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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2차 경제보복] 한·일 경제전쟁 전면전으로 치닫나

[일본의 2차 경제보복] 한·일 경제전쟁 전면전으로 치닫나

일본 정부,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 제외… 한국 산업계, 대체 수입선 확보 등 분주
8월 2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전광판에 문재인 대통령의 국무회의 중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국가 배제 관련 발언이 생중계되고 있다.
일본 정부가 8월 2일 각의에서 한국을 수출심사 우대대상인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 명단)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처리했다. 주무대신 서명과 총리 연서 등의 절차를 거치면 21일 후인 8월 하순부터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가 실행된다. 이대로 진행될 경우 2004년 일본의 화이트 리스트에 오른 한국은 15년 만에 수출 우대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일본 화이트리스트에 포함됐다가 제외되는 첫 사례다.

화이트리스트는 ‘우대 조치’다. 일본은 수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우방국을 화이트 국가로 지정해 우대한다. 화이트 국가에 수출할 땐 한번만 포괄적으로 허가받으면 3년간 개별 품목에 대한 심사를 면제하는 ‘포괄허가제’를 적용한다. 바꿔 말해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할 경우 민감한 물품을 수출할 때 까다롭게 들여다본다는 얘기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면 첨단소재·전자·통신·센서·항법장치 등 전략물자를 포함해 군사 전용 우려가 있는 1100여 개 품목을 한국으로 수출할 때마다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본은 전략물자는 물론 민수품도 무기로 쓰일 수 있는 품목은 개별 허가를 받도록 하고 있다.

이 개별 허가 수출 규제 장벽이 만만치 않다. 한국 업체가 물품을 수입할 때마다 목적과 용도, 최종 수요지 등을 일일이 알려야 한다. 수입 물품을 대량살상무기(WMD)나 WMD를 운반할 용도 등으로 쓰지 않고 민간용으로만 쓴다는 내용의 서약서도 보내야 한다.

절차가 번거로울 뿐 아니라 일본 정부 입맛에 따라 수입을 허가·불허하거나 지연시키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개별 허가를 받는 데 일반적으로 90일 걸린다. 지난 7월 4일부터 수출규제를 적용한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은 지금까지 단 한건의 수출 허가도 받지 못했다. 닛케이는 한국 기업이 중국·동남아 등지의 생산 거점으로 일본산 수입품을 가져다 쓸 때도 일본 정부의 심사 절차가 까다로워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국가에는 한국을 비롯해 아르헨티나·호주·오스트리아·벨기에·불가리아·캐나다·체코·덴마크·핀란드·프랑스·독일·그리스·헝가리·아일랜드·이탈리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뉴질랜드·노르웨이·폴란드·포르투갈·스페인·스웨덴·스위스·영국·미국 등 27개국이 지정돼 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유일했다.

국내 산업계 파장은:
산업용 핵심 소재와 부품, 기계 등을 일본에서 수입하는 국내 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7월 일본의 무역보복이 시작되면서 재고 관리와 대체재 마련에 나서 왔지만 당분간 생산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일본의 이번 조치로 1112개 품목이 수출규제 영향권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화이트리스트에서 빠지더라도 당장 수출규제가 이뤄질지는 알 수 없다. 산업계는 어떤 품목이 규제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편, 일본 수입의존도가 높은 품목을 중심으로 대체품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7월 4일 포토레지스트(감광액)·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에 대해 수출규제를 겪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는 수출규제 확대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실리콘 웨이퍼, 이미지 센서, 메탈마스크, 분리막 등 4개 소재 부품도 당장 추가 수출규제 품목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들 4대 부품은 각각 반도체, 스마트폰 내장 카메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2차전지 배터리의 핵심 소재다. 특히 일본의 세계 시장점유율이 높은 데다 국내 기업이 크게 의존하고 있어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하더라도 정상적인 경우 개별허가를 내주어야 하지만, 이들 물량에 대해 수출 허가를 지연시키거나 일부를 내주지 않을 경우 차질이 예상된다.

