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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BES 400] 아메리칸드림은 건재하다

[FORBES 400] 아메리칸드림은 건재하다

TV화면에서, 정치집회에서, 심지어 의회에서조차 이민자를 곱게 보는 눈길은 없다. 그러나 포브스 400대 부자 순위에서는 훈훈한 러브스토리가 펼쳐진다. 미국 외 국가에서 출생한 부자가 전체의 10%를 상회하며 사상 최고의 수치를 기록한 것이다. 미국의 기업가정신 그리고 일자리 창출에 청신호를 보내며 말이다.토마스 피터피(Thomas Peterffy)는 1944년 9월 30일 부다페스트의 한 병원 지하에서 태어났다. 소비에트연방의 공습때문에 어머니가 이곳으로 피신해 피터피를 출산한 것이다. 소비에트연방 덕분에 나치점령으로부터 해방된 헝가리는 위성국가로 전락하여, 공산주의라는 또다른 이름의 억압체제하에 신음하게 된다. 귀족 출신이었던 피터피와 그 가족은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헝가리에서 우리는 죄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피터피의 말이다. 젊은 피터피는 이 감옥에서 벗어나 미국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 꿈을 꾸었다. 20세가 되던 해, 피터피는 탈출계획을 세웠다. 피터피는 헝가리인에게 서독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기 위한 단기비자가 허용된다는 점을 이용했다. 당시 불법으로 미국행을 감행한 수백만의 이민자들처럼, 피터피는 비자가 만료된 이후 고국 헝가리로 돌아가지 않고 대신 미국으로 떠났다. 1965년 12월 피터피는 뉴욕시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내렸다. 수중에 동전 한 푼 없었고 영어도 할 줄 몰랐다. 여벌옷, 측량지침서, 계산자, 그리고 조상의 그림 한 점이 담긴 여행가방이 전재산이었다.

피터피는 헝가리 출신 이민자들이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던 스패니시 할렘(Spanish Harlem)에 정착해 누추한 아파트를 전전했다. 조금은 두려웠지만, 행복했다. 피터피는 “고국을 등지고 문화가 다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미국으로 온 것은 큰 결심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정말 내가 뿌린대로 거둘 수 있고, 능력과 성공하고자 하는 의지가 한 개인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미국은 무한한 기회의 땅이었지요.”
 400대 부자 중 42명이 이민온 귀화시민
피터피의 믿음은 옳았다. 피터피는 측량회사에서 제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피터피는 회사에서 컴퓨터를 한 대 구입했을 당시, “그 누구도 프로그램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제가 해보겠다고 자원했다”라고 말했다. 피터피는 곧 컴퓨터작업에 능숙해졌고 월스트리트의 중소 컨설팅기업에서 프로그래머 일자리를 얻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매매모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 피터피가 20만 달러를 모아 창업한 기업은 전자주식매매의 지평을 열고, 주식거래소가 디지털화되기 이전부터 온라인매매를 실행했다. 1990년대 피터피는 주식시장의 증권거래업에 주력하기 시작했고, 인터액티브 브로커스 그룹(Interactive Brokers Group)을 창업해 오늘날 시가총액 140억 달러를 기록하는 기업으로 키웠다. 올해 72세인 피터피의 자산은 126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피터피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구글의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 375억 달러), 이베이 창업자 피에르 오미다이어(Pierre Omidyar, 81억 달러), 테슬라와 스페이스X의 창업자 엘론 머스크(Elon Musk, 116억 달러),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제리 양(Jerry Yang), 미키 에리슨(Micky Arison), 패트릭 순시옹(Patrick Soon-Shiong), 얀 쿰(Jan Koum), 제프 스콜(Jeff Skoll), 호르헤 페레즈(Jorge Perez), 피터 틸(Peter Thiel) 모두 마찬가지다. 이 밖에도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마침내 포브스 400대 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부자는 스무 명이 넘는다.

정확히 포브스 400대 부자 중 42명이 미국으로 이민온 귀화시민이다. 이는 전체의 10.5%에 해당하는 수치로, 귀화시민이 미국 전체 인구의 6%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대단한 성과이다. 비시민권자까지 고려하면 미국 거주민의 13% 가량이 외국태생이지만, 초바니 요거트의 오너 함디 올루카야(Hamdi Ulukaya)나 위워크(WeWork)의 창업자 아담 노이만(Adam Neumann)처럼 미국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아 400대 부자 순위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미국에서 거주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비시민권자 억만장자들도 꽤 많다.

