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정상회담 경호 맡는 구르카족] 돈 받고 싸우는 용병? 직업정신 투철한 전사!
[북미 정상회담 경호 맡는 구르카족] 돈 받고 싸우는 용병? 직업정신 투철한 전사!
싱가포르 경찰에 1800명가량 근무 … 영국 식민지 군대 시절에도 용맹 떨쳐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싱가포르는 제복의 나라다. 군인과 경찰의 비율이 높다. 싱가포르는 서울 면적(606.2㎢)의 1.2배 수준인 721.5㎢의 좁은 국토에 561만 명(2017년 11월 싱가포르 통계청)이 몰려 사는 작은 도시국가다. 그런데도 이 나라의 안보를 책임지는 싱가포르군은 7만1600명의 병력을 유지한다. 인구의 1.27%가 군인이다. 군 병력의 80% 정도가 징집병이다. 18세 이상의 모든 싱가포르 남자는 의무적으로 22~24개월 간 군복무를 해야 한다.
법과 질서를 책임지는 경찰도 준군인이다. 싱가포르 경찰은 공식 명칭이 싱가포르 경찰부대(The Singapore Police Force, SPF)다. 병력이 4만1599명이나 된다. 군 병력의 절반을 넘는다. 이 가운데 1만5000명이 풀타임 경찰이다. 싱가포르 경찰의 모토는 ‘국가를 위한 경찰-싱가포르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A Force for the Nation – To Make Singapore the Safest Place in the World)’이다. ‘범죄를 예방하고 억제하며 감지(prevent, deter and detect crime)‘하는 것을 임무로 정하고 있다. 군인과 경찰을 합치면 병력 11만3000명 이상이 이 작은 도시국가를 지키는 셈이다. 미국과 북한이 싱가포르를 회담 장소로 선택하고 받아들인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같은 철통 같은 보안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싱가포르 경찰에는 1800명가량의 네팔 구르카족 병력이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보도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 구르카족 경찰은 계약에 따라 싱가포르 경찰에 ‘해외 취업’하고 있다. 통상 18, 19세 때 엄격한 체력 검증 등을 거쳐 선발돼 싱가포르에서 45살까지 급여를 받고 근무하게 된다. 근무가 끝나면 본국 네팔로 의무 귀국해 연금으로 안락한 노후를 보내게 된다. 근무 후 싱가포르 정착이나 근무 중 싱가포르 국적 여성과의 결혼은 할 수 없다. 이들은 근무 기간 중 싱가포르에서 마련해준 숙소에서 집단생활을 한다. 숙소에선 오후 10시 30분에 취침해야 하며 자정 이후에는 외부 통행이 금지된다. 싱가포르 경찰에는 ‘구르카 경찰단(Gurkha Contingent, GC)’이라는 이름의 구르카 분견대가 별도로 있다. 이들은 고도의 특수 훈련을 받은 후 강력한 헌신성과 업무 적합성이 확인될 때 임용돼 임무에 투입된다. 구르카 분견대의 기본 임무는 특수 경비이며, 최근 이들은 대테러 임무의 선두에 서고 있다.
싱가포르 경찰에 싱가포르인도 아닌 네팔의 부족 구르카족으로 이뤄진 ‘구르카 경찰단’의 구성된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도의 독립이었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1947년 8월 15일)한 후인 1949년 4월 9월 영국-인도-네팔의 삼각 합의가 이뤄지면서다. 식민지 군대에서 근무하는 것을 부족의 주요 수입원으로 삼고 있던 네팔의 구르카족으로선 자신들의 군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당대는 물론 후손들까지 먹고 사는 데 핵심적인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 합의에 따라 ‘인도 주둔 영국군 구르카 부대’는 영국군과 인도군으로 소속이 나뉘어졌다. 이 가운데 영국군 소속으로 이관된 인도 내 구르카족 부대 4개 연대는 인도를 떠나 말레이나 싱가포르 등 아직 영국 식민지였던 지역으로 전환 배치됐다. 반대로 인도 독립에 따라 그전까지 영국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 주둔했던 시크족 부대는 영국군에서 분리돼 인도군으로 소속을 옮기고 본국으로 귀국하게 됐다. 이 구르카족 부대는 말레이와 싱가포르에서 시크족 부대가 맡고 있던 군대와 경찰 임무를 맡았다.