한국화학연구원의 ‘소재부품 분야 취약성 극복 방안’에 따르면 이들 소재의 상당수 혹은 전량은 일본에서 수입된다. 반도체의 기초재료인 실리콘 웨이퍼는 일본 기업이 세계 시장의 53%를 점유하고 있다. 신에츠 화학공업 주식회사와 섬코가 각각 27%와 26%를 차지하고 있다. 실리콘 웨이퍼의 국내 주요 수입 업체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이다. 특히 SK하이닉스는 2016년 한 해에만 웨이퍼 구입에 4877억원을 쓴 것으로 조사됐다. 전체 반도체 소재 구매액(3조8099억원)의 13%에 해당하는 액수다. 김용석 한국화학연구원 고기능고분자연구센터장은 “세계 점유율 13%인 독일 실트로닉스와 국내 기업인 SK실트론의 생산량을 증가시켜도 수급에 악영향이 가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라며 “반도체 집적회로(IC) 생산이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스마트폰·노트북PC 등의 카메라에 주로 사용되는 이미지센서 역시 소니가 51%의 시장점유율을 나타내고 있다. 삼성전자(17.8%)·SK하이닉스(2.7%)와 격차가 크다. 공급에 차질이 생길 경우 스마트폰 생산에도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중소형 OLED 디스플레이 패널을 제조에 쓰이는 핵심 부품인 섀도 마스크(FMM·Fine Metal Mask)는 100%를 일본의 DNP에서 수입하고 있다. 특히 섀도 마스크의 경우 주기적인 교체가 필요한 품목이어서 OLED 패널생산에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게 연구원의 분석이다.

2차전지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분리막 역시 여파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아사히카세이(17%), 도레이(15%), 스미토모(6%), 우베(6%), W-SCOPE(6%) 등 일본 기업이 전체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와 달리 SK이노베이션의 점유율은 약 9%에 불과하다. 김용석 센터장은 “이들 4개 품목의 경우 삼성전자·SK하이닉스·LG디스플레이·삼성디스플레이가 주요 수입 업체”라며 “반도체 수급 불안정으로 가격 상승 등 피해를 입을 미국 기업과 공동 대응을 해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이 외에도 일본 수입의존도가 90% 이상인 품목만 48개에 이른다. 방직용 섬유(99.6%), 화학 또는 연관 공업 생산품(98.4%), 차량·항공기·선박 등 수송기기 관련품(97.7%) 등으로, 이들의 총 수입액은 27억8000만 달러(3조3054억원)에 이른다. 특히 이 품목에는 한국이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주력하는 전기차 등이 포함돼 일본의 다음 타깃이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전기차 배터리 등을 생산하는 LG화학·SK이노베이션·삼성SDI 등 업체도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대응한 대비책을 고민 중이다. LG화학 신학철 부회장은 “일본의 수출규제 품목이 확대될 경우를 가정해 시나리오 플래닝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반도체·자동차 등 대기업 분야에 관심이 쏠리고 있지만 실제 피해가 커질 수 있는 분야는 중소기업 업종이란 우려도 있다. 특히 각종 공작기계나 수치제어반의 경우 일본 제품의 대체재가 있더라도 가격이 비싸거나 운용 노하우가 없어 바꾸기 어렵단 주장이다.

최근 인건비 상승 등으로 스마트공장 등 자동화 비율을 높인 제조 업체의 경우 타격이 크다. 스마트공장에 많이 쓰이는 ‘로봇 팔’은 일본 가와사키중공업의 시장점유율이 높다. 공작기계 소프트웨어 역시 일본 화낙 제품이 시장을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다. 로봇이나 공작기계 소프트웨어는 일본산 제품의 가격경쟁력과 품질이 뛰어나 다른 제품으로 대체가 쉽지 않다는 게 관련 기업의 설명이다.

기계공작업체 관계자는 “일본산 공작기계나 소형로봇 등이 국내에서 애프터세일즈도 편리하고 가격 면에서도 저렴하다”며 “대체품으로 바꾸면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성철 단국대 기계공학과 교수는 “컴퓨터수치제어(CNC) 공작기계의 경우 대부분 일본산 제품을 쓰기 때문에 일본이 수출을 제한할 경우 기계산업 전반에 타격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본 제품에 익숙한 현장 기술자가 많고 가격도 저렴해 대체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국내 산업계 대책은:
반도체 분야는 1차 무역보복에 이어 추가 피해 가능성이 크다. 파운드리(수탁생산) 시장 확대를 노리는 삼성전자는 올해부터 극자외선(EUV·Extreme UltraViolet) 공정을 도입 중이다. EUV용 감광액이 이미 수출규제 대상이 됐고, EUV용 블랭크마스크 역시 일본 광학 업체 호야(HOYA)가 독점 공급한다.

