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듀퐁 클래식에 새긴 그의 스토리(7) 동양인 최초의 플로리스트 방식 회장
S.T.듀퐁 클래식에 새긴 그의 스토리(7) 동양인 최초의 플로리스트 방식 회장
동양인 최초의 플로리스트 방식(71) 회장. 88서울올림픽을 시작으로 독일 총리관저, 청와대, 정상회담, 주요 시상식, 백화점, 그룹 회장실엔 언제나 방 회장의 꽃이 놓여 있었다. 서울 성북동에 자리한 방식꽃예술원 테라스에서 방 회장과 송길영 부사장이 만났다. 송길영 부사장이 20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전하자 방식꽃예술원 회장은 “그럼 잠시 춤을 좀 추겠다”라며 예술원 3층으로 올라갔다. 그를 따라 올라가는 통로의 벽에는 그림 몇 점이 걸려 있었다. 그는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예술원 2층엔 방식 회장이 모은 특별한 드라이 플라워가 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른 벽면에도 그와 관련한 사진 기록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작은 박물관에 온 듯해 물었더니 방식 회장은 쿨한 표정으로 “잘 남기고 잘 넘겨 주는 게 내가 할 일 아니겠나!”고 했다. 알고보니 예술원을 일반인과 관광객들을 맞이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단장 중이었다.
때마침 송길영 부사장이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사진 촬영도 할 겸 두 사람이 예술원을 한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걸음을 걷던 두사람이 한 순간, 2층 방 회장의 젊은 시절 활동상이 담긴 사진 앞에 멈추고 마주 섰다. 방 회장은 “이런 이야긴 저녁에 소주 한잔 하면서 해야 하는데…”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옛날 이야기를 꺼내면 마음이 아프다”며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가 플로리스트의 길로 들어서게된 운명적인 스토리였다.
“군대를 가기 전 사귄 여자친구가 간호대생이었는데 당시 돈을 벌기 위해 독일로 갔어요. 3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독일로 갔더니 그녀에겐 이미 약혼자가 있더군요. 16개월 동안 광부로 일해서 독일로 오기 위해 빌린 비행기 티켓값을 갚았죠. 그 뒤에 독일 본에 있는 성당에서 우연히 조경사로 일하게 됐어요. 거기서 독일 조경 연합회장인 칼라이를 만났고 그의 집에서 10여 년을 보내며 독일의 조경과 꽃꽂이를 배운 겁니다. 그의 집에 있으면서 독일에서 작은 꽃집을 운영했는데 꽤 잘됐어요. 그러다 33살에 동양인 최초의 플로리스트로 한국에 돌아왔죠. 명동에 위치한 상업전수학교 교실을 빌려 꽃꽂이를 가르치고 근처에서 꽃집을 운영했지요. 어느날 신격호 당시 롯데백화점 사장(현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꽃집에 들렀고 그게 인연이 돼 롯데백화점 1층에서 꽃가게를 운영하게 됐어요. 유명해 진거죠. 그렇게 갤러리아백화점을 시작으로 방송사, 호텔 등에 꽃 장식을 계속 추가하면서 내 이름이 알려지게 됐지요.”
송길영(이하 송): 언제부터 꽃에 대한 관심이 있었나요?
방식(이하 방): 중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커서 뭘 할거냐?”고 묻길래 “그림 그리며 꽃 키우고 살겠다”고 했어요. 선생님은 “그게 무슨 꿈이냐”고 하셨지만 지금 그렇게 살고 있어요. 당시 그런 이야기를 했던 이유가 어릴 적 우리 옆집엔 남농(허건) 선생이 살았고 우리 아랫집엔 국악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국악 명인이 된 조상현, 신영희씨가 있었죠. 그리고 우리집 작은방엔 서커스 단원들이 세들어 살았어요. 늘 듣고 보는 게 그림과 음악, 춤이었죠. 그러니 지금도 전 그림 그리고 춤도 추고 소리를 합니다.
송: 그렇게 모여 살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방: 당시는 산 밑에 살아야 폭격에도 살아남는다고 다들 산 밑에 모여 살았어요.
