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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실존적 위협 ‘부패한 올리가르히화’

유럽의 실존적 위협 ‘부패한 올리가르히화’

정권과 유착한 신흥재벌 집단에 경제적·정치적 힘 몰아줘 장기적으로 독재가 기승 부릴 수 있어
오스트리아 극우 자유당 소속의 하인츠 크리스티안 슈트라헤 전 부총리 (왼쪽 사진)와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부패한 올리가르히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사진:REUTERS/YONHAP
지금 유럽이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이 무엇일까? 흔히 떠올리는 것이 러시아의 발트해 지역 침공 가능성이나 유럽의 주요 도시를 표적으로 하는 테러 공격일 것이다. 물론 이런 위협도 실질적이기 때문에 최대한 억지하고 예방해야 한다. 그러나 유럽의 근본적인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실존적인 위협은 지배 구조(governance)의 문제다. 유럽 정치의 ‘부패한 올리가르히화’ 위협을 가리킨다. 올리가르히는 러시아의 신흥재벌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경유착의 근원으로 지목된다.

부패 스캔들로 물러난 오스트리아 극우 자유당 소속의 하인츠 크리스티안 슈트라헤 전 부총리의 경우를 보자. 슈트라헤는 부총리가 되기 전인 2017년의 한 동영상이 최근 폭로되면서 사퇴했다. 그 동영상에는 슈트라헤가 스페인 이비사 섬에서 러시아 재벌의 조카라는 여성에게 정부 사업권을 대가로 재정 후원을 요구하면서 정치자금법 규정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비밀리에 촬영된 이 동영상은 유럽의 주류 정치인의 양심을 아프게 찔렀다. 그러나 그 폭로에서 드러난 실제 내용은 사실 크게 놀랍지 않다. 지금 유럽 대륙을 휩쓰는 ‘부패한 올리가르히화’의 훨씬 더 넓은 추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럽 전체를 휩쓰는 ‘부패한 올리가르히화’ 현상은 이념적으로는 쉽게 분류하기 어렵다. ‘좌익 대(對) 우익’이나 ‘아웃사이더 포퓰리스트 대(對) 주류 정치인’의 대치라는 프레임에도 별로 잘 들어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에선 집권 사회민주당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행동을 일삼는다. 오스트리아의 슈트라헤 전 부총리의 극우 자유당의 행동과 별로 다르지 않다. 좌파 성향의 루마니아 사회민주당 정부는 올해 들어 검찰 권한 축소와 반부패법령 완화 등을 담은 사법제도 개편안을 비상행정명령 형식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몰도바의 경우 친서방주의를 내세우는 집권 민주당이 친러시아 정당들만큼이나 부패하고 올리가르히적인 시스템을 영속시킨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런 정당들의 공통점은 부패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면서 러시아처럼 정권과 유착된 올리가르히 집단의 손에 경제적 자원과 정치적 힘을 몰아준다는 것이다. 적어도 현재로선 오스트리아·루마니아·몰도바를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부패한 올리가르히화’는 장기적으로 독재 정권이 득세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제기한다. 이것이 유럽의 진정한 실존적 위협이다.

현재 부패한 올리가르히에 맞서는 투쟁의 전선은 대부분 우크라이나·조지아·아르메니아 등 유럽의 동부에 위치한다. 그곳에서 민주주의 수호 세력은 부패하고 올리가르히적인 세력과 자주 충돌한다. 투표소에서만이 아니라 민심을 얻으려는 더 넓은 투쟁의 일부분으로서도 그렇다.

조지아의 장미 혁명, 우크라이나의 존엄성 혁명(유로마이단 혁명), 아르메니아의 벨벳 혁명은 전부 부패한 올리가르히에 저항한 자발적인 시민 봉기였다. 이 국가들의 수도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잘 알듯이 이런 혁명이 몰고 온 정치적 투쟁은 거리의 시위자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그 국가 권력 기관을 상대로 계속되고 있다.

서방 분석가들이 자주 범하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부패한 올리가르히화’가 동유럽에 국한된 현상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부패한 올리가르히화’ 문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나라가 있다면 그 국가는 바로 유럽의 심장부에 위치한 헝가리다.

헝가리의 집권 피데스당은 빅토로 오르반 총리의 지도 아래서 지난 20년 동안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견제와 균형 시스템을 점진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해체함으로써 권력을 집중시켰다. 민주주의 제도를 향한 이런 정치적 공격은 국가의 경제적 자원이 오르반 총리와 개인적으로 연결된 소규모 올리가르히 집단의 손에 집중돼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르반 총리의 측근들은 정부 계약 특혜를 통해 막대한 자원을 축적했다. 거기서 얻은 경제적 이득으로 그들은 TV 방송사와 신문사를 사들였다. 헝가리의 주요 언론 매체를 정권과 유착한 올리가르히가 사실상 독점한다는 뜻이다. 이 거대한 미디어 제국 덕분에 오르반 총리가 이끄는 헝가리의 집권 피데스당은 야당보다 정치적으로 크게 유리한 입장이다. 그뿐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정부의 부패와 관련된 뉴스가 주류 매체에서 보도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동시에 오르반 총리는 사법부와 법집행 기관에 추종자들을 포진시키면서 자신의 올리가르히 친구들에게 우호적인 생태계를 구축했다.

러시아 외부에서는 헝가리의 ‘부패한 올리가르히화’ 과정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러나 최근 오스트리아를 휩쓴 슈트라헤 전 부총리의 스캔들은 서유럽 국가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덴마크 단스케방크와 독일 도이체방크가 연루된 대규모 자금세탁 스캔들은 서방의 금융기관도 ‘부패한 올리가르히화’의 영향에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오스트리아의 슈트라헤 전 부총리와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비호를 받는다는 사실은 ‘부패한 올리가르히화’가 지배 구조의 문제일 뿐 아니라 더 광범위한 지정학적 경쟁의 일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최근 들어 러시아와 중국은 유럽 전역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올리가르히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다행히도 ‘부패한 올리가르히화’를 향한 유럽 대중의 반발도 커지고 있다. 최근 슬로바키아는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반부패 운동가를 대통령에 선출했다. 북마케도니아는 올리가르히 정권을 몰아냈다. 슬로바키아·루마니아·세르비아의 거리에서는 수백만 명의 시위자들이 쏟아져 나와 ‘부패한 올리가르히화’의 종식을 요구했다. ‘부패한 올리가르히화’를 막으려는 그들에겐 우리 모두의 지지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들의 싸움은 유럽의 양심과 영혼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 마이클 카펜터



※ [필자는 미국 펜 바이든 외교·글로벌 관여센터 이사이며 애틀랜틱 카운슬의 선임 연구원이다. 이 글의 내용은 필자 개인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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