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역사를 바꾼 타이거 우즈의 마스터스 첫 우승] 1997년 4월 13일, 타이거 시대의 서막을 열다
[골프 역사를 바꾼 타이거 우즈의 마스터스 첫 우승] 1997년 4월 13일, 타이거 시대의 서막을 열다
흑인 최초이자 최저타·최대차·최연소 우승... 이후 현대 골프의 판도 바뀌어 최고의 시청률과 인기를 모으는 골프대회는 뭐니뭐니 해도 마스터스다. 21년 전인 1997년 타이거 우즈가 12타 차로 우승하면서 현대 골프의 모습 자체가 바뀌었고, 그가 만든 골프 시장은 비약적으로 팽창했다. 그 전설의 대회는 어떠했는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보자. 타이거 우즈는 오거스타내셔널 골프장이 아마추어 시절부터 낯익었다. 미국 아마추어 선수의 최대 메이저 대회인 US 아마추어선수권 우승자에게는 마스터스 출전권을 주기 때문이다. 우즈는 이 대회를 1994년부터 3연패 했다. 아마추어 자격으로 출전했던 두 번의 마스터스에서는 컷 통과와 탈락이 엇갈렸다. 19세인 95년에 처음 출전했을 때는 예선전을 통과해 41위를 했고, 이듬해인 96년 출전했을 때는 컷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1997년 4월10일부터 13일까지 나흘간 열린 97년 제 61회 마스터스(파72, 6332m) 대회 첫날은 바람이 무척 셌다. 아침 일찍 게임을 시작한 서른 명의 선수가 오버파를 기록했다. 우즈는 전년 8월에 프로에 데뷔해 그해 이미 2승을 거두고 상금 24위로 마친 상태였다. 전년도 US아마추어선수권 우승자 자격이었던 우즈는 전통에 따라 디펜딩 챔피언인 닉 팔도와 같은 조로 동반 라운드를 시작했다.
전반 라운드에서 40타 4오버파를 친 우즈는 후반 홀에 접어들면서부터 전혀 다른 차원의 게임을 했다. 10번 홀 버디에 이어 파3인 12번 홀에서 칩 샷을 그대로 홀인시키면서 버디를 잡은 뒤, 파5인 13번 홀에서도 버디를 잡아 1오버파로 내려갔다. 파5인 15번 홀에서는 이글을 잡아냈다. 전반의 40타를 후반의 30타로 만회하면서 2언더파 70타로 첫날 스코어 카드를 제출했다. 선두인 존 허스턴과는 세 타 차로 4위에 랭크됐다. 우즈와 동반 라운드를 한 팔도는 3오버파 75타를 치고난 뒤 기자회견장에서 말했다. “1995년에 타이거와 연습 라운드를 잠깐 같이 해본 적이 있지만, 이제야 사람들이 왜 흥분하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그는 정말 대단하다” 금요일에는 팔도 대신 폴 에이징어가 우즈와 동반 플레이했다. 1번 홀부터 더블보기로 진땀을 뺀 에이징어는 파5인 2번 홀에서 우즈가 드라이버 샷을 할 때야 비로소 그의 플레이를 직접 보게 되었다. “그가 샷 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총알 같은 샷이 왼쪽의 아주 큰 나무와 그보다 작은 나무 사이를 말도 안 되게 통과해 공중으로 솟구쳤다.”
우즈는 이날 데일리 베스트 스코어인 6언더파 66타를 쳤다. 13번 홀에서 우즈가 8번 아이언으로 홀 6m앞에 붙이더니 이글을 하나 더 추가했다. 그 순간에 뭔가 짐작한 방송 캐스터 짐 낸츠는 CBS 중계석에서 이 같은 코멘트를 했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 말하는 건데, 4월 11일 금요일 오후 5시30분을 조금 넘은 시각에 타이거가 마스터스에서 처음 선두에 나섰습니다.”