특히 싱가포르 경찰에 배치된 구르카인들은 치안 유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50년 12월 11~13일 싱가포르에선 ‘마리아 허토흐 폭동’이 발생했다. 이 폭동은 싱가포르 법정이 체 아미나 빈트 모하마드라는 이름으로 말레이계 무슬림 가정에서 성장한 13세 소녀를 네덜란드계 가톨릭교도인 생물학적 부모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판결하면서 벌어졌다. 무슬림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이 어린이가 성모마리아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시위는 폭동으로 번졌다. 18명이 사망하고 173명이 부상했다. 구르카족의 용감하고 합리적이며 헌신적인 대처 덕분에 사태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고 진정됐다. 그 후에도 대규모 폭동이 터졌다. 1964년 7월 21일 이슬람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생일을 맞아 싱가포르 전역에서 무슬림인 말레이계와 중국계가 감정적으로 충돌했다. 이 충돌은 그 해 9월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됐다. 영국이 떠난 이후 서로 다른 종족 간에 민족 분쟁과 종교 갈등이 줄을 이은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계든 말레이계든 어느 한쪽에 속한 경찰이 나서면 사태가 더욱 악화할 수 있다. 자칫 한쪽 편을 든다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해당 경찰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속한 종족의 눈 때문에 합리적인 일 처리가 어려워지는 문제도 있다. ‘말레이계 경찰이 중국계 시위대에 발포했다’ ‘중국계 경찰이 말레이계 시위대에 발포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폭력적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립적일 수 있는 제3의 종족인 구르카족 경찰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싱가포르 초대 총리 리콴유(李光耀, 1923~2015)는 구르카족의 규율 및 충성심과 함께 이런 요소를 감안해 싱가포르 경찰에 구르카족 분견대를 설치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구르카족이 영국과 옛 영국 식민지 국가에서 군사와 경찰 업무에 종사하는 데는 역사적인 사연이 있다. 네팔의 한 부족인 구르카족은 1814~1816년 벌어졌던 영국-네팔 전쟁에서 용맹성과 탁월한 전투 능력을 보여줬다. 네팔은 당시 고르카(지금도 인도에선 고르카로 부른다) 왕국이라는 이름의 독립 국가였는데, 이 때문에 구르카라는 부족의 이름이 곧 네팔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전쟁 당시 구르카족을 눈여겨본 영국군은 이들을 적으로 두기보다 아군으로 포섭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구르카족 부대를 조직해 식민지 인도군의 한 부분으로 배치했다. 급여를 지급하는 직업군인 부대이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고 1949년 4월 9월 영국-인도-네발 삼각 합의가 이뤄지면서 구르카족 군인들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인도 또는 영국을 선택했다. 10개의 구르카족 연대 중 6개가 인도군으로 가고 4개가 영국군을 택했다. 현재 인도군은 7개의 구르카 연대에서 39개 대대를 운영한다. 이 가운데 6개 연대는 독립 직후 식민지 군대였던 ‘영국인도군’에서 넘어온 부대이며 1개 연대는 독립 이후 신설됐다. 독립 후 구르카 연대를 추가로 설치한 것은 그만큼 이들의 전력이 인도군에 필요했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영국인도군의 구르카 부대 중 4개 연대는 1948년 1월 1일자로 영국군에 배속돼 말레이와 싱가포르에 배치됐다. 이들은 현재 영국군 구르카 여단을 이루고 있다. 말레이에 배치된 구르카 부대는 2차 대전 당시 버마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벌였던 것처럼 정글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49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로 근거지를 옮긴 영국군 소속 구르카족 부대는 단순한 경비 임무를 넘어 실전에 투입됐다. 1948년 당시 영국 식민지이던 말레이에서 ‘말라야 비상사태(Malayan Energency)’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말라야 비상사태는 말레이 공산당 산하 무장단체인 말라야 민족해방군(MNLA)이 영국군을 대상으로 독립을 요구하면서 게릴라전을 벌인 사건이다. 1960년까지 계속된 이 사태로 말레이 지역은 혼란에 휩싸였다. 이 사태가 진행 중인 1957년 8월 31일 말레이 식민지는 말라카 해협의 또 다른 영국 식민지인 페냥과 말라카를 합쳐 말라야 연방이란 국가로 독립했다. 말라야 연방은 1963년 싱가포르와 보르네오섬의 북보르네오와 사라와크 등 인근 영국 식민지를 통합해 새롭게 말레이시아 연방을 구성했다.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돼 화교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다민족 국가로 새 출발했다.
