%로 떨어졌다. 결국 이번 탄핵으로 호세프는 대통령직을 잃었고, 2003년 룰라 이후 13년에 걸친 좌파 노동자당 정권도 막을 내리게 됐다.
호세프는 경제적·도덕적·정치적 위기를 동시에 당한 셈이다. 서민을 위한 복지에 재정을 쏟아부었지만 경기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일자리를 잃은 서민들이 그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정부 재정 적자가 눈덩이처럼 분 것도 문제의 하나다. 브라질은 현재 재정 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10% 수준이나 된다. 나라 빚도 많아 대외채무를 갚는 데 전체 예산의 50% 정도가 들어갈 정도다. 세금을 많이 거두고 국영은행에서 차입을 해도 정작 호세프가 그렇게 생각했던 서민들에게 돌아갈 몫은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경기 침체 속에서 호세프가 분배를 강조한 것도 하나의 빌미가 됐다. 룰라 시절만 해도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고민했다. 재정 운용에서도 포퓰리즘에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이 때문에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극빈층에 대한 복지도 확대할 수 있었다. 중산층이 50%로 늘어나는 등 경제 성장의 효과가 고루 확산했다. 하지만 호세프 정권에 오면서 성장보다 복지에 무게를 두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호세프가 재선되던 2014년 무렵 전 세계는 ‘분노하라’라는 말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경험했다.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이며 이를 바로 잡는 것이 좌파 정부의 의무라는 믿음이 전 세계로 뻗어갔다. 이에 영향을 받은 호세프 정권은 취약계층인 저소득 층을 위한 분배정책에 무게를 실었고 이 때문에 전체 경제 운영 기조가 흔들렸을 수도 있다.
룰라와 달리 원칙과 고집으로 일관
호세프는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으며 좌파 군사조직인 민족해방사령부 소속으로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게릴라 조직에 가담하기도 했다. 노조에서 활동하며 ‘피케트’라는 이름의 좌파 매체에서 편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브라질 언론은 호세프가 청년기에 조직업무에만 가담했다고 보도했으나 일부에선 무기를 직접 들기도 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런 활동으로 호세프는 1970년부터 2년 간 감옥생활을 했다.
호세프는 자신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실용적인 자본주의로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자신의 급진적 활동에 대해서는 긍지가 있다. 이 시절에 대해 호세프는 2005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더 나은 브라질을 건설하기 위한 꿈에 동참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게 우리의 특징을 만든 건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과감하게 나섰다는 게 우리들의 특징이다.”
사실 호세프는 2세 좌파 정치인이다. 그는 1947년 불가리아에서 이민 온 페드루 호세프와 농장주의 딸로 학교 교사였던 지우마 제인 다 시우바 사이에서 벨라 호리존테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920년대 불가리아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며, 정치적 박해를 피해 1930년대에 브라질로 이주했다. 변호사이자 기업인으로서 성공해 재산을 모았다. 이런 핏줄과 전력의 호세프는 전임 룰라와 달리 타협과 협상 대신 원칙과 고집으로 일관했다는 평이다. 룰라가 중도우파까지 모아 탄탄한 정권을 유지한 데 비해 호세프는 자신의 고집으로 스스로 정치 영역을 좁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다양한 이유와 함께 중남미 전역에서 좌파가 쇠퇴하는 하나의 도도한 흐름도 호세프의 퇴장에 일조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중남미 국가는 지난 10년 간 ‘핑크 타이드’로 불리며 중도좌파 정권이 하나의 조류를 이뤘다. 하지만 2013년 무렵부터 중남미 전체의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인기가 떨어지는 추세다. 산유국 베네수엘라는 경제 실정으로 국민이 정권에 등을 돌리고 다음 선거만 기다리는 형국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브라질에서 탄핵 사태가 생긴 것이다. 핑크 타이드가 가고 이제 블루 타이드가 새롭게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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