라운드를 마쳤을 때 우즈는 8언더파 136타로 메이저 대회 출전 이래 처음으로 선두를 달리게 됐다. 스코틀랜드의 콜린 몽고메리가 3타 차 2위였다. 몽고메리는 기자회견장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면서 “메이저 경험은 내가 훨씬 더 많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그 말이 도리어 우즈에게 확실한 동기 부여가 됐다. “그가 메이저대회에서 경험이 더 많은 건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메이저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고, 나도 마찬가지다. 메이저에서 우승했던 선수가 그 말을 했다면 몰라도 우승을 못한 건 그도 똑같았기 때문에 우리 둘 다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우즈의 3라운드 스코어는 전날보다 더 뛰어난 7언더파 65타로 중간합계 15언더파 201타였다. 전일에 이어 데일리 베스트 스코어였다. 이날 74타를 기록한 몽고메리는 기자회견장에서 “우리는 모두 인간인데, 인간적으로 타이거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 못할 확률은 전혀 없다”고 다시 호언장담했다.
2위는 이탈리아의 콘스탄티노 로카로 2언더파 70타를 치면서 중간합계 6언더파 210타를 기록하고 있었다. 톰 카이트나 톰 왓슨 같은 베테랑은 4언더파 212타로 공동 4위였다. 2위와 9타차 선두라 이미 우승은 확정적이었다. 전날 밤늦게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던 아버지 얼 우즈는 아들에게 충고했다. “앞으로 네가 경기할 모든 골프 라운드 중에서 가장 어렵고, 또 가장 보람 있는 라운드가 될 거다.” 1975년에 흑인으로는 처음 마스터스에 출전했던 리 엘더가 골프장에 도착했을 때 우즈는 연습장을 막 떠나려는 참이었다. 당시 62세의 엘더는 우즈를 껴안고 “해오던 대로만 하면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라고 격려했다. 우즈는 낮게 속삭였다. “이걸 가능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날 우즈의 스코어는 3언더파 69타로 최종합계 18언더파 270타였다. 2언더파 70타를 쳐서 최종 6언더파 282타로 2위를 한 톰 카이트와는 무려 12타차로 최대 격차 우승이었다. 또한 우즈는 4일 동안 이글 두 번, 21개의 버디, 42번의 파와 7번의 보기를 포함해 합계 18언더파 270타로 마스터스 최저타 기록을 갈아치웠다. 다만 역대 메이저에서 최대 타수 차 우승은 스코틀랜드 프레스트윅에서 열린 1862년 디오픈의 올드 톰 모리스가 기록한 13타차였다. 대신 마스터스 사상 유색인종으로는 첫 우승이었고, 21세의 최연소 우승이기도 했다. 우즈는 이 대회에서 드라이버샷 평균 295.3m로 비거리 2위 스콧 맥캐런과 무려 22.8m 격차가 났다. 오거스타내셔널 코스는 우즈에게 드라이버와 웨지만으로 충분히 공략가능한 무대였다. 또한 정규 타수 내 그린 적중률(GIR)에서도 공동 1위(톰 카이트, 프레드 펑크와 72홀 가운데 52홀 동률), 그리고 스리 퍼팅은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다. 이 같은 기록은 오거스타내셔널의 코스 세팅 자체를 개조시키도록 했다.
우즈가 우승 회견에서 한 말을 들어보면 마스터스의 유리판 그린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내가 했던 퍼팅은 다수가 오르막이었다. 그건 어프로치 샷을 컨트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또 어떻게 가능했을까? 숏아이언으로 어프로치 샷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숏아이언 샷을 했을까? 드라이버 샷을 잘했기 때문이다. 퍼팅은 티박스부터 그린까지 제대로 작동한 모든 플레이의 결과가 반영된 것이다. 아버지는 늘 코스를 거꾸로 생각하라고 가르치셨다.”