말라야 비상사태가 발생하자 영국은 총력을 다해 공산군 봉기에 대항했다. 사태가 발생할 당시 영국은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 총리가 집권하고 있었다. 애틀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45년부터 한국전쟁 이듬해인 51년까지 총리를 지내며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로 요약되는 20세기 복지국가를 건설한 인물이다. 하지만 외교에선 확고하게 친미·반소·반공 정책을 견지했다. 2차대전 후 초 강대국이 된 미국과 소련이 냉전(1945~91년)에 들어가자 냉정한 판단으로 미국을 편들며 자유진영의 핵심 역할을 했다. 소련이 동유럽 등에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좌파정당인데도 반공·반소·친미 정책을 폈다.
1947년 이후 노동당내 좌파들이 ‘계속 좌향좌(Keep Left)’를 주장하며 유럽사회민주주의를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제3세력으로서 중립정책을 요구했지만 애틀리는 듣지 않았다. 대신 국민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소련은 물론 영국 공산당과도 멀리했다. 공산당과 가까이하는 노동당원은 가차 없이 제명했다. 국민의 지지 속에 내정 개혁을 완수하려면 공산당이나 소련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국민에게 확신시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냉전은 사실 영국 역사상 가장 길고 비용이 많이 들어간 전쟁이었다. 핵무기를 포함한 재무장에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갔다. 애틀리는 1949년 4월 공산권에 대항하는 서방 집단 방위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창설에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영국이 독자 노선을 걸으려면 핵무기 보유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47년 1월 자체 핵무기 개발을 지시했다. 애틀리의 핵 자주권 확보 노력은 정권이 바뀐 52년 남호주에서의 핵실험으로 결실을 맺었다. 말레이 비상사태는 영국의 노동당 정권이 핵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발생했다. 영국이 사태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전후 복구와 식민지 경제 부흥을 위해 말레이의 광산의 주석과 플랜테이션의 고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세계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군대를 모두 모았다. 물론 핵심은 말레이 여단을 주축으로 하는 25만 명의 말레이 방위군이었다. 영국군이 말레이 현지에서 현지인을 훈련시켜 구성한 식민지 군대다. 그 중추는 말레이인만 사병으로 근무하는 특수부대인 말레이 여단이었다. 당시 2개의 공수 대대, 1개의 기갑대대, 22개의 경보병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였다. 이 식민지 여단은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영국군 휘하에서 일본군을 대상으로 말레이 전투와 싱가포르 전투를 치른 역전의 부대다. 특수 훈련에 용맹성까지 갖춰 말레이 여단은 ‘말레이 구르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물론이 부대는 말레이인만 사병으로 근무해 쿠르카인은 없었다. 구르카족의 용맹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던 셈이다.
영국군은 4만 명의 영국군과 영연방군도 동원됐다. 영연방인 호주와 뉴질랜드의 군대와 함께 영국군 직할 식민지 부대들이 대거 나섰다. 케냐·우간다·탄자니아(당시엔 잔지바르와 탕가니카)·말라위(당시엔 니야살랜드) 등을 기반으로 하는 ‘킹스 동아프리카 소총부대(KAR)’도 동원됐다. 이 부대는 1차대전의 아프라카 전역과 2차대전의 에티오피아·소말릴랜드(현재 소말리아 북부 지역)에서 파시스트 이탈리아군에 대항해, 마다가스카르에선 프랑스 비시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아프리카 지역은 물론 버마에도 원정해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다.
영국은 1차대전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식민지 부대를 대거 유럽 전선에 투입했다. 인도군의 경우 영국군 휘하에서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제2차 보어전쟁(1899~1902),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제1차 와지리스탄 전쟁(1919~1920)과 제2차 와지리스탄 전쟁(1936~1939),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에 참전했다. 특히 1차대전 당시에는 인도 국민의회의 협조를 얻어 100만 명 이상의 병사들이 지원하고 원정부대를 조직해 프랑스 등 유럽 전선 등에 참전했다. 이 가운데 최소 7만4787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 뉴델리에 있는 주황색의 ‘인다아 문’은 1914~1921년 전사한 인도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1931년 건설됐다.