국부유출, 안보위협 등 이민자를 겨냥한 온갖 정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 이민자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다. 10년 전 포브스 400대 부자에서 이민자의 수는 35명이었고, 20년 전에는 26명, 30년 전에는 20명에 불과했다. 포브스 400대 부자 순위처럼 창업가의 성공이라는 잣대로 측정한 아메리칸드림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어느때보다도 더 강력한 파워를 입증하고 있다. 이민자 출신의 부자 42명의 순자산을 모두 합산하면 2480억 달러에 이른다.

카우프만 재단(Kauffman Foundation)에 따르면, 이민자는 미국 태생의 미국인에 비해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할 확률이 거의 2배나 더 높다고 한다. 포브스 400대 부자인 루퍼트 머독과 마이클 블룸버그가 설립한 초당적 단체인 ‘새로운 미국경제를 위한 파트너십(Partnership for a New American Economy)’의 보고에 따르면, 2011년 미국의 창업기업 중 이민자가 세운 기업은 전체의 28%에 해당한다. 이민자가 창업한 비상장기업의 근로자는 전체고용인구의 10%를 차지했고 이들 기업은 7750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물론 이 중에는 레스토랑이나 자동차 수리점처럼 영세한 규모의 사업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초당적 연구 단체인 ‘국립미국정책재단(National Foundation for American Policy)’은 가치평가액 10억 달러를 상회하는 미국 테크기업 87개 중 44개가 이민자가 창업한 기업으로, 이들 대다수는 오늘날 미국 최고의 부자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기록 모두 전혀 놀라울 것은 없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의미 있는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쉬워졌고, 항상 존재해온 미국의 창업가 계급은 250여 년의 역사에 걸쳐 이민자로 구성되어왔다.
 이민은 기업가 정신을 내포하는 마인드셋
13세의 나이에 영국 리버풀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온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는 미국독립혁명의 자금을 대는데 일조했고, 미국독립선언서와 헌법에 서명했다. 프랑스 출신의 이민자 스티븐 지라드(Stephen Girard)는 미국에서 은행업을 시작해 미-영 전쟁 기간동안 미국정부가 발행한 전시국채의 대부분을 인수하며 미국을 재정난으로부터 구했다. 독일 출신의 젊은 악기제조가 존 제이콥 애스터(John Jacob Astor)는 미국에서 모피무역과 부동산사업을 통해 부를 일구었고 이후 미국 최초의 사회공헌사업가 대열에 합류했다. 마찬가지로 독일 출신의 이민자 프리드리히 와이어하우저(Friederich Weyerhaeuser)는 목재업의 거물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출생의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는 철강업으로 미국 최고의 부호라는 명성을 쌓았고, 애스터와 마찬가지로 은퇴 후 사회공헌에 일생을 바쳤다. 프록터&갬블, 크래프트(Kraft), 그리고 듀퐁의 기업자 모두 이민자 출신이다.

피터피의 사례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듯, 보다 나은 환경에서 살기 위해 스스로 리스크를 감내하기로 결정하는 이민이라는 행위 자체가 기업가 정신을 내포한다. 이민은 마인드셋이다.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비행기에 올라타는 겁니다.” 올해 포브스 400대 부자 순위 70위에 오른 사히드 칸(Shahid Khan)의 말이다. “이민자는 변화에 잘 대처하고,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하지요.”

포브스 400대 부자 중 이민자 출신의 부자를 대략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상당수는 피터피의 경우처럼 무언가를 탈출해 미국으로 왔다. 세르게이 브린의 가족은 세르게이가 6살이 되던 해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피해 러시아를 떠나왔다. 조지 소로스는 나치 점령하의 헝가리를 피해 미국으로 왔고, 이고르 올레니코프(Igor Olenicoff)의 가족은 러시아 황제와의 인맥 때문에 세계2차대전 이후 소비에트연방을 떠나 미국으로 와야만 했다.

세계 어디를 가든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었지만 더 많은 기회를 찾아 미국을 선택한 사례도 있다. 엘론 머스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립학교에 다녔으며, 루퍼트 머독의 아버지는 호주에서 신문사를 경영하며 기사 작위를 받기까지 했다. 피에르 오미다이어의 아버지는 외과의사였다.