우즈가 1997년과 2001년 마스터스를 압도적인 기량 차로 우승하자 당시 후티 존슨 오거스타내셔널 회장은 “더 이상 장타자에게 농락당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34년 개장이래 68년만인 2002년에는 전장이 6332m에서 6647m로 315m 늘었고, 2011년에 다시 늘어 현재의 6716m가 됐다. 오거스타내셔널의 공동 창업자이던 크로포드 로버츠와 보비 존스는 인종주의자는 아니었으나 로버츠는 마스터스 기간에 오거스타내셔널의 캐디는 모두 흑인으로 유지하도록 했다. 그들만 유독 인종차별이 심했던 게 아니다. 미국프로 골프협회마저도 61년까지 선수 자격을 ‘코커서스 인종의 프로 골퍼’라고 규정짓고 있었다. 미디어 가이드북의 최초 흑인 프로 골퍼 찰리 시퍼드의 이름 뒤에는 ‘프로 데뷔 1948년, PGA투어 입회 1961년’이라고 적혀 있다.
마스터스에서 우승한 역대 챔피언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흑인 선수가 출전할 수도 있었다. 69년에 마흔여섯 살이던 시퍼드는 이미 그레이터하퍼드오픈, 로스앤젤레스오픈에서도 우승을 거뒀다. 하지만 시퍼드에게 출전권을 주자는 선수들의 투표에서 한 표만을 얻는 데 그쳤다. 하지만 전권을 행사했던 로버츠가 죽은 뒤 75년에는 리 엘더가 처음으로 흑인 선수로 출전할 수 있었다. 엘더는 1997년 마스터스를 보러 일요일에 현장을 찾았고, 시퍼드는 타이거에게 팩스를 보냈다. ‘핀마다 공략할 생각은 하지 말고, 영리하게 굴어라. 다만, 때가 되면 거침없이 강하게 공격해라.’ 우즈의 마스터스 우승 이후로 2000년 피지의 비제이 싱이 우승을 추가했고, 우즈는 이듬해 2001년 그랜드슬램에 이어 2002년과 2005년까지 4번이나 마스터스를 제패했다.
미국에 케이블TV 시대가 열리면서 골프 중계가 대폭 확대된 81년 이래 36년 동안 가장 높았던 시청률은 타이거 우즈가 마스터스에서 첫 승을 올린 1997년 4월13일 일요일이었다. 이때 TV 시청률은 14.1%로 역대 최고였다. 97년 마스터스를 TV로 지켜본 시청자는 골프 대회 사상 최대인 4400만 명이 넘었다. 코스 밖에서는 크고 작은 비극이 벌어졌다. 대회장 입장권을 판매하는 가격이 장당 7000달러까지 치솟자 거물들에게 약속했던 입장권 70장을 구할 수 없었던 현지 사업가 앨런 F. 콜드웰 3세는 12구경 산탄총으로 자살했다. 타이거는 18번 홀의 그린에서 언덕에 올라 부친 얼과 얼싸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우즈에게 축하 전화를 걸어 “그날 가장 감동적이었던 샷은 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샷이었다”고 말했다. 79년 마스터스와 84년 US오픈 챔피언인 퍼지 죌러는 해설가로 나와 텔레비전 스태프들을 웃기려는 의도에서였는지 몰라도 큰 실수를 했다. 마스터스 우승자가 다음해 대회가 열리기 전날 만찬의 메뉴를 선정하는 챔피언스 디너 전통을 언급하면서 “내년 챔피언 만찬에서 그들이 먹는 닭튀김이나 색깔 있는 채소는 내놓지 말라”고 했다. 죌러의 말에서 무심코 나온 ‘그들’과 유색인종을 암시하는 표현 때문에 그는 우즈와 골프 팬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이 실수로 인해 케이마트와의 스폰서 계약도 끊어졌고 두고두고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 찍혔다.
