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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식 보호무역의 역설

트럼프식 보호무역의 역설

미국발 통상압력이 점입가경이다. 1월 세탁기와 태양광 패널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 수입제한 조치)에 이어 외국산 철강제품이 경제와 안보를 해친다는 이유로 36년 만에 ‘무역확장법 232조’를 꺼내 고관세를 예고했다. 미 무역 위원회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특허 침해를 조사 중인 점을 감안하면 반도체도 사정권에 들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에 따른 무역보복 발언은 거침이 없다. 특히 한국과 중국 두 나라를 꼭 집어 거론한다. 한국에 대해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재앙이라며 전면 폐기도 불사할 뜻을 밝혔다. 중국을 향해선 “미국이 중국의 돼지 저금통이냐”며 덤핑으로 미국 산업을 망치는 것을 두고 보지 않겠다고 날을 세웠다. 한국·중국·일본 3국을 겨냥한 듯 “무역에 관해선 동맹국은 없다”며 미국을 이용해 돈을 버는 나라들에 ‘상호세(reciprocal tax)’를 물리겠다고 예고했다.

트럼프의 논리는 단순무지하다. 다른 나라가 덤핑 수출로 미국 산업을 어렵게 만드는 것을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높은 관세를 매기거나 수입물량을 제한해 미국 산업을 보호하고 관련 산업을 재편해 일자리를 더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얼핏 그럴싸해 보이기도 하고, 트럼프가 목표한 11월 중간선거에서 지지층 표를 모으는 효과를 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금만 더 냉정하게 긴 안목으로 보면 트럼프의 지나친 보호무역주의는 미국 경제에 독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보호무역의 역설이다.

미국 정부가 원부자재를 포함한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를 매기면 미국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가격 인상 요인으로 작용한다. 일시적으로 해당 산업 일부는 보호받을 수 있겠지만 연관되는 다른 산업에는 되레 부정적 영향을 미쳐 중장기적으로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 소비자 입장에선 수입품 가격이 높아져 가계지출이 늘어나고 상품 선택에 제약을 받게 된다. 당장 수입 태양광 패널에 대한 세이프가드 발동은 미국 내 태양광산업을 위축시킬 조짐이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태양광 패널의 95%가 중국·말레이시아·한국산 등 수입품이라며 미국 제조 업체인 수니바와 솔라워드 아메리카스가 트럼프 행정부에 요구해 세이프가드를 관철시켰다.

하지만 그 결과 일자리 창출이 아닌 일자리 증발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 태양광 관련 산업 종사자 대부분이 부품 제조가 아닌 부품을 조립해 발전 시스템을 만드는 부문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전지와 모듈 등 제조업 종사자가 2000여 명인 반면 태양광 발전 시스템 건립과 유지 부문 종사자는 26만여 명으로 훨씬 많다. 수입산 태양광 패널에 고율의 관세가 부과함에 따라 소수의 생산업자야 득이 되겠지만 대다수 시스템 구축업자에겐 비용 증가에 따른 사업 축소로 나타나 결과적으로 2만3000여 명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란 업계 관측이다.

수입 세탁기에 대한 세이프가드 배후에는 올해로 창립 107돌을 맞은 미국의 대표적 가전 메이커 월풀이 있다. 월풀의 최고경영자(CEO) 제프 페티그는 트럼프 최측근으로 이번 세이프가드 발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한국에서도 월풀 냉장고와 세탁기는 예약하지 않으면 구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기술 개발과 제품 경쟁력에서 밀려 자국 소비자들에게도 냉대를 받자 트럼프 행정부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다고 보호무역이 소비자 선택까지 강요하진 못한다. 고율의 관세 부과로 수입품의 가격이 오르겠지만, 소비자들은 단순히 가격 요인만 보고 제품을 선택하진 않는다. 이를 보여주듯 미국 정부의 세이프가드 발동 이후에도 LG전자와 삼성전자의 세탁기는 현지에서 최고 제품으로 평가받았다. 미국의 유력 소비자 전문 매체 컨슈머리포트가 2월 초 ‘최고의 대용량 세탁기 15종’을 뽑아 발표했는데, 절반을 넘는 8개가 한국산이었다. 6개 모델을 최고 제품으로 꼽은 ‘고효율 전자동 세탁기’ 부문에서도 LG전자 제품이 3개로 선두였다. 미국 업체인 켄모어 제품이 2개, 월풀은 1개에 그쳤다. 드럼세탁기 부문에선 6개 모델 가운데 삼성전자의 3개 제품과 LG전자의 2개 제품이 선정됐고, 나머지 1개는 켄모어 제품으로 월풀은 명함도 들이밀지 못했다.

세이프가드 발동 이후에도 미국 소비자들은 여전히 성능과 품질 면에서 탁월한 한국산 제품에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된 것이다. 컨슈머리포트는 보고서에 “지난 3~5년 간 LG·삼성은 세탁기 부문에서 혁신을 주도해왔다. 일정 부분 가격 상승이 불가피하지만 두 회사가 미국 내 공장을 건설하고 있기 때문에 세이프가드 영향은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미국에서도 트럼프의 무차별적 통상 압력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고 있다. 비판의 주체가 공화당 진영의 보수 성향 학자와 언론이란 점이 주목을 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맨큐의 경제학] 저자로 유명한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는 강의하듯 조목조목 트럼프의 보호무역 기조를 꼬집었다. 맨큐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세탁기 및 태양광 패널에 대한 세이프가드 발동, 철강과 알루미늄 등에 대한 관세폭탄 검토 등을 거론하며 트럼프 행정부가 자유무역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맨큐 외에도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 등 미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들이 자해적인 보호무역을 비판하고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철강·알루미늄 고관세가 미국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고 미국인의 일자리를 앗아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02년 당시 부시 행정부가 수입 철강제품에 고관세를 부과한 후 미국의 철강 업계 노동자보다 많은 (철강을 소비하는) 관련 업계 노동자 20만 명이 실직한 사례를 상기시켰다.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인 러스트벨트에 있는 디트로이트뉴스 또한 수입 철강제품 규제안이 발표된 2월 16일 포드와 GM의 주가가 폭락한 점을 들며 “보호무역이 미국 내 제조업자의 생산비용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표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유무역 이론과 역사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인이든 국가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서 나머지는 자유로운 교환을 통해 얻는 게 모두에게 유리하다는 이론이다. 교역 확대로 타격을 입는 산업이나 계층이 나타날 수 있지만, 이는 효과적인 사회안전망과 재교육을 통해 해결해야지 일시적·제한적인 타격 때문에 보호무역으로 회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문재인 정부는 안보와 통상을 분리해 미국의 통상압박에 강경 대응하겠다고 하지만 마땅히 쓸 만한 수단이 없는 게 사실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에서 일고 있는 트럼프의 보호무역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무리한 통상압박 조치가 중장기적으로 미국의 산업 전반과 소비자후생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적극 알려야 할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 재계가 채널을 총동원해 설득해 나가는 ‘팀 코리아’ 전략으로 대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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