빈부의 정도와 관계없이, 이들 부자를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미국의 기업가 정신이다. 미국을 선택한 이들은 미국이 제공하는 기회의 가치를 알아보고 한편 기회가 필연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 있다. 기회를 주었다고 해서 여기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공을 일구어야 한다는 것이다.
 30억 달러의 부를 일군 장도원·장진숙 부부
장도원 회장과 아내 장진숙은 1981년의 한 토요일 로스앤젤레스(L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계엄령이 해제된 바로 그 해 미국으로 떠나온 부부는 고등학교 졸업장 외에는 수중에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장회장은 미국에 오자마자 신문의 구직광고를 샅샅이 훑었고 LA의 한 커피숍에서 구직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주 월요일부터 접시를 닦고 음식을 준비하는 아침교대조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저는 최저임금을 받고 일했습니다…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주유소에서 하루에 8시간을 추가로 일했고 더 나아가 소규모로 사무실 청소업을 시작해 자정까지 바삐 일했다. 아내인 장진숙은 미용사로 일했다.

장도원 회장은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의류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좋은 차를 탄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에 의류점에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 후 부부는 1만1000달러(약 1200만원)를 모아, 900평방피트(83㎡)) 규모의 의류점을 내고 패션21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첫 해 7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고, 이후 부부는 6개월마다 신규매장을 내기 시작했다. 이후 포에버21로 브랜드명을 바꾸었으며, 오늘날 부부의 자산은 30억 달러에 이른다.

“저는 거의 무일푼으로 미국땅을 밟았습니다.” 장회장의 말이다. “미국이 저에게 준 기회에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간직할 것입니다.”

파키스탄계 이민자 사히드 칸의 경우 논리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민지로 적합한 곳은 영국이었다. 하지만 본인의 말을 빌리면, “제게 미국은 항상 약속의 땅이었습니다”라고 한다. 1967년 1월, 칸은 당시 이민심사 관문인 엘리스 아일랜드(Ellis Island)와 같았던 JFK 공항에 내렸다. 시카고행 연결편이 눈보라로 우회하는 바람에, 16세였던 칸은 대신 세인트루인스로 향했고 비행기에서 내려 섐페인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주머니 속의 500달러가 전재산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밤이 되면 시급 1달러20센트를 받고 접시닦이일을 했다.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제 고향에서는 이런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칸의 말이다. “제게 바로 든 생각은, ‘와, 내가 일할 수 있구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나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어’ 였습니다.”

칸은 자동차제조업체 플렉스-N-게이트(Flex-NGate)에 엔지니어링 매니저로 취직했다. 몇 년 후에는 저축한 돈 1만6000달러와 중소기업청에서 대출받는 자금으로 완성차업체에 범퍼를 공급하는 기업을 창업했다. 그리고 전 직장이었던 플렉스-N-게이트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칸의 회사는 미국시장에서 매출 61억 달러를 기록하며 1만2000여 명의 종업원을 두고 있다.
 전세계 젊은 창업가들을 끌어들이는 교육시스템
칸이 현재 디트로이트에 건설 중인 공장은 주당 25달러의 시급에 최고 1000명의 직원을 고용할 예정이다. 칸의 자산은 69억 달러로 추정된다.

사소한 의미에서나마 칸은 영국 이민자이기도 하다. 영국 풀햄 축구팀의 구단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제2의 조국은 미국이라는 점에 대해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도록, 미국의 억만장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바로 NFL 풋볼팀으로, 칸은 잭슨빅 재규어스의 구단주이다.

이토록 많은 이민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억만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만이 가진 또다른 장점에 기인한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교육시스템은 전세계에서 가장 명석하고 야심에 가득 찬 젊은 창업가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에 비견되어왔다.

지난 수십년 동안 억만장자가 되기 위한 성공 공식은 점점 간결해졌다. 미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와서, 미국과 미국이 제공하는 기회 (그리고 장래 배우자)를 사랑하게 되고, 졸업 후 미국에 체류하며 미국에서 받은 교육을 활용해 혁신을 (그리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포브스 400대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2000년과 2014년 사이 미국에서 학부과정을 수료한 이민자의 수는 78% 증가했다. 이민자정책연구소(Migrant Policy)에 따르면 25세 이상의 이민자 중 30%가 학사 혹은 그 이상의 학위를 소지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 출생 성인인구에서 볼 수 있는 수치에 거의 맞먹는다. 그리고 이들 이민자 중 압도적으로 많은 수가 현대사회에서 부를 창출하는 원동력인 수학, 과학 혹은 기타 이공계를 전공한다. 2011년 특허출원기준 미국 상위 10개 대학에서 창출한 특허 중 4분의 3이 이민자의 손에서 탄생했다.

