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드 파머가 현대 골프에 남긴 10가지] 골퍼로, 사업가로 뚜렷한 발자취
[아놀드 파머가 현대 골프에 남긴 10가지] 골퍼로, 사업가로 뚜렷한 발자취
아멘 코너, 아니의 군대, 4색 우산... 최고의 성적 내지 못했어도 최고의 사랑 받아 아멘 코너, 아니의 군대(Arnie’s Army), 노랑과 초록·빨강·흰색의 4색 우산, TV시대 수퍼스타, 왕(the king)으로 불린 사내…. 지난 9월 25일 87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어간 아놀드 파머(1929~2016)는 현대 골프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그가 가져온 골프시장의 확대와 골프를 보는 시각의 변화, 그의 골프 철학을 소개한다. 아놀드 파머는 마스터스에서 1958년에 드라마틱한 첫 승을 올렸다. 대회 3라운드 후 비가 많이 내려 코스는 질척거렸고, 경기위원회는 볼이 땅에 박히면 무벌타 드롭을 하기로 정했다. 이튿날 파머가 파3 12번 홀에서 한 티샷이 그린 위 언덕의 흙에 박혔다. 파머는 거기서 볼을 드롭하고 벌타를 더해 5타를 적어야 했다. 파머는 선두인 켄 벤추리를 한 타차로 추격하는 상황이 됐다. 475야드인 파5의 13번 홀에서 티샷을 길게 보낸 파머는 고민에 빠졌다. 개울에 못 미쳐 레이업을 할까? 하지만 파머는 3번 우드로 낮게 날아가는 드로우 샷을 시도했고, 볼은 홀 5.4m 지점에 멈추면서 이글을 잡아냈다.
그 기세를 이어 플레이를 마쳤다. 15번 홀에 이르렀을 때 12번 홀에서 드롭한 볼이 무벌타로 인정받자 파머는 부지불식 간에 ‘아멘'을 외쳤다. 파머는 12번 홀에서 파를 잡은 것으로 되었고, 당시 허버트 워런 윈드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 기자는 그 내용을 쓰면서 11~13번 홀을 ‘아멘 코너’로 처음 이름 붙였다. 파머 이전까지 골프 선수와 팬과 대회와 업체는 별개였다. 하지만 파머 덕에 스타를 잘 활용하면 스포츠가 더 재미있고 흥행이 된다는 게 입증이 됐다. 그러면서 선수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정착됐다. 1960년에 마크 맥코맥이라는 클리블랜드 출신 변호사가 파머의 스타성을 포착했다. 그리고 계약서 대신 악수로 맺은 계약은 평생 이어졌다. 맥코맥은 IMG라는 스포츠마케팅 회사를 설립한다. 맥코맥은 아놀드 파머를 마치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 트루먼처럼 만든다.
인간적이고 믿음직하며 솔직한 옆집 남자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다. 이후 파머는 캐딜락, 롤렉스, 심지어 전립선암 예방 광고에도 출연했다. 아이스티와 레모네이드를 섞은 음료수 ‘아놀드파머’까지 나와 미국에서 연 3억 캔 이상 팔린다. 맥코맥은 이후 파머와 함께 잭 니클라우스, 게리 플레이어까지 묶어 이른바 ‘빅3’로 만드는 스타 마케팅까지 성공시켰다. 오늘날 중동·아시아에서 신규 골프 대회를 개최하려면 IMG 등의 선수들을 보유한 매니지먼트사를 통해야 하는 구조가 형성됐다. 아놀드 파머의 팬클럽 ‘아니의 군대(Arnie’s Army)’가 만들어진 건 사연이 있다. 마스터스에서 고든 캠프(지금은 포트 고든)의 군인들이 그를 응원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 군대의 시작이다. 파머는 1959년에 마스터스에 디펜딩 챔피언으로 출전했다.
