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로 이룬 아메리칸 드림
운동화로 이룬 아메리칸 드림
척 테일러, 농구에 대한 사랑과 헌신 바탕으로 미국 문화의 아이콘 ‘컨버스’ 운동화 신화 일궈내 그의 이름은 너무도 잘 알려졌다. 아마 그의 서명이 들어 있는 운동화를 한 번 정도는 대부분 신어 봤을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처음 가졌는데 그 후로 계속 사다보니 몇 켤레나 구입했는지 셀 수도 없다. 구입한지 얼마 되지 않는 운동화도 지금 내 신발장에 들어 있다. 열세 살짜리 내 딸도 얼마 전 빨간색으로 그 운동화를 샀다. 하지만 운동할 때 신기 위한 것은 아니다. 딸아이는 그냥 그 신발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아이 친구들도 전부 같은 생각이다.
그의 운동화는 처음 나온 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랑 받는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름을 잘 아는 그 사람에 관해 놀라운 점이 있다. 컨버스 운동화로 유명한 척 테일러가 마이클 조던 같은 스타는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테일러는 농구 선수였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라서 컨버스 운동화에 그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아니다. NBA는 1949년이 돼서야 설립됐다. 테일러는 1920~30년대에 성인의 나이에 들어섰다. 그 당시 유명한 야구 선수는 많았다.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 같은 야구의 전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야구 선수는 운동화를 신지 않는다. 복싱에서도 잭 뎀프시와 조 루이스 같은 스타들이 있었다. 그러나 복싱 신발을 대중에게 팔 수 있는가? 그렇다면 ‘맨오워’와 ‘시비스킷’ 같은 스타(명마)들이 이름 날렸던 경마는 어떤가? 그런 명마는 사람의 신발과 다른 편자를 착용한다.
척 테일러가 운동화에 이름을 넣게 된 것은 그가 미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세일즈맨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1년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났다. 농구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농구는 제임스 나이스미스 박사가 1891년 발명했다(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 YMCA에서 강사로 일하던 중 뉴 잉글랜드의 기나긴 겨울 동안 그의 학생들에게 적합한 실내활동을 위해 고안했다). 스마트폰은 말할 필요도 없고 TV가 나오기도 오래 전이었다. 요즘 스포츠를 이끄는 매스미디어 스타 파워도 그땐 생각하지도 못했을 때였다.테일러는 인디애나주 컬럼버스에서 성장하면서 그곳 고등학교의 농구 스타였다. 1919년 고교를 졸업한 후 그는 컬럼버스 커머셜스를 비롯해 여러 곳의 준프로 팀에서 뛰었다. 그런 팀의 데뷔 경기는 현지 신문에서나 겨우 언급될 정도였다. 그때까지 만해도 농구는 황금시간대에 중계되거나 진정한 프로 리그를 만들 준비가 아직 되진 않았지만 농구의 인기는 미국 중서부에서 시작돼 전국의 고등학교와 대학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농구 골대는 도시와 시골 어디에도 당연히 있는 붙박이 시설이 됐다. 농구는 돈이 많이 들지 않았고 경기하기도 쉬웠다.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는 스포츠였다.
그러나 농구 선수를 직업으로 삼는 것은 테일러에겐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그는 1922년 운동화 회사 컨버스의 시카고 지사 판매부에 취직했다. 저술가 니콜라스 스미스는 신저 ‘킥스: 놀라운 미국 운동화 이야기(Kicks: The Great American Story of Sneakers)’에 이렇게 적었다. “농구화는 저절로 팔리지 않았다. 척 테일러는 컨버스에서 일하면서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스미스는 테일러가 어머니와 가진 대화를 이렇게 돌이킨다(이 대화가 그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됐다).
“누구에게 농구화가 필요하지?” 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농구 선수가 신죠.” 그가 답했다.
“선수에게 누가 농구화를 사주지?”
“팀 감독과 학교 간부들이죠.”