송: 독일 유학 이야기는 앞서 들었고요. 플로리스트가 직업과 취미 사이에서 쉽진 않은 것 같아요.
방: 맞아요. 독일처럼 나라에서 관리하는 게 아니다 보니 직업으로서 경쟁력을 가지기 쉽지 않긴 합니다. 하고자 했던 사람 중에 10% 정도만이 자기 길을 계속 이어가는 것 같아요. 독일에 가면 플로리스트뿐만 아니라 음악, 무용전공자 출신의 가이드가 참 많습니다. 고급 방랑자죠.
송: 대학생들이 스펙을 만들어 입사하는데 사용하고는 직장에 들어가선 대부분 그 스펙을 활용할 기회가 없거나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하죠.
방: 우리나라 예술계에서 대가들이 잘 안 나오는 이유가 그겁니다. 입력하고 따라 해요. 자기만의 콘텐트가 없어요.
송: 소위 인터넷과 연결되지 않았을 때의 지식이 자기 것이죠. 저는 전산학과 출신인데 시험 볼 때면 교수님이 컴퓨터가 아닌 백지를 주고 답을 쓰라고 하셨어요. ‘진짜 네 것만 써라’는 의미죠.
송: 독일에서 배운 걸 한국에서 펼치긴 어땠습니까?
방: 우리나라는 독일보다 조경, 꽃이 발달하기 참 좋은 조건이에요. 우리나라는 거리문화가 발달했잖아요. 독일은 소위 돈이 안 되는 나무는 잘라버립니다.
송: 거리의 나무도 합리적으로 관리하는군요.
방: 하지만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이잖아요. 게다가 나무도 함부로 자르지 않죠. 당산나무는 신이 깃든 나무라고 안 자르고요.
송: 예술원 조경이 대게 우리나라 조경과는 다른 것 같아요. 잔디에 예쁜 수목이 있는 풍경이 일반적인 조경 아닌가요.
방: 잔디밭 위의 예쁜 수목. 그건 인위적인, 군국주의의 산물이죠. 어지럽고 무질서 해 보이지만 상당히 관리가 잘 된 조경입니다.
송: 획일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시는 거죠?
방: 그럼요. 우리나라 조경이나 꽃꽂이가 독일만큼 아니 그보다 우수한 이유가 바로 우리 민족의 자유분방함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획일화, 규격화되면 덜 아름다워요. 얼마 전 모 신문에서 우리나라 관광산업이 발달하려면 음식이 규격화 돼야 한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저는 반대입니다. 어딜 가든 새롭고 다양하고 자유로와야죠.
송: 우리나라 꽃꽂이 시장과 관련 학문은 회장이 만드신 겁니까?
방: 전승은 인습이고 답습입니다. 저는 형식과 기초를 만들어 줄 뿐이고 나머지는 그들 나름의 예술성을 추가하는 거죠. 불러주기 위한 꽃이 돼야 하니까요.
송: 자신만의 영역을 일부러 개척하신 건가요?
방: 경쟁을 힘들어 하는 편입니다. 그냥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일부러 찾았어요. 조경사 자격증도 있지만 독일에서 귀국했을 땐 이미 조경사들이 국내에서 어느 정도 활동하고 있길래 그 일은 하지 않고 꽃꽂이 일을 한 겁니다.
송: 방식이란 이름이 브랜드가 됐습니다.
방: 내 이름 때문에 꽃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난 오히려 아는 사람이 내 꽃을 사는 걸 탐탁치 않아 합니다. 꽃의 가치가 훼손되니까요. 제게 중요한 건 농민들입니다.
송: 왜죠?
방: 요즘 조화를 많이 사용하는데…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말이죠. 최소한 전 플로리스트로 농민들에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현실은 농민이 아닌 상인에 보탬이 되니 마음이 아파요. 화훼가 안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20만원짜리 부케를 3만원에 하청을 줍니다. 결국 나 아닌 남을 위해 꽃을 사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봐요. 자신을 위해 꽃을 사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꽃을 얼마나 조화롭게 구성하는지, 상품에 관심을 가질 텐데 지금은 꽃을 보내고 꽃을 주는 데 의미를 두잖아요. 그러니 농민이 아닌 중간의 상인들이 이득을 봅니다. 전 그냥 1000원짜리 꽃 한송이라도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송: 30년 넘게 플로리스트 일을 하셨으니 제자들도 상당수겠네요.