인도군의 영국 전쟁 참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이어졌다. 인도군은 1939년 1차대전 발발 당시 20만 명 수준이던 인도군의 병력은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엔 250만 명이 넘었다. 인도군 가운데서도 구르카족은 발군이었다. 이들의 주특기는 은밀한 야간 기습이었다. 구르카 병사는 언제나 몸에 지니는 부족 전통의 단검인 쿠크리를 실전에서 사용했다. 이들은 야간에 2인 1조로 보초를 서는 독일군이나 이탈리아군 초소를 몰래 침입해 한 명의 목만 잘라갔다. 졸다 깨어보니 옆의 동료가 목 없이 피를 흘리고 있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살아남은’ 독일군 병사의 비명 소리는 부대 전체를 공포에 휩싸이게 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보초는 물론 전체 병력이 며칠 동안 밤새 뜬 눈으로 밤을 세우기 일쑤였다. 그러다 지쳐 사기와 판단력이 흐려질 무렵 영국군은 야습을 해서 피로에 지친 독일군을 섬멸했다. 말레이 비상사태에서 구르카 부대는 특유의 용맹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모든 작전의 최선봉에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부대에 가장 위험한 임무나 최선봉 투입 임무가 넘어가면 항의하기 일쑤였다. 말레이 비상사태는 윈스턴 처칠이 해결했다. 1951년 영국 총선 승리로 총리에 복귀한 처칠은 내정에 주력했다. 정권을 잃은 기억을 잊지 않고 재건 과정에서도 다양한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매년 30만채의 서민주택을 공급하겠다는 공약을 지켜 주택난을 상당히 해소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세력 확대에는 더할 나위 없이 단호하게 대처했다. 특히 1948년부터 계속되던 말레이 식민지(현 말레이시아)의 공산주의 무장단체인 말레이민족해방군(MNLA)의 게릴라전에 맞서 대규모 병력을 증파하는 한편 농촌지역에 대한 의료·식량지원을 강화해 근거지의 민심을 장악했다. 그 결과 1954년까지 게릴라의 3분의 2를 소탕, 동남아시아에서 공산 세력의 확산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었다. 그 최선봉에 쿠르카 부대가 있었다.
말레이와 브루나이 사태가 일단락되자 구르카 부대는 모두 홍콩으로 이동 배치돼 주로 보안과 경비 업무를 맡았다. 주로 국경 경비를 맡으면서 밀수와 불법이민을 단속했다. 1966년 홍콩 폭동에서도 역할을 했다. 당시 홍콩의 식민지 행정당국이 홍콩 섬과 주룽(九龍)반도를 오가는 해상 페리 요금을 인상하자 시민들이 항의 시위로 시작했다가 폭력 사태로 번졌다. 1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했으며 1800여 명이 체포됐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에 회귀되면서 홍콩에 주둔하던 구르카 부대는 본부와 훈련소 문을 닫고 영국으로 이동했다.
구르카족 부대는 영국군의 일부로 세계에 분쟁 지역에 투입돼왔다. 1974년 터키가 키프로스를 침공하자 영국은 1개 구르카 연대를 키프로스 내 영국 해외 영토이자 군사기지인 데칼리아 주둔지로 보내 경계를 강화했다. 구르카 부대는 1999년 코소보 전쟁 당시 영국군의 일원으로 다시 한 번 용맹성을 보여줬다. 다국적 평화유지군 가운데 마케도니아에서 코소보로 가장 먼저 진입해 수색, 정찰, 지뢰 제거, 장애물 정리 등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위험한 작전에서 항상 최전선에 선다는 구르카족의 전통이 살아있음을 보여줬다. 1994년 7월 1일 4개 구르카 소총연대는 1개의 여단으로 통합됐다. 지금도 약 3500명이 구르카 병사로 영국군 소속으로 근무한다. 이들은 특수부대로서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 영국군의 작전을 펼치는 험악한 지역엔 빠지지 않고 투입된다. 아무리 최첨단 무기로 무장해도 전통의 단검인 쿠크리는 항상 몸에 지닌다. 비록 다른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어도 이들은 구르카족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다른 나라를 위해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은 국제법이나 국내법으로 불법이다. 하지만 구르카족 부대는 프랑스 외인 부대와 더불어 국제법상 특수성을 인정받는다. 