“그럼 넌 지금까지 엉뚱한 곳에 가서 농구화를 팔려고 했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팀 감독들에게 가서 네 농구화를 보여줘봐.”
테일러는 어머니의 그 한마디에서 깨달음을 얻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준프로 팀에서 뛴 경력과 농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사랑을 무기로 삼았다. 테일러는 다음 40년 동안 미국 전역을 누비며 선수와 감독들을 위한 임시 강습소를 열어 그들에게 농구의 모든 면을 가르쳤다. 루이지애나주립대학의 스타 선수와 체육부장 출신으로 컨버스의 임원을 지낸 조 딘은 “테일러는 미국 전역을 돌며 코트 현장 강의와 실습으로 아이들이 농구를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돌이켰다. “한때 그는 미국의 모든 대학 농구팀 감독을 전부 다 알았다.”그의 강의와 실습이 인기를 끌자 현지 신문은 그가 등장하면 반드시 동행 취재했다. 테일러는 현란한 농구 기술로 관중을 열광시켰다. 스미스는 책에서 1937년 관중석에 있던 노터데임대학 2학년생 레이 마이어를 코트로 불러낸 일을 소개한다. 마이어는 시카고트리뷴 신문이 대학 농구에서 가장 무서운 팀이라고 묘사한 내셔널 챔피언십 팀 소속이었다. “테일러는 실습에서 늘 하는 아주 간단한 도전을 마이어에게 제시했다. 공을 빼앗는 것이었다.”
그때쯤 테일러는 30대 중반으로 배가 약간 나오고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했다. “반면 마이어는 그보다 10년 이상 어려 날렵하고 힘이 넘쳤다.” 마이어는 그런 ‘아저씨’에게서 공을 빼앗기는 누워 떡먹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이어는 수년 뒤 이렇게 돌이켰다. “그의 패스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공을 귀신처럼 잘 다뤘다.”
‘노룩 패스(no-look pass, 경기에서 수비수를 속이기 위해 자기 편을 보지않고 다른 방향을 보면서 패스하는 동작)’는 매직 존슨의 전유물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훨씬 전에 테일러가 이미 그 기술을 마스터했다. 그게 그의 장기 중 하나였다.
테일러는 농구에서 ‘조니 애플시드’의 역할을 했다(미국 개척시대에 전역을 돌며 주민에게 사과 씨를 나눠줘 미국에 사과가 풍성하게 열리도록 만든 전설적인 인물을 조니 애플시드로 불렀다). 하지만 그 외에 그는 ‘컨버스 농구 연감(Converse Basketball Yearbook)’도 창간했다. 유명 감독들의 전략 분석, 선수 명단, 시즌 실적, 팀 사진 등을 수록한 연감이었다. 하지만 판촉 미끼도 있었다. 연감에 사진을 내고 싶다면 팀 대다수가 컨버스 운동화를 신어야 했다.
무엇보다 그 연감에서 유망 선수를 발굴하는 ‘테일러 올-아메리칸(Taylor All-Americans)’이 최고 인기였다. 테일러는 오랜 기간 전국을 돌며 강습을 했기 때문에 신뢰가 쌓였고 재능을 알아보는 눈이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테일러는 대도시만이 아니라 시골 선수들도 발굴해 거기에 올렸다. 스미스는 “예를 들어 네브래스카주에 있는 고등학교의 선수라면 전국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 연감에 소개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매년 수십만 부가 발송되는 그 연감에 실리면 쉽게 뜰 수 있었다.”
그 연감은 절묘한 전략이었다. 그로 인해 컨버스는 미국 농구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테일러는 농구와 컨버스 브랜드를 홍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운동화 디자인과 공학에 관해서도 중요한 기여했다. 1934년이 되자 테일러는 그 분야에서 확실히 ‘스타’가 됐다. 그래서 컨버스 운동화의 발목 부분에 부탁된 앵클 패치에 그의 서명이 들어갔다. 지금도 그 앵클 패치가 컨버스 운동화의 특징이다.컨버스 외에 세일즈맨의 이름을 딴 다른 대표적인 미국 브랜드가 있을까? 확실치 않지만 아마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테일러를 단순히 ‘세일즈맨’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 호로비치를 그냥 ‘피아노 연주자’로,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그냥 ‘역도 선수’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테일러는 평생 ‘농구 전도사’였다. 그를 농구계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라고 부를 만하다. 컨버스 운동화 판매는 그 다음의 일이었다.