방: 플로리스트는 600명, 여기서 수료하고 독일에 가서 상공부가 주는 마이스터 자격증을 취득한 제자가 100여 명 될 겁니다. 신라, 조선, 하얏트 호텔 꽃장식을 담당하고 공항이나 백화점에서도 다들 일하고 있어요.
부사장이 갑자기 “덕후를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방 회장이 “모른다”고 답했다. “한가지에 몰두하는 사람을 뜻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바로 덕후로 성공하는 사람이다. 회장님은 젊은이들 표현대로라면 성공한 덕후라는 뜻의 ‘성덕’입니다.” 그 말에 방 회장이 웃었다.
송: 플로리스트가 되기 위한 과정이 쉽진 않죠. 합리적인 보상체계가 갖춰져야 하지 않을까요?
방: 상추 뜯어다가 그냥 팔면 단속하지 않죠. 가락동 꽃 시장도 일부 경매고 시장 앞은 대부분 소매예요. 그것도 꽃가게 하는 사람 같으면 500원 깍아 주는 식이죠. 이렇게 해선 안됩니다. 국가가 나서서 라이선스에 기반한 업으로 인정해 줘야 합니다.
송: 꽃은 순간 아닌가요? 잠시 자연을 가져와 보는 건데 허무하지 않습니까?
방: 그렇게 따지면 오페라는 1시간이잖아요. 꽃은 두고 보면 3일은 갑니다. 그리고 식물은 모든 뿌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자랍니다. 살아야 되는 운명도 타고나죠. 마찬가지로 잘라야 사는 나무도 있어요. 최대한 그런 가지를 사용합니다.
송: 경쟁을 왜 싫어하십니까?
방: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도 하지 않는 건 내가 기준을 만들고 내가 하면 돼요. (웃음)
송: 처음으로 돌아가서. 꽃을 만지며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방: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꼭 파주 농장에 갑니다. 거기서 하는 일은 풀을 뽑는 거예요. 약을 뿌려서 잡초를 죽일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아요. 잡초를 뽑으면 함께 꽃과 나무의 생리를 경험하니까요. 마음이 꽃이 돼야 삽니다. 더 정확히는 마음이 꽃이 되는 삶을 살면 좋겠어요.
- 대담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진행 유부혁 기자 yoo.boohy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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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송길영 부사장이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사진 촬영도 할 겸 두 사람이 예술원을 한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걸음을 걷던 두사람이 한 순간, 2층 방 회장의 젊은 시절 활동상이 담긴 사진 앞에 멈추고 마주 섰다. 방 회장은 “이런 이야긴 저녁에 소주 한잔 하면서 해야 하는데…”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옛날 이야기를 꺼내면 마음이 아프다”며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가 플로리스트의 길로 들어서게된 운명적인 스토리였다.
“군대를 가기 전 사귄 여자친구가 간호대생이었는데 당시 돈을 벌기 위해 독일로 갔어요. 3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독일로 갔더니 그녀에겐 이미 약혼자가 있더군요. 16개월 동안 광부로 일해서 독일로 오기 위해 빌린 비행기 티켓값을 갚았죠. 그 뒤에 독일 본에 있는 성당에서 우연히 조경사로 일하게 됐어요. 거기서 독일 조경 연합회장인 칼라이를 만났고 그의 집에서 10여 년을 보내며 독일의 조경과 꽃꽂이를 배운 겁니다. 그의 집에 있으면서 독일에서 작은 꽃집을 운영했는데 꽤 잘됐어요. 그러다 33살에 동양인 최초의 플로리스트로 한국에 돌아왔죠. 명동에 위치한 상업전수학교 교실을 빌려 꽃꽂이를 가르치고 근처에서 꽃집을 운영했지요. 어느날 신격호 당시 롯데백화점 사장(현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꽃집에 들렀고 그게 인연이 돼 롯데백화점 1층에서 꽃가게를 운영하게 됐어요. 유명해 진거죠. 그렇게 갤러리아백화점을 시작으로 방송사, 호텔 등에 꽃 장식을 계속 추가하면서 내 이름이 알려지게 됐지요.”