역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의 엄격한 군기와 합리적인 일처리는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들의 활동은 돈을 받고 폭력을 대신 행사해주는 일반적 의미의 ‘용병’과 다르다. 구르카족을 용병으로 불러선 곤란한 이유다. 다만 직업정신에 철두철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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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질서를 책임지는 경찰도 준군인이다. 싱가포르 경찰은 공식 명칭이 싱가포르 경찰부대(The Singapore Police Force, SPF)다. 병력이 4만1599명이나 된다. 군 병력의 절반을 넘는다. 이 가운데 1만5000명이 풀타임 경찰이다. 싱가포르 경찰의 모토는 ‘국가를 위한 경찰-싱가포르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A Force for the Nation – To Make Singapore the Safest Place in the World)’이다. ‘범죄를 예방하고 억제하며 감지(prevent, deter and detect crime)‘하는 것을 임무로 정하고 있다. 군인과 경찰을 합치면 병력 11만3000명 이상이 이 작은 도시국가를 지키는 셈이다. 미국과 북한이 싱가포르를 회담 장소로 선택하고 받아들인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같은 철통 같은 보안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싱가포르 경찰에는 1800명가량의 네팔 구르카족 병력이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보도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 구르카족 경찰은 계약에 따라 싱가포르 경찰에 ‘해외 취업’하고 있다. 통상 18, 19세 때 엄격한 체력 검증 등을 거쳐 선발돼 싱가포르에서 45살까지 급여를 받고 근무하게 된다. 근무가 끝나면 본국 네팔로 의무 귀국해 연금으로 안락한 노후를 보내게 된다. 근무 후 싱가포르 정착이나 근무 중 싱가포르 국적 여성과의 결혼은 할 수 없다. 이들은 근무 기간 중 싱가포르에서 마련해준 숙소에서 집단생활을 한다. 숙소에선 오후 10시 30분에 취침해야 하며 자정 이후에는 외부 통행이 금지된다.
계약에 따라 싱가포르 경찰에 ‘해외 취업’
싱가포르 경찰에 싱가포르인도 아닌 네팔의 부족 구르카족으로 이뤄진 ‘구르카 경찰단’의 구성된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도의 독립이었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1947년 8월 15일)한 후인 1949년 4월 9월 영국-인도-네팔의 삼각 합의가 이뤄지면서다. 식민지 군대에서 근무하는 것을 부족의 주요 수입원으로 삼고 있던 네팔의 구르카족으로선 자신들의 군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당대는 물론 후손들까지 먹고 사는 데 핵심적인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 합의에 따라 ‘인도 주둔 영국군 구르카 부대’는 영국군과 인도군으로 소속이 나뉘어졌다. 이 가운데 영국군 소속으로 이관된 인도 내 구르카족 부대 4개 연대는 인도를 떠나 말레이나 싱가포르 등 아직 영국 식민지였던 지역으로 전환 배치됐다. 반대로 인도 독립에 따라 그전까지 영국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 주둔했던 시크족 부대는 영국군에서 분리돼 인도군으로 소속을 옮기고 본국으로 귀국하게 됐다. 이 구르카족 부대는 말레이와 싱가포르에서 시크족 부대가 맡고 있던 군대와 경찰 임무를 맡았다.
특히 싱가포르 경찰에 배치된 구르카인들은 치안 유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50년 12월 11~13일 싱가포르에선 ‘마리아 허토흐 폭동’이 발생했다. 이 폭동은 싱가포르 법정이 체 아미나 빈트 모하마드라는 이름으로 말레이계 무슬림 가정에서 성장한 13세 소녀를 네덜란드계 가톨릭교도인 생물학적 부모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판결하면서 벌어졌다. 무슬림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이 어린이가 성모마리아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시위는 폭동으로 번졌다. 18명이 사망하고 173명이 부상했다. 구르카족의 용감하고 합리적이며 헌신적인 대처 덕분에 사태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고 진정됐다.