당시 오거스타내셔널 회장이던 클리포드 로버츠는 골프장 근처 고든 캠프에서 근무하던 군인들을 데려다 스코어보드를 적게 하는 등 부족한 일손을 메웠다. 당시에는 누구도 마스터스가 그렇게 커질지 몰랐다. 입장료는 5달러였고, 초등학교 교사가 입장권을 박스째 들고서 홍보할 정도였다. 로버츠는 대회가 TV에 중계되는 것을 감안하고, 군인이 제복만 입으면 공짜로 입장시켰다. TV에 갤러리가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공짜로 대회장에 들어온 군인들은 골프를 잘 몰랐다. 그래서 가장 잘한다는 선수를 따라다닌 것이 디펜딩 챔피언이던 파머였다. 물론 파머 역시 해안경비대 근무를 했었고, 경기를 호쾌하게 풀어나가는 스타일이어서 군인들과 빠르게 교감할 수 있었다. 파머는 58년 우승을 시작으로 마스터스에서 2년 간격으로 64년까지 4번 우승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경기를 따라다니는 군인들이 늘어났다. 조니 핸드릭스 오거스타크로니클 기자가 ‘아니의 군대’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1960년 6월 18일 덴버의 체리힐스 골프장에서 열린 US오픈 마지막 날이 아놀드 파머를 수퍼스타로 만든 대회였다. 파머는 그 해 4월에 마스터스에서 우승했다. 마지막 두 홀에서 버디를 하며 그린재킷을 쟁취했다. 당시에 하루 36홀을 치르는 US오픈의 마지막 날 전반 18홀을 마친 그는 선두인 마이크 수책에게 7타 뒤진 15위였다. 이전까지 후반 18홀 라운드에서 5타 이상의 격차를 뒤집은 사례는 없었다. 하지만 파머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65타를 치면서 대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1번 홀부터 드라이버 샷을 원온시키는 놀라운 플레이를 선보이면서 타수를 줄여가더니 결국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파머의 버디 행진으로 코스는 흥분의 도가니가 됐다. 거칠게 질주하는 파머를 막을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1만 명의 갤러리에게도 그런 장면은 처음이었다. 당시 최고의 스타이던 벤 호건의 시대가 저무는 신호였다. 파머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선수는 오하이오에서 온 잭 니클라우스라는 아마추어였다. 우승을 확인하는 순간 파머는 쓰고 있던 모자를 공중으로 던졌다. 팬은 파머의 그 같은 모습에 함께 열광하고 갈채를 보냈다. 1860년에 시작돼 골프사에서 가장 전통있는 대회인 디오픈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광채를 많이 잃었다. 2차대전 이후 골프는 미국에서 베이비붐 세대를 중심으로 급성장했지만 유럽은 아직 유러피언투어조차 결성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디오픈 101주년을 맞아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 1960년 디오픈 출전자 74명 중에 미국의 아놀드 파머가 있었다. 파머는 그해 마스터스와 US오픈을 연달아 우승했다. 그리고 남아있는 메이저를 정복할 목표를 세우고 죽어있던 디오픈을 찾은 것이었다. 그때까지 영국과 아일랜드만의 지역 대회이던 디오픈은 파머가 출전한 이후부터 메이저다운 대접과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파머는 그 대회에서는 한 타 차이로 호주의 켈 네이글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하지만 이듬해 로열버크데일에서 열린 디오픈과 로열트룬에서 열린 62년 대회를 연이어 석권하며 클라렛저그를 들어올렸다. 파머는 미국에 이어 영국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영국의 록밴드 비틀즈가 미국을 강타하기 4년 전에 골프에서는 미국의 파머가 영국을 먼저 강타했다. TV시대의 스포츠 스타인 파머는 맥코맥을 만나 자신의 브랜드 사업을 일찍부터 시작했다. 1961년 아놀드파머엔터프라이즈를 세우면서 선수를 활용한 다양한 사업을 구상했다. 