어릴 적부터 그림과 음악, 춤에 익숙해
송길영(이하 송): 언제부터 꽃에 대한 관심이 있었나요?
방식(이하 방): 중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커서 뭘 할거냐?”고 묻길래 “그림 그리며 꽃 키우고 살겠다”고 했어요. 선생님은 “그게 무슨 꿈이냐”고 하셨지만 지금 그렇게 살고 있어요. 당시 그런 이야기를 했던 이유가 어릴 적 우리 옆집엔 남농(허건) 선생이 살았고 우리 아랫집엔 국악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국악 명인이 된 조상현, 신영희씨가 있었죠. 그리고 우리집 작은방엔 서커스 단원들이 세들어 살았어요. 늘 듣고 보는 게 그림과 음악, 춤이었죠. 그러니 지금도 전 그림 그리고 춤도 추고 소리를 합니다.
송: 그렇게 모여 살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방: 당시는 산 밑에 살아야 폭격에도 살아남는다고 다들 산 밑에 모여 살았어요.
송: 독일 유학 이야기는 앞서 들었고요. 플로리스트가 직업과 취미 사이에서 쉽진 않은 것 같아요.
방: 맞아요. 독일처럼 나라에서 관리하는 게 아니다 보니 직업으로서 경쟁력을 가지기 쉽지 않긴 합니다. 하고자 했던 사람 중에 10% 정도만이 자기 길을 계속 이어가는 것 같아요. 독일에 가면 플로리스트뿐만 아니라 음악, 무용전공자 출신의 가이드가 참 많습니다. 고급 방랑자죠.
송: 대학생들이 스펙을 만들어 입사하는데 사용하고는 직장에 들어가선 대부분 그 스펙을 활용할 기회가 없거나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하죠.
방: 우리나라 예술계에서 대가들이 잘 안 나오는 이유가 그겁니다. 입력하고 따라 해요. 자기만의 콘텐트가 없어요.
송: 소위 인터넷과 연결되지 않았을 때의 지식이 자기 것이죠. 저는 전산학과 출신인데 시험 볼 때면 교수님이 컴퓨터가 아닌 백지를 주고 답을 쓰라고 하셨어요. ‘진짜 네 것만 써라’는 의미죠.
송: 독일에서 배운 걸 한국에서 펼치긴 어땠습니까?
방: 우리나라는 독일보다 조경, 꽃이 발달하기 참 좋은 조건이에요. 우리나라는 거리문화가 발달했잖아요. 독일은 소위 돈이 안 되는 나무는 잘라버립니다.
송: 거리의 나무도 합리적으로 관리하는군요.
방: 하지만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이잖아요. 게다가 나무도 함부로 자르지 않죠. 당산나무는 신이 깃든 나무라고 안 자르고요.
송: 예술원 조경이 대게 우리나라 조경과는 다른 것 같아요. 잔디에 예쁜 수목이 있는 풍경이 일반적인 조경 아닌가요.
방: 잔디밭 위의 예쁜 수목. 그건 인위적인, 군국주의의 산물이죠. 어지럽고 무질서 해 보이지만 상당히 관리가 잘 된 조경입니다.
송: 획일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시는 거죠?
방: 그럼요. 우리나라 조경이나 꽃꽂이가 독일만큼 아니 그보다 우수한 이유가 바로 우리 민족의 자유분방함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획일화, 규격화되면 덜 아름다워요. 얼마 전 모 신문에서 우리나라 관광산업이 발달하려면 음식이 규격화 돼야 한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저는 반대입니다. 어딜 가든 새롭고 다양하고 자유로와야죠.
송: 우리나라 꽃꽂이 시장과 관련 학문은 회장이 만드신 겁니까?