우즈는 그 이후로도 3벌의 그린재킷(2001년, 2002년, 2005년)을 더 입었으나 이날의 감동은 선수와 골프팬 모두에게 특별했다. 우즈는 3년 뒤인 2000년 6월 US오픈에서 2위와 15타차 우승을 하면서 올드 톰의 메이저 13타 차 우승 기록도 깼다. 하지만 1997년 마스터스만큼의 의미 있는 우승은 아니었다. 축하 파티를 벌이던 얼은 한밤에 그린재킷을 입은 채 잠든 아들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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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1라운드
이듬해인 1997년 4월10일부터 13일까지 나흘간 열린 97년 제 61회 마스터스(파72, 6332m) 대회 첫날은 바람이 무척 셌다. 아침 일찍 게임을 시작한 서른 명의 선수가 오버파를 기록했다. 우즈는 전년 8월에 프로에 데뷔해 그해 이미 2승을 거두고 상금 24위로 마친 상태였다. 전년도 US아마추어선수권 우승자 자격이었던 우즈는 전통에 따라 디펜딩 챔피언인 닉 팔도와 같은 조로 동반 라운드를 시작했다.
전반 라운드에서 40타 4오버파를 친 우즈는 후반 홀에 접어들면서부터 전혀 다른 차원의 게임을 했다. 10번 홀 버디에 이어 파3인 12번 홀에서 칩 샷을 그대로 홀인시키면서 버디를 잡은 뒤, 파5인 13번 홀에서도 버디를 잡아 1오버파로 내려갔다. 파5인 15번 홀에서는 이글을 잡아냈다. 전반의 40타를 후반의 30타로 만회하면서 2언더파 70타로 첫날 스코어 카드를 제출했다. 선두인 존 허스턴과는 세 타 차로 4위에 랭크됐다. 우즈와 동반 라운드를 한 팔도는 3오버파 75타를 치고난 뒤 기자회견장에서 말했다. “1995년에 타이거와 연습 라운드를 잠깐 같이 해본 적이 있지만, 이제야 사람들이 왜 흥분하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그는 정말 대단하다”
4월11일 2라운드
우즈는 이날 데일리 베스트 스코어인 6언더파 66타를 쳤다. 13번 홀에서 우즈가 8번 아이언으로 홀 6m앞에 붙이더니 이글을 하나 더 추가했다. 그 순간에 뭔가 짐작한 방송 캐스터 짐 낸츠는 CBS 중계석에서 이 같은 코멘트를 했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 말하는 건데, 4월 11일 금요일 오후 5시30분을 조금 넘은 시각에 타이거가 마스터스에서 처음 선두에 나섰습니다.”
라운드를 마쳤을 때 우즈는 8언더파 136타로 메이저 대회 출전 이래 처음으로 선두를 달리게 됐다. 스코틀랜드의 콜린 몽고메리가 3타 차 2위였다. 몽고메리는 기자회견장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면서 “메이저 경험은 내가 훨씬 더 많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그 말이 도리어 우즈에게 확실한 동기 부여가 됐다. “그가 메이저대회에서 경험이 더 많은 건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메이저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고, 나도 마찬가지다. 메이저에서 우승했던 선수가 그 말을 했다면 몰라도 우승을 못한 건 그도 똑같았기 때문에 우리 둘 다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4월12일 3라운드
2위는 이탈리아의 콘스탄티노 로카로 2언더파 70타를 치면서 중간합계 6언더파 210타를 기록하고 있었다. 톰 카이트나 톰 왓슨 같은 베테랑은 4언더파 212타로 공동 4위였다. 2위와 9타차 선두라 이미 우승은 확정적이었다. 전날 밤늦게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던 아버지 얼 우즈는 아들에게 충고했다. “앞으로 네가 경기할 모든 골프 라운드 중에서 가장 어렵고, 또 가장 보람 있는 라운드가 될 거다.”