리콴유 총리가 싱가포르 경찰에 구르카족 분견대 설치
구르카족이 영국과 옛 영국 식민지 국가에서 군사와 경찰 업무에 종사하는 데는 역사적인 사연이 있다. 네팔의 한 부족인 구르카족은 1814~1816년 벌어졌던 영국-네팔 전쟁에서 용맹성과 탁월한 전투 능력을 보여줬다. 네팔은 당시 고르카(지금도 인도에선 고르카로 부른다) 왕국이라는 이름의 독립 국가였는데, 이 때문에 구르카라는 부족의 이름이 곧 네팔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전쟁 당시 구르카족을 눈여겨본 영국군은 이들을 적으로 두기보다 아군으로 포섭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구르카족 부대를 조직해 식민지 인도군의 한 부분으로 배치했다. 급여를 지급하는 직업군인 부대이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고 1949년 4월 9월 영국-인도-네발 삼각 합의가 이뤄지면서 구르카족 군인들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인도 또는 영국을 선택했다. 10개의 구르카족 연대 중 6개가 인도군으로 가고 4개가 영국군을 택했다. 현재 인도군은 7개의 구르카 연대에서 39개 대대를 운영한다. 이 가운데 6개 연대는 독립 직후 식민지 군대였던 ‘영국인도군’에서 넘어온 부대이며 1개 연대는 독립 이후 신설됐다. 독립 후 구르카 연대를 추가로 설치한 것은 그만큼 이들의 전력이 인도군에 필요했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영국인도군의 구르카 부대 중 4개 연대는 1948년 1월 1일자로 영국군에 배속돼 말레이와 싱가포르에 배치됐다. 이들은 현재 영국군 구르카 여단을 이루고 있다. 말레이에 배치된 구르카 부대는 2차 대전 당시 버마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벌였던 것처럼 정글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49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로 근거지를 옮긴 영국군 소속 구르카족 부대는 단순한 경비 임무를 넘어 실전에 투입됐다. 1948년 당시 영국 식민지이던 말레이에서 ‘말라야 비상사태(Malayan Energency)’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말라야 비상사태는 말레이 공산당 산하 무장단체인 말라야 민족해방군(MNLA)이 영국군을 대상으로 독립을 요구하면서 게릴라전을 벌인 사건이다. 1960년까지 계속된 이 사태로 말레이 지역은 혼란에 휩싸였다. 이 사태가 진행 중인 1957년 8월 31일 말레이 식민지는 말라카 해협의 또 다른 영국 식민지인 페냥과 말라카를 합쳐 말라야 연방이란 국가로 독립했다. 말라야 연방은 1963년 싱가포르와 보르네오섬의 북보르네오와 사라와크 등 인근 영국 식민지를 통합해 새롭게 말레이시아 연방을 구성했다.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돼 화교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다민족 국가로 새 출발했다.
말라야 비상사태가 발생하자 영국은 총력을 다해 공산군 봉기에 대항했다. 사태가 발생할 당시 영국은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 총리가 집권하고 있었다. 애틀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45년부터 한국전쟁 이듬해인 51년까지 총리를 지내며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로 요약되는 20세기 복지국가를 건설한 인물이다. 하지만 외교에선 확고하게 친미·반소·반공 정책을 견지했다. 2차대전 후 초 강대국이 된 미국과 소련이 냉전(1945~91년)에 들어가자 냉정한 판단으로 미국을 편들며 자유진영의 핵심 역할을 했다. 소련이 동유럽 등에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좌파정당인데도 반공·반소·친미 정책을 폈다.
1947년 이후 노동당내 좌파들이 ‘계속 좌향좌(Keep Left)’를 주장하며 유럽사회민주주의를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제3세력으로서 중립정책을 요구했지만 애틀리는 듣지 않았다. 대신 국민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소련은 물론 영국 공산당과도 멀리했다. 공산당과 가까이하는 노동당원은 가차 없이 제명했다. 국민의 지지 속에 내정 개혁을 완수하려면 공산당이나 소련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국민에게 확신시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냉전은 사실 영국 역사상 가장 길고 비용이 많이 들어간 전쟁이었다. 핵무기를 포함한 재무장에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갔다. 애틀리는 1949년 4월 공산권에 대항하는 서방 집단 방위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창설에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영국이 독자 노선을 걸으려면 핵무기 보유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47년 1월 자체 핵무기 개발을 지시했다. 애틀리의 핵 자주권 확보 노력은 정권이 바뀐 52년 남호주에서의 핵실험으로 결실을 맺었다. 말레이 비상사태는 영국의 노동당 정권이 핵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발생했다. 영국이 사태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전후 복구와 식민지 경제 부흥을 위해 말레이의 광산의 주석과 플랜테이션의 고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세계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군대를 모두 모았다. 물론 핵심은 말레이 여단을 주축으로 하는 25만 명의 말레이 방위군이었다. 영국군이 말레이 현지에서 현지인을 훈련시켜 구성한 식민지 군대다. 그 중추는 말레이인만 사병으로 근무하는 특수부대인 말레이 여단이었다. 당시 2개의 공수 대대, 1개의 기갑대대, 22개의 경보병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였다. 이 식민지 여단은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영국군 휘하에서 일본군을 대상으로 말레이 전투와 싱가포르 전투를 치른 역전의 부대다. 특수 훈련에 용맹성까지 갖춰 말레이 여단은 ‘말레이 구르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물론이 부대는 말레이인만 사병으로 근무해 쿠르카인은 없었다. 구르카족의 용맹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던 셈이다.