수십 년 동안 곳곳을 누비며 농구와 컨버스 운동화의 복음을 설파한 그는 1960년대 중반 은퇴했다. 그동안 테일러는 단 한번도 컨버스에 자신의 서명 사용료를 요구하지 않았고 여행 경비만 대주기를 요청했다. 테일러는 개인생활에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다시 결혼했다. 자녀는 없었다. 조 딘은 “그는 오랫동안 집도 없이 지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년 365일 호텔에서 살았다.”
테일러가 진정으로 좋아한 것이 농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1968년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1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1970년대가 되면서 컨버스는 농구 코트에서 지배권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뒤로 스케이트보더, 래퍼, 펑크 로커, 그런지 아티스트 등 주류에 반기를 든 문화 선구자들이 컨버스 운동화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컨버스는 미국의 문화 아이콘 중 하나가 됐다.
컨버스의 로드니 람보 마케팅 담당 부사장은 스포츠 전문매체 SI.com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척 테일러가 단순히 운동화가 아니라는 점을 자신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누구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블랭크 캔버스’였다. ‘자기표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척 테일러, 올스타(Chuck Taylor, All-Star)’의 저자 에이브러햄 아미더는 “그는 스스로 자신을 개조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미국인”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꼭 집어 말하기 어렵다. 그가 노벨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뛰어난 수학자도 아니고 불멸의 음악가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뛰어난 점은 모험적인 사업가 정신을 가진 평범한 미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척 테일러는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이었다. 미국이 그의 운동화와 사랑에 빠진 증거가 바로 내 신발장에 들어 있다. 딸아이에게도 있다. 그뿐이 아니라 전 세계 수억 명의 고객과 팬들의 신발장에도 들어 있다.
- 리 하비브
※ [필자는 세일럼 미디어 그룹의 콘텐트 담당 부사장이며 미국 라디오 프로그램이자 팟캐스트인 ‘아메리칸 스토리(Our American Stories)’ 진행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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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운동화는 처음 나온 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랑 받는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름을 잘 아는 그 사람에 관해 놀라운 점이 있다. 컨버스 운동화로 유명한 척 테일러가 마이클 조던 같은 스타는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테일러는 농구 선수였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라서 컨버스 운동화에 그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아니다. NBA는 1949년이 돼서야 설립됐다. 테일러는 1920~30년대에 성인의 나이에 들어섰다. 그 당시 유명한 야구 선수는 많았다.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 같은 야구의 전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야구 선수는 운동화를 신지 않는다. 복싱에서도 잭 뎀프시와 조 루이스 같은 스타들이 있었다. 그러나 복싱 신발을 대중에게 팔 수 있는가? 그렇다면 ‘맨오워’와 ‘시비스킷’ 같은 스타(명마)들이 이름 날렸던 경마는 어떤가? 그런 명마는 사람의 신발과 다른 편자를 착용한다.