4월13일 파이널 라운드
이날 우즈의 스코어는 3언더파 69타로 최종합계 18언더파 270타였다. 2언더파 70타를 쳐서 최종 6언더파 282타로 2위를 한 톰 카이트와는 무려 12타차로 최대 격차 우승이었다. 또한 우즈는 4일 동안 이글 두 번, 21개의 버디, 42번의 파와 7번의 보기를 포함해 합계 18언더파 270타로 마스터스 최저타 기록을 갈아치웠다. 다만 역대 메이저에서 최대 타수 차 우승은 스코틀랜드 프레스트윅에서 열린 1862년 디오픈의 올드 톰 모리스가 기록한 13타차였다. 대신 마스터스 사상 유색인종으로는 첫 우승이었고, 21세의 최연소 우승이기도 했다.
압도적 기량으로 우승
우즈가 우승 회견에서 한 말을 들어보면 마스터스의 유리판 그린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내가 했던 퍼팅은 다수가 오르막이었다. 그건 어프로치 샷을 컨트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또 어떻게 가능했을까? 숏아이언으로 어프로치 샷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숏아이언 샷을 했을까? 드라이버 샷을 잘했기 때문이다. 퍼팅은 티박스부터 그린까지 제대로 작동한 모든 플레이의 결과가 반영된 것이다. 아버지는 늘 코스를 거꾸로 생각하라고 가르치셨다.”
우즈가 1997년과 2001년 마스터스를 압도적인 기량 차로 우승하자 당시 후티 존슨 오거스타내셔널 회장은 “더 이상 장타자에게 농락당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34년 개장이래 68년만인 2002년에는 전장이 6332m에서 6647m로 315m 늘었고, 2011년에 다시 늘어 현재의 6716m가 됐다.
TV 시청률 역대 최고 기록
마스터스에서 우승한 역대 챔피언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흑인 선수가 출전할 수도 있었다. 69년에 마흔여섯 살이던 시퍼드는 이미 그레이터하퍼드오픈, 로스앤젤레스오픈에서도 우승을 거뒀다. 하지만 시퍼드에게 출전권을 주자는 선수들의 투표에서 한 표만을 얻는 데 그쳤다. 하지만 전권을 행사했던 로버츠가 죽은 뒤 75년에는 리 엘더가 처음으로 흑인 선수로 출전할 수 있었다. 엘더는 1997년 마스터스를 보러 일요일에 현장을 찾았고, 시퍼드는 타이거에게 팩스를 보냈다. ‘핀마다 공략할 생각은 하지 말고, 영리하게 굴어라. 다만, 때가 되면 거침없이 강하게 공격해라.’ 우즈의 마스터스 우승 이후로 2000년 피지의 비제이 싱이 우승을 추가했고, 우즈는 이듬해 2001년 그랜드슬램에 이어 2002년과 2005년까지 4번이나 마스터스를 제패했다.
미국에 케이블TV 시대가 열리면서 골프 중계가 대폭 확대된 81년 이래 36년 동안 가장 높았던 시청률은 타이거 우즈가 마스터스에서 첫 승을 올린 1997년 4월13일 일요일이었다. 이때 TV 시청률은 14.1%로 역대 최고였다. 97년 마스터스를 TV로 지켜본 시청자는 골프 대회 사상 최대인 4400만 명이 넘었다. 코스 밖에서는 크고 작은 비극이 벌어졌다. 대회장 입장권을 판매하는 가격이 장당 7000달러까지 치솟자 거물들에게 약속했던 입장권 70장을 구할 수 없었던 현지 사업가 앨런 F. 콜드웰 3세는 12구경 산탄총으로 자살했다.
그린재킷을 입고 잠든 우즈
우즈는 그 이후로도 3벌의 그린재킷(2001년, 2002년, 2005년)을 더 입었으나 이날의 감동은 선수와 골프팬 모두에게 특별했다. 우즈는 3년 뒤인 2000년 6월 US오픈에서 2위와 15타차 우승을 하면서 올드 톰의 메이저 13타 차 우승 기록도 깼다. 하지만 1997년 마스터스만큼의 의미 있는 우승은 아니었다. 축하 파티를 벌이던 얼은 한밤에 그린재킷을 입은 채 잠든 아들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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