하지만 어떤 로고를 붙여야 할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펜실베이니아 리고니아 사무실에서 브레인스토밍 중이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창 밖으로 예쁜 여인이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펼치는 걸 본 아놀드 파머가 퍼뜩 우산을 제안했다. 생활 어디서나 있으면서도 로고로 쓰이지 않은 이미지를 고민하다가 얻은 아이디어였다. 파머가 제안한 우산 로고는 이후 골프장 설계, 패션 등 각 분야에서 파머를 상징하는 로고가 되면서 엄청난 가치를 만들었다. 세계 어디서나 누구나 한 번에 떠올리는 브랜드였다. 심지어 그가 죽기 전까지 샷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4색 우산 로고 덕택에 그는 연 4000만 달러를 벌었다. 파머가 선수 생활 내내 지켰던 퍼팅 방식은 두 가지다. 첫째, 스트로크 내내 왼쪽 손등이 타깃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폴로스루에서 왼쪽 손목을 구부리지 말고 편다. 스트로크를 하는 동안 왼손이 타깃에 대해 일정한 자세를 유지하면, 백스트로크가 일관된다. 임팩트 이후에 왼쪽 손목을 컵처럼 구부리지 않으면, 볼이 홀 왼쪽으로 휘어지는 실수를 확실하게 피해갈 수 있다. 파머의 퍼팅은 손목 동작보다 팔과 어깨를 이용한 스트로크가 돼야 한다는 퍼팅의 교본이었다. 파머가 어렸을 적 골프장 그린키퍼로 일한 아버지로부터 배워서 평생 바꾸지 않은 한 가지는 그립이었다. 왼쪽 검지가 오른쪽 손가락 위로 확실하게 올라가고 손잡이 끝에 닿는 리버스오버랩 방식이다. 이 방식은 양손의 힘을 균등하게 만들어서 스트로크 도중에 어느 한 쪽이 주도권을 쥐지 않도록 했다. 파머는 항상 ‘나는 양손으로 퍼트한다’라고 말했다. ‘괘종시계의 추처럼 스트로크한다’는 퍼팅 이론은 파머 때 확립됐다. 파머의 메이저 우승은 총 7번이다. 마스터스는 58년부터 격년 간격으로 4번, US오픈은 60년, 디오픈은 61, 62년이다. 메이저가 아닌 일반 우승 기록을 보면 총 62승을 하고 시니어투어 등에서 30승을 추가했다. 55년 캐나다오픈에서 PGA투어 첫 승을 거둔 이래 파머는 20년 동안 꾸준히 승전보를 들려주었는데, 극적인 우승일 때가 많았다. 심지어 패했을 때조차 극적으로 패할 때가 많아서 그의 경기는 항상 관심거리였다. 우승이 없는 메이저인 PGA챔피언십은 64, 68, 70년에 2위만 세 번을 했다. US오픈 우승은 한 번이지만 연장전에서 세 번이나 졌다. 홀인원은 최단 거리 122야드에서 최장 245야드에 이르기까지 평생 21개를 했다. 모두 합치면 3305야드다. 65년 한 해에는 3,5,9월에 세 번을 했다. 가장 나중에 한 홀인원은 2011년 82세 생일을 7개월여 지나 올랜도에 소유한 베이힐클럽 7번 홀에서 기록했다. 파머는 특유의 파워와 과감함으로 골프 대회장을 마치 스포츠 경기장으로 변모시켰다. 이전까지 부유한 신사들의 레저였던 골프는 파머가 등장하면서 보통 사람의 액티브한 스포츠로 여겨졌다. 입에 담배를 물고, 셔츠자락은 삐져나오고, 샷을 할 때 장갑을 꽉 끼고, 바지를 추켜올려 성큼성큼 걷는 모습은 마치 링에 오르는 권투 선수였다.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의 별명은 ‘왕(the King)’이었다. 파머는 자신의 이름을 딴 PGA투어 아놀드파머인비테이셔널이 열리는 베이힐을 가졌고, 캘리포니아 해변가의 페블비치골프링크스도 공동 소유했다. 전 세계 25개국에 300곳 이상의 골프장을 만들었는데 극지방을 제외하고 대륙마다 파머의 코스가 등장했다. 파머는 세탁체인과 자동차 대리점, 아시아 전역의 400곳에 달하는 패션과 구두 매장도 보유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던 꿈을 이뤄 55년 간 2만 시간 비행 기록을 남겼다. 그가 살던 펜실베이니아 라트로브의 공항은 ‘아놀드 파머 리저널’ 공항으로 불린다. 파머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생일에 파머의 집을 찾아 축하인사를 했다. 존 F.케네디 대통령과 라운드 일정을 잡았지만 취소됐다. 조지 W. 부시와는 케네벙크포트에서 발발굽 던지기 놀이를 했지만, 골프 라운드는 하지 않았다. 