로메시 와드와니(Romesh Wadhwani)는 위와 같은 공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인도의 전설적인 인도공과 대학을 다녔으나, 1969년 도미해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하는 대신, 와드와니는 소프트웨어 기업 애스펙트 디벨롭먼트(Aspect Development)와 기술산업에 주력하는 사모투자전문기업 심포니 테크놀로지 그룹(Symphony Technology Group)을 창업해 30억 달러에 이르는 부를 축적했다.

“당시 인도에 있었더라면 창업을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을 겁니다. 창업가를 위한 지원이 되지 않았지요.” 와드와니의 말이다. “미국에서는 원대한 꿈을 꿀 수 있는 자유, 혈연이나 기존의 부 혹은 사회적 지원보다 순수하게 개인의 능력을 기반으로 성공을 일굴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중국 출생의 앤드류 청(Andrew Cherng)도 1966년 수학과 장학생으로 베이커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캔자스주 볼드윈에 정착하면서 미국사회의 능력주의를 목도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청은 “중국인이 일본인과 어울려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년 후, 페기(Peggy)라는 이름의 미얀마 출신 신입생을 만났고, 이후 둘은 결혼했다. “미국에 왔을 때, 제가 갖고 있던 소지품은 거의 없었습니다.” 청의 말이다. “저를 성공으로 이끈 힘은 가난이었습니다.”

1973년 청은 고국에서 수석주방장으로 일하다 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온 아버지와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판다 인(Panda Inn)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을 열었다. 10년 후에는 아내와 함께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 있는 한 쇼핑몰에 판다 익스프레스(Panda Express) 1호점을 열었다.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항공우주 소프트웨어개발 엔지니어로 일했던 아내 페기가 도입한 시스템 덕분에 판다 익스프레스는 오늘날 1900개 매장에서 24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며 미국 최대 규모로 손꼽히는 패스드푸드식 중국요리 체인으로 탈바꿈했다. 부부는 3만 명의 직원을 고용하며, 1억 달러가 넘는 사회공헌기금을 모았다. “미국에서는 스스로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여러분의 앞길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청의 말이다.

더글라스 리온(Douglas Leone) 역시 미국 유학이 삶의 전환점으로 작용한 사례이다. 1968년 이탈리아를 떠나올 때, 리온은 중학생이었다. 리온의 부모는 아들이 “유럽에서는 가능하지 않는, 사회계층의 상향이동”이 가능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코넬 대학에 입학한 리온은 컬럼비아와 MIT 대학원으로 진학했고 말했다.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저는 교육이라는 수단을 통해 무언가 해낼 수 있는 지위로 올라섰습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와 휴렛패커드 등의 기업에서 세일즈 직원으로 일하던 리온은 1988년 벤처자본기업인 세쿼이아 캐피털에 입사했다. 1996년 매니징 파트너 자리에 올랐고, 리온의 재직기간 동안 세쿼이아 캐피털은 구글, 유튜브, 자포스, 링크드인 그리고 왓츠앱 등의 기업에 투자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일조했다. “세쿼이아 캐피털이 투자한 기업들이 창출한 일자리가 100만 개 이상이냐 혹은 이하냐 중 어느 쪽인지 골라야 한다면, 저는 이상이라는 데 판돈을 걸겠습니다.” 리온의 말이다.
 미국 유학이 삶의 전환점으로 작용한 사례 많아
리온의 현재 자산은 27억 달러로 추정된다. 리온은 자신이 이민자로 경험했던 것들이 매우 유용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이민자라는 사실은 원동력이 되며, 이같은 원동력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날까지도 이같은 원동력을 느낍니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제가 절대 물려줄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바로 자포자기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말하지요.” 하루아침에 성공한 사람이나 할 법한 말이다.