방: 전승은 인습이고 답습입니다. 저는 형식과 기초를 만들어 줄 뿐이고 나머지는 그들 나름의 예술성을 추가하는 거죠. 불러주기 위한 꽃이 돼야 하니까요.
송: 자신만의 영역을 일부러 개척하신 건가요?
방: 경쟁을 힘들어 하는 편입니다. 그냥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일부러 찾았어요. 조경사 자격증도 있지만 독일에서 귀국했을 땐 이미 조경사들이 국내에서 어느 정도 활동하고 있길래 그 일은 하지 않고 꽃꽂이 일을 한 겁니다.
자신을 위해 꽃을 사야한다
송: 방식이란 이름이 브랜드가 됐습니다.
방: 내 이름 때문에 꽃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난 오히려 아는 사람이 내 꽃을 사는 걸 탐탁치 않아 합니다. 꽃의 가치가 훼손되니까요. 제게 중요한 건 농민들입니다.
송: 왜죠?
방: 요즘 조화를 많이 사용하는데…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말이죠. 최소한 전 플로리스트로 농민들에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현실은 농민이 아닌 상인에 보탬이 되니 마음이 아파요. 화훼가 안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20만원짜리 부케를 3만원에 하청을 줍니다. 결국 나 아닌 남을 위해 꽃을 사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봐요. 자신을 위해 꽃을 사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꽃을 얼마나 조화롭게 구성하는지, 상품에 관심을 가질 텐데 지금은 꽃을 보내고 꽃을 주는 데 의미를 두잖아요. 그러니 농민이 아닌 중간의 상인들이 이득을 봅니다. 전 그냥 1000원짜리 꽃 한송이라도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송: 30년 넘게 플로리스트 일을 하셨으니 제자들도 상당수겠네요.
방: 플로리스트는 600명, 여기서 수료하고 독일에 가서 상공부가 주는 마이스터 자격증을 취득한 제자가 100여 명 될 겁니다. 신라, 조선, 하얏트 호텔 꽃장식을 담당하고 공항이나 백화점에서도 다들 일하고 있어요.
부사장이 갑자기 “덕후를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방 회장이 “모른다”고 답했다. “한가지에 몰두하는 사람을 뜻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바로 덕후로 성공하는 사람이다. 회장님은 젊은이들 표현대로라면 성공한 덕후라는 뜻의 ‘성덕’입니다.” 그 말에 방 회장이 웃었다.
방식은 ‘성덕(성공한 덕후)’이다
송: 플로리스트가 되기 위한 과정이 쉽진 않죠. 합리적인 보상체계가 갖춰져야 하지 않을까요?
방: 상추 뜯어다가 그냥 팔면 단속하지 않죠. 가락동 꽃 시장도 일부 경매고 시장 앞은 대부분 소매예요. 그것도 꽃가게 하는 사람 같으면 500원 깍아 주는 식이죠. 이렇게 해선 안됩니다. 국가가 나서서 라이선스에 기반한 업으로 인정해 줘야 합니다.
송: 꽃은 순간 아닌가요? 잠시 자연을 가져와 보는 건데 허무하지 않습니까?
방: 그렇게 따지면 오페라는 1시간이잖아요. 꽃은 두고 보면 3일은 갑니다. 그리고 식물은 모든 뿌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자랍니다. 살아야 되는 운명도 타고나죠. 마찬가지로 잘라야 사는 나무도 있어요. 최대한 그런 가지를 사용합니다.
송: 경쟁을 왜 싫어하십니까?
방: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도 하지 않는 건 내가 기준을 만들고 내가 하면 돼요. (웃음)
송: 처음으로 돌아가서. 꽃을 만지며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방: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꼭 파주 농장에 갑니다. 거기서 하는 일은 풀을 뽑는 거예요. 약을 뿌려서 잡초를 죽일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아요. 잡초를 뽑으면 함께 꽃과 나무의 생리를 경험하니까요. 마음이 꽃이 돼야 삽니다. 더 정확히는 마음이 꽃이 되는 삶을 살면 좋겠어요.
- 대담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진행 유부혁 기자 yoo.boohy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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