척 테일러가 운동화에 이름을 넣게 된 것은 그가 미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세일즈맨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1년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났다. 농구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농구는 제임스 나이스미스 박사가 1891년 발명했다(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 YMCA에서 강사로 일하던 중 뉴 잉글랜드의 기나긴 겨울 동안 그의 학생들에게 적합한 실내활동을 위해 고안했다). 스마트폰은 말할 필요도 없고 TV가 나오기도 오래 전이었다. 요즘 스포츠를 이끄는 매스미디어 스타 파워도 그땐 생각하지도 못했을 때였다.테일러는 인디애나주 컬럼버스에서 성장하면서 그곳 고등학교의 농구 스타였다. 1919년 고교를 졸업한 후 그는 컬럼버스 커머셜스를 비롯해 여러 곳의 준프로 팀에서 뛰었다. 그런 팀의 데뷔 경기는 현지 신문에서나 겨우 언급될 정도였다. 그때까지 만해도 농구는 황금시간대에 중계되거나 진정한 프로 리그를 만들 준비가 아직 되진 않았지만 농구의 인기는 미국 중서부에서 시작돼 전국의 고등학교와 대학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농구 골대는 도시와 시골 어디에도 당연히 있는 붙박이 시설이 됐다. 농구는 돈이 많이 들지 않았고 경기하기도 쉬웠다.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는 스포츠였다.
그러나 농구 선수를 직업으로 삼는 것은 테일러에겐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그는 1922년 운동화 회사 컨버스의 시카고 지사 판매부에 취직했다. 저술가 니콜라스 스미스는 신저 ‘킥스: 놀라운 미국 운동화 이야기(Kicks: The Great American Story of Sneakers)’에 이렇게 적었다. “농구화는 저절로 팔리지 않았다. 척 테일러는 컨버스에서 일하면서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스미스는 테일러가 어머니와 가진 대화를 이렇게 돌이킨다(이 대화가 그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됐다).
“누구에게 농구화가 필요하지?” 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농구 선수가 신죠.” 그가 답했다.
“선수에게 누가 농구화를 사주지?”
“팀 감독과 학교 간부들이죠.”
“그럼 넌 지금까지 엉뚱한 곳에 가서 농구화를 팔려고 했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팀 감독들에게 가서 네 농구화를 보여줘봐.”
테일러는 어머니의 그 한마디에서 깨달음을 얻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준프로 팀에서 뛴 경력과 농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사랑을 무기로 삼았다. 테일러는 다음 40년 동안 미국 전역을 누비며 선수와 감독들을 위한 임시 강습소를 열어 그들에게 농구의 모든 면을 가르쳤다. 루이지애나주립대학의 스타 선수와 체육부장 출신으로 컨버스의 임원을 지낸 조 딘은 “테일러는 미국 전역을 돌며 코트 현장 강의와 실습으로 아이들이 농구를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돌이켰다. “한때 그는 미국의 모든 대학 농구팀 감독을 전부 다 알았다.”그의 강의와 실습이 인기를 끌자 현지 신문은 그가 등장하면 반드시 동행 취재했다. 테일러는 현란한 농구 기술로 관중을 열광시켰다. 스미스는 책에서 1937년 관중석에 있던 노터데임대학 2학년생 레이 마이어를 코트로 불러낸 일을 소개한다. 마이어는 시카고트리뷴 신문이 대학 농구에서 가장 무서운 팀이라고 묘사한 내셔널 챔피언십 팀 소속이었다. “테일러는 실습에서 늘 하는 아주 간단한 도전을 마이어에게 제시했다. 공을 빼앗는 것이었다.”
그때쯤 테일러는 30대 중반으로 배가 약간 나오고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했다. “반면 마이어는 그보다 10년 이상 어려 날렵하고 힘이 넘쳤다.” 마이어는 그런 ‘아저씨’에게서 공을 빼앗기는 누워 떡먹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이어는 수년 뒤 이렇게 돌이켰다. “그의 패스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공을 귀신처럼 잘 다뤘다.”
‘노룩 패스(no-look pass, 경기에서 수비수를 속이기 위해 자기 편을 보지않고 다른 방향을 보면서 패스하는 동작)’는 매직 존슨의 전유물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훨씬 전에 테일러가 이미 그 기술을 마스터했다. 그게 그의 장기 중 하나였다.