하지만 42명의 이민자 부자 이외에도, 포브스 400대 부자 명단에는 2세대 이민자가 57명 포함되어 전체의 14%를 차지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18세 이상 시민 중 2세대 이민자의 비율이 6%라는 사실과 비교해보라). 이는 미국의 억만장자 계층이 귀족혈통일 것이라는 편견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이같은 창업가의 헝그리 정신은 적어도 1세대 동안은 지속되는 듯 하다. 유대인인 샘 젤(Sam Zell)의 부모는 세계 2차대전 당시 독일 침공 전 폴란드를 떠나 미국으로 왔다. “아버지는 미국에 가면 길거리가 금으로 뒤덮여 있다고 말씀하시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가족이 미국으로 와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사는 행운을 누리는 것에 대해 한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셨지요.” 사모투자와 부동산 투자로 47억 달러의 자산을 축적한 샘 젤이 말했다. “부모님은 정말 열심히 일하셨고 애국심이 투철한 분이셨습니다. 이같은 정신을 분명 저희에게도 불어넣으셨지요.”
 대선 기간 이민자·난민 때리기는 미국의 전통
대선기간 펼쳐지는 이른바 이민자와 난민 ‘때리기’는 미국의 오랜 전통이다. 이민자와 난민을 일자리를 훔쳐가는 범죄자로 바라보는 이같은 시각은 새로운 이민자층이 등장하며 그 표적만 바뀌었을 뿐이다. 독일 이민자는 아일랜드 이민자에게, 아시아계는 아랍계에, 그리고 천주교는 유태인에 그 바통을 넘겨주었다. 요즈음 표적이 되는 것은 히스패닉과 이슬람 이민자이다. “수년간 우리는 다양한 사이클을 거쳐왔습니다.” 이민법을 전문으로 하는 템플 대학교의 교수 피터 스피로(Peter Spiro)의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이같은 사이클을 벗어난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또다른 의미있는 사실은 이 열띤 공방전 속에서도,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이 단연코 이민자에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는 데 있다. 2016년 퓨리서치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민자가 “근면함과 재능으로 미국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고 믿는 미국인이 전체의 59%를 차지했다(이민자를 “미국의 짐”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전체의 33%였다). 이민자의 유입으로 비숙련 노동자가 직면하는 임금하락 압력이 뛰어난 이민자들이 창출하는 경제성장과 일자리로 상쇄되고도 남는다는 것이 많은 미국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논리인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역동성도 도전에 직면할 지 모른다. 미국정부는 H-1B로 널리 알려진, 전문직 비자 요건을 강화해왔다. 전문직 비자에 대한 수요가 법으로 규정된 할당치를 넘어서고 있지만, 2004년 이래로 관련 비자 및 쿼터 상한선을 그대로 유지해오고 있다. 사실 2014년 이후 매년 이같은 비자 쿼터는 신청접수를 개시한 이후 5일 만에 모두 마감되는 실정이다. 글로벌화된 경제체제하에서 갓 졸업한 대학생 상당수가 고국으로 돌아가 더 많은 기회(혹은 적어도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노릴 수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 결과,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명석한 인재를 점점 더 강력한 힘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들 인재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고, 그 다음에는 이들 인재가 원하는 바와는 반대로 졸업하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내몰아 자국에서 미국과 경쟁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피터피, 칸, 와드와니, 그리고 청을 포함한 포브스 400대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린 이민자들에게 물어보라. 다들 배경은 다르지만, 크게 세 개의 원칙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첫째, 성취동기가 강력한 고학력 이민자들이 미국에 오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격을 갖춘 투자자로부터 10만 달러의 자금을 모아 ‘스타트업’ 비자를 발급함으로써 이민 창업가들이 보다 쉽게 미국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지지했으나, 이 법안은 양당이 대립하는 가운데 의회에서 계류 중이다. 최근 국토안보부가 발표한 차선 책격의 법안은 국회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미국의 창업기업에 소유지 분을 갖고 있고 ‘능동적이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이민자에게 임시로 비자를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둘째, 불법 이민자에 대해서는 국경단속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셋째, 이미 미국에 거주하는 불법이민자가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야 하며, 여기에는 등록, 납세 그리고 준법 등의 의무가 포함된다.

어쩌면 이를 통해 아메리칸드림의 정신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 어느 정도 합의가 도출될 지 모른다. 이민자가 꿈꾸는 또다른 10억 달러짜리의 혁신으로 판명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MONTE BURKE 포브스 기자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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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박스기사] 비자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다
미국의 이민제도가 인스타그램을 고사시킬 뻔 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2009년, 브라질 유학생으로 스탠포드를 졸업하고 인스타그램의 제품 및 비전을 탄생시킨 공동창업자 마이크 크리거(Mike Krieger)는 취업비자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좌절한 나머지 고국 브라질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러나 막판에 비자서류가 통과되면서, 크리거와 또다른 공동창업자이자 인스타그램의 최고경영자인 케빈 시스트롬(Kevin Systrom)은 인스타그램을 론칭해 5억 명의 사용자와 최고 500억 달러에 이르는 기업가치를 기록하는 거대 소셜미디어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인스타그램은 수백 명의 미국인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했다.