영국군은 4만 명의 영국군과 영연방군도 동원됐다. 영연방인 호주와 뉴질랜드의 군대와 함께 영국군 직할 식민지 부대들이 대거 나섰다. 케냐·우간다·탄자니아(당시엔 잔지바르와 탕가니카)·말라위(당시엔 니야살랜드) 등을 기반으로 하는 ‘킹스 동아프리카 소총부대(KAR)’도 동원됐다. 이 부대는 1차대전의 아프라카 전역과 2차대전의 에티오피아·소말릴랜드(현재 소말리아 북부 지역)에서 파시스트 이탈리아군에 대항해, 마다가스카르에선 프랑스 비시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아프리카 지역은 물론 버마에도 원정해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다.
영국은 1차대전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식민지 부대를 대거 유럽 전선에 투입했다. 인도군의 경우 영국군 휘하에서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제2차 보어전쟁(1899~1902),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제1차 와지리스탄 전쟁(1919~1920)과 제2차 와지리스탄 전쟁(1936~1939),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에 참전했다. 특히 1차대전 당시에는 인도 국민의회의 협조를 얻어 100만 명 이상의 병사들이 지원하고 원정부대를 조직해 프랑스 등 유럽 전선 등에 참전했다. 이 가운데 최소 7만4787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 뉴델리에 있는 주황색의 ‘인다아 문’은 1914~1921년 전사한 인도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1931년 건설됐다.
인도군의 영국 전쟁 참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이어졌다. 인도군은 1939년 1차대전 발발 당시 20만 명 수준이던 인도군의 병력은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엔 250만 명이 넘었다. 인도군 가운데서도 구르카족은 발군이었다. 이들의 주특기는 은밀한 야간 기습이었다. 구르카 병사는 언제나 몸에 지니는 부족 전통의 단검인 쿠크리를 실전에서 사용했다. 이들은 야간에 2인 1조로 보초를 서는 독일군이나 이탈리아군 초소를 몰래 침입해 한 명의 목만 잘라갔다. 졸다 깨어보니 옆의 동료가 목 없이 피를 흘리고 있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살아남은’ 독일군 병사의 비명 소리는 부대 전체를 공포에 휩싸이게 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보초는 물론 전체 병력이 며칠 동안 밤새 뜬 눈으로 밤을 세우기 일쑤였다. 그러다 지쳐 사기와 판단력이 흐려질 무렵 영국군은 야습을 해서 피로에 지친 독일군을 섬멸했다.
부족 전통의 단검인 쿠크리 실전에서 사용
말레이와 브루나이 사태가 일단락되자 구르카 부대는 모두 홍콩으로 이동 배치돼 주로 보안과 경비 업무를 맡았다. 주로 국경 경비를 맡으면서 밀수와 불법이민을 단속했다. 1966년 홍콩 폭동에서도 역할을 했다. 당시 홍콩의 식민지 행정당국이 홍콩 섬과 주룽(九龍)반도를 오가는 해상 페리 요금을 인상하자 시민들이 항의 시위로 시작했다가 폭력 사태로 번졌다. 1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했으며 1800여 명이 체포됐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에 회귀되면서 홍콩에 주둔하던 구르카 부대는 본부와 훈련소 문을 닫고 영국으로 이동했다.
구르카족 부대는 영국군의 일부로 세계에 분쟁 지역에 투입돼왔다. 1974년 터키가 키프로스를 침공하자 영국은 1개 구르카 연대를 키프로스 내 영국 해외 영토이자 군사기지인 데칼리아 주둔지로 보내 경계를 강화했다. 구르카 부대는 1999년 코소보 전쟁 당시 영국군의 일원으로 다시 한 번 용맹성을 보여줬다. 다국적 평화유지군 가운데 마케도니아에서 코소보로 가장 먼저 진입해 수색, 정찰, 지뢰 제거, 장애물 정리 등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위험한 작전에서 항상 최전선에 선다는 구르카족의 전통이 살아있음을 보여줬다.
佛 외인 부대와 더불어 국제법상 특수성 인정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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