테일러는 농구에서 ‘조니 애플시드’의 역할을 했다(미국 개척시대에 전역을 돌며 주민에게 사과 씨를 나눠줘 미국에 사과가 풍성하게 열리도록 만든 전설적인 인물을 조니 애플시드로 불렀다). 하지만 그 외에 그는 ‘컨버스 농구 연감(Converse Basketball Yearbook)’도 창간했다. 유명 감독들의 전략 분석, 선수 명단, 시즌 실적, 팀 사진 등을 수록한 연감이었다. 하지만 판촉 미끼도 있었다. 연감에 사진을 내고 싶다면 팀 대다수가 컨버스 운동화를 신어야 했다.
무엇보다 그 연감에서 유망 선수를 발굴하는 ‘테일러 올-아메리칸(Taylor All-Americans)’이 최고 인기였다. 테일러는 오랜 기간 전국을 돌며 강습을 했기 때문에 신뢰가 쌓였고 재능을 알아보는 눈이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테일러는 대도시만이 아니라 시골 선수들도 발굴해 거기에 올렸다. 스미스는 “예를 들어 네브래스카주에 있는 고등학교의 선수라면 전국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 연감에 소개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매년 수십만 부가 발송되는 그 연감에 실리면 쉽게 뜰 수 있었다.”
그 연감은 절묘한 전략이었다. 그로 인해 컨버스는 미국 농구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테일러는 농구와 컨버스 브랜드를 홍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운동화 디자인과 공학에 관해서도 중요한 기여했다. 1934년이 되자 테일러는 그 분야에서 확실히 ‘스타’가 됐다. 그래서 컨버스 운동화의 발목 부분에 부탁된 앵클 패치에 그의 서명이 들어갔다. 지금도 그 앵클 패치가 컨버스 운동화의 특징이다.컨버스 외에 세일즈맨의 이름을 딴 다른 대표적인 미국 브랜드가 있을까? 확실치 않지만 아마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테일러를 단순히 ‘세일즈맨’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 호로비치를 그냥 ‘피아노 연주자’로,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그냥 ‘역도 선수’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테일러는 평생 ‘농구 전도사’였다. 그를 농구계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라고 부를 만하다. 컨버스 운동화 판매는 그 다음의 일이었다.
수십 년 동안 곳곳을 누비며 농구와 컨버스 운동화의 복음을 설파한 그는 1960년대 중반 은퇴했다. 그동안 테일러는 단 한번도 컨버스에 자신의 서명 사용료를 요구하지 않았고 여행 경비만 대주기를 요청했다. 테일러는 개인생활에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다시 결혼했다. 자녀는 없었다. 조 딘은 “그는 오랫동안 집도 없이 지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년 365일 호텔에서 살았다.”
테일러가 진정으로 좋아한 것이 농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1968년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1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1970년대가 되면서 컨버스는 농구 코트에서 지배권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뒤로 스케이트보더, 래퍼, 펑크 로커, 그런지 아티스트 등 주류에 반기를 든 문화 선구자들이 컨버스 운동화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컨버스는 미국의 문화 아이콘 중 하나가 됐다.
컨버스의 로드니 람보 마케팅 담당 부사장은 스포츠 전문매체 SI.com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척 테일러가 단순히 운동화가 아니라는 점을 자신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누구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블랭크 캔버스’였다. ‘자기표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척 테일러, 올스타(Chuck Taylor, All-Star)’의 저자 에이브러햄 아미더는 “그는 스스로 자신을 개조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미국인”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꼭 집어 말하기 어렵다. 그가 노벨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뛰어난 수학자도 아니고 불멸의 음악가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뛰어난 점은 모험적인 사업가 정신을 가진 평범한 미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척 테일러는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이었다. 미국이 그의 운동화와 사랑에 빠진 증거가 바로 내 신발장에 들어 있다. 딸아이에게도 있다. 그뿐이 아니라 전 세계 수억 명의 고객과 팬들의 신발장에도 들어 있다.
- 리 하비브
※ [필자는 세일럼 미디어 그룹의 콘텐트 담당 부사장이며 미국 라디오 프로그램이자 팟캐스트인 ‘아메리칸 스토리(Our American Stories)’ 진행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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