함께 라운드한 대통령을 꼽자면 아이젠하워를 시작으로 닉슨, 포드, 레이건, 41대 부시와 빌 클린턴까지 6명이었다. LA의 란초파크 골프클럽에서 열린 1961년 LA오픈 첫 라운드에서 파머는 파5 18번 홀에서만 12타를 쳤다. 내리막인 두 번째 샷부터 시작해서 네 번의 3번 우드 샷이 연속으로 OB가 났다. 그린의 왼쪽과 오른쪽에 모두 OB 지역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샷이었지만, 과감하게 핀을 향하는 게 파머의 스타일이었다. 파머는 당시 ‘라이가 좋았기 때문에 도박으로는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다만 돌풍이 불어서 좋은 샷을 망쳐놓았다. 그리고 그 다음 샷도. 세 번째 시도에서는 실수를 과도하게 바로잡으려다가 훅이 나면서 OB가 됐다. 그 다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한 번 더 했다. 나중에 그 홀 티박스 옆에는 당시 상황을 새긴 비석이 새겨졌다. 헨리 롱허스트는 ‘항상 핀을 공략했던 파머 여기 잠들다’를 파머의 묘비명으로 쓰자고 했다. 그 역시 평범한 골퍼처럼 많이 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탁월하지만 스스로 소박할 수 있는 삶의 자세. 역대 최고의 성적을 낸 골퍼는 잭니클라우스였으나, 최고의 사랑을 받은 골퍼는 파머였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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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오거스타에 ‘아멘 코너’ 에 등장
그 기세를 이어 플레이를 마쳤다. 15번 홀에 이르렀을 때 12번 홀에서 드롭한 볼이 무벌타로 인정받자 파머는 부지불식 간에 ‘아멘'을 외쳤다. 파머는 12번 홀에서 파를 잡은 것으로 되었고, 당시 허버트 워런 윈드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 기자는 그 내용을 쓰면서 11~13번 홀을 ‘아멘 코너’로 처음 이름 붙였다.
② 선수 매니지먼트 사업의 시초
인간적이고 믿음직하며 솔직한 옆집 남자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다. 이후 파머는 캐딜락, 롤렉스, 심지어 전립선암 예방 광고에도 출연했다. 아이스티와 레모네이드를 섞은 음료수 ‘아놀드파머’까지 나와 미국에서 연 3억 캔 이상 팔린다. 맥코맥은 이후 파머와 함께 잭 니클라우스, 게리 플레이어까지 묶어 이른바 ‘빅3’로 만드는 스타 마케팅까지 성공시켰다. 오늘날 중동·아시아에서 신규 골프 대회를 개최하려면 IMG 등의 선수들을 보유한 매니지먼트사를 통해야 하는 구조가 형성됐다.
③ 아니의 군대 탄생
당시 오거스타내셔널 회장이던 클리포드 로버츠는 골프장 근처 고든 캠프에서 근무하던 군인들을 데려다 스코어보드를 적게 하는 등 부족한 일손을 메웠다. 당시에는 누구도 마스터스가 그렇게 커질지 몰랐다. 입장료는 5달러였고, 초등학교 교사가 입장권을 박스째 들고서 홍보할 정도였다. 로버츠는 대회가 TV에 중계되는 것을 감안하고, 군인이 제복만 입으면 공짜로 입장시켰다. TV에 갤러리가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공짜로 대회장에 들어온 군인들은 골프를 잘 몰랐다. 그래서 가장 잘한다는 선수를 따라다닌 것이 디펜딩 챔피언이던 파머였다. 물론 파머 역시 해안경비대 근무를 했었고, 경기를 호쾌하게 풀어나가는 스타일이어서 군인들과 빠르게 교감할 수 있었다. 파머는 58년 우승을 시작으로 마스터스에서 2년 간격으로 64년까지 4번 우승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경기를 따라다니는 군인들이 늘어났다. 조니 핸드릭스 오거스타크로니클 기자가 ‘아니의 군대’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④ 체리힐스의 대역전극
⑤ 디오픈을 메이저로 재조명
⑥ 4색 우산 로고의 탄생
⑦ 손등이 타깃을 향하는 퍼팅
⑧ 메이저대회 7승 포함 총 62승
⑨ 파머 제국 건설
⑩ 항상 핀을 향한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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