창업가로 시작해 투자자로 변모한 니틴 파치시아(Nitin Pachisia)와 마난 메타(Manan Mehta)는 이민자가 창업한 기업이 비자 취득 문제로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둘이 2년 전 설립한 언섀클드 벤처스(Unshackled Ventures)는 초기단계의 벤처자금 및 멘토링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외국에서 출생해 미국에서 활동하는 많은 창업가들이 직면하는 비자문제를 해결해준다. 지분을 취득하는 댓가로 현금을 제공하고 더 나아가 창업자를 위한 고용주 및 비자 스폰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같은 아이디어는 하이테크 업계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섀클드는 로렌 파웰 잡스 및 제리 양과 같은 유명 투자자 80여 명 및 블룸버그의 벤처 사업부로부터 500만 달러의 자금을 투자받았다. 현재 이보다 더 큰 규모의 펀딩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민자를 둘러싼 국가적 담론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가운데, 언섀클드의 사업모델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담론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기회로 가는 길의 장애물을 없애고, 고도의 지적자본에 투자하고, 우리 모두에게 편익을 제공할 혁신을 촉진시키는 담론 말입니다.” 로렌 파웰 잡스가 이메일을 통해 한 말이다. “언섀클드는 이민자가 바로 잠재력을 대변하고 있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비자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선 것은 언섀클드 뿐만이 아니다. 지난 8월 오바마 대통령은 민간 투자자로부터 최소 34만5000달러의 투자액을 확보한 이민 창업가에게 임시 취업비자를 부여하자는 새로운 규정을 제안했다. 이같은 계획은 이민 창업가에게 비자를 발급해주기 위한 ‘스타트업 비자’ 법안의 차선책이었다. 스타트업 비자 법안은 기술업계의 열렬한 지원을 등에 업고 백악관 역시 수용한 아이디어였지만, 의회에서 통과는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이같은 제안은 언섀클드의 창업가들이 보다 쉽게 비자를 취득하고, 메타와 파치시아가 멘토 및 기업육성가로서의 역할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미국은 최고의 인재를 지속적으로 유인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으며, 이들 인재에게 미국에 머물러야 할 이유를 제공해야 합니다.” 메타는 기술업계에서는 복음처럼 퍼지고 있는 메시지를 재차 강조한다.

- MIGUEL HELFT 포브스 기자
 이민자 부자의 출신 국가
올해 포브스 400대 부자 중 10% 이상이 부를 구축하고자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으며, 최초의 이민자는 1949년까지 시간을 거슬러올라간다. 이 중 이스라엘이 가장 많은 6명을 차지하며, 그 다음이 인도로 5명이다. 베트남을 포함한 나머지 8개 국가는 각각 1명의 부자를 배출했다.



러시아 세르게이 브린 1979, 이고르 올레니코프 1957



중국 앤드류 청 & 페기 청 1966,1967,존 투 1971, 로저 왕 1970



호주 루퍼트 머독 1985



대만 젠슨 황 1973 민 카오 1970년대, 데이비드 선 1977 제리 양 1978



베트남 끼에우 호왕 1975



한국 장도원 & 장진숙 1981



아르헨티나 호르헤 페레즈 1960년대



이스라엘 미키 에리슨 1950년대, 알렉 고레스 1968, 톰 고레스 1968, 노암 고츠만 1960년대, 아이작 펄뮤터 1960년대,하임 사반 1983



케냐, 인도 바랏 데사이 & 니르자 세티 1976, 1978



남아프리카공화국 엘론 머스크 1990년대,패트릭 순시옹 1980



인도 라케시 강왈 1970년대,존 카포르 1964,램 시리램 1970년대,로메시 와드와니 1969



파키스탄 사히드 칸 1967



영국 마이클 모리츠 1976



프랑스 피에르 오미다이어 1973



이탈리아 더글라스 리온 1968



우크라이나 렌 블라밧닉 1978, 얀 쿰 1992



그리스 존 캐치마티디스 1949,딘 메트로파울로스 1956



독일 다그마르 돌비 1976, 피터 틸 1968



헝가리 토마스 피터피 1965, 찰스 시모니 1987,조지 소로스 1956,스티븐 우드바르-헤이지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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