EUV 공정은 기존 불화아르곤(ArF) 노광 공정에 비해 짧은 파장으로 미세한 반도체 회로를 그릴 수 있다. 웨이퍼당 생산효율과 제품성능을 높일 수 있다. 블랭크마스크는 유리기판 위에 반도체의 미세회로를 형상화하는 포토마스크의 원재료다. 국내에서도 에스앤에스텍이 블랭크마스크를 생산하지만 호야가 세계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고, 기술 격차도 꽤 크다. 하지만 에칭가스·포토레지스트보다는 대체 가능성이 크다는 게 국내 반도체 업계의 설명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블랭크마스크의 일본 수입의존도가 높긴 하지만 7월 1차 수출규제 품목들에 비하면 재고도 충분히 확보돼 있고, 대체 가능성도 큰 편”이라고 말했다.

반도체의 바탕이 되는 실리콘 웨이퍼도 일본 수입의존도가 높지만, 대체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게 관련 업계의 설명이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미세공정 웨이퍼 시장점유율은 일본 신에츠·섬코 등이 50% 넘게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웨이퍼 업체인 SK실트론의 기술 수준이 높아 일본산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포토마스크의 오염을 막아주는 펠리클, 웨이퍼 연마장비인 CMP 등 반도체 제조 장비 역시 일본 의존도가 높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핵심 소재의 대체품을 개발하고 기존 장비의 성능을 높이는 등 일본 수출규제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계에선 한국의 핵심 수출 품목인 자동차 분야의 타격 역시 우려하고 있다. 우선 피해가 예상되는 분야는 전기차용 배터리와 수소전기차의 수소연료저장용기를 만드는 탄소섬유 분야다. 전기차 배터리는 LG화학·삼성SDI·SK이노베이션 등 국내 업체들이 세계 최고의 제조 기술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핵심 소재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기차 배터리는 양극재·음극재·전해액·분리막 등 4대 핵심 소재로 이뤄지는데, 일본 업체는 분리막의 시장점유율이 높다. 도레이·아사히카세이 등 업체가 삼성SDI와 LG화학에 분리막을 공급한다.

국내에선 SK이노베이션 자회사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가 고품질 분리막을 생산한다. SK이노베이션은 일본 분리막 업체가 한국 수출을 제한할 경우, 경쟁사에 분리막을 공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경쟁사이긴 하지만 한국 배터리 업체에 분리막을 공급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기술 유출 건을 놓고 LG화학과 소송을 벌이고 있지만 국익 차원에서 LG화학에도 분리막을 공급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탄소섬유의 경우 일본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60%가 넘지만 6개월 이내에 국산 제품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게 관련 업계의 분석이다. 탄소섬유는 현대자동차의 수소전기차 넥쏘에 들어가는 수소연료 저장용기와 수소충전소용 저장용기 등에 사용한다. 현재 넥쏘에 들어가는 수소연료 저장용기는 국내 기업인 일진복합소재에서 만든다. 이 용기의 소재로 쓰이는 고강도 탄소섬유는 일본 도레이의 국내 투자법인인 도레이첨단소재 구미공장에서 생산해 공급한다. 핵심 중간재인 프리커서(Precursor·원료섬유)는 일본에서 들여오고 국내에선 이를 탄화(炭化)해 탄소섬유를 생산하는데, 프리커서 자체는 전략물자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전략물자인 탄소섬유의 원료나 설비를 전략물자로 간주할 경우 수출이 규제될 수 있다.

일진복합소재는 일본의 무역보복 이전부터 현대자동차, 국내 탄소섬유 생산업체인 효성첨단소재 등과 대체재 연구를 해왔다. 현대차 측은 “이미 연구가 거의 끝난 상태여서 인증 절차만 밟으면 당장에도 국산 제품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시간이다. 인증 절차에 최소 6개월이 걸리고, 대체재의 물성(物性)시험, 양산 테스트 등이 필요하다. 물론 수소전기차·충전소용 물량이 아직 많지 않고 재고가 충분해 당장 생산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국내 탄소섬유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방윤혁 한국탄소융합기술원장은 “한국의 탄소섬유 기술은 선진국을 거의 따라잡았다”며 “이번 기회에 산업의 기반 경쟁력이 되는 소재 분야 투자를 늘려야 미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부 석유화학제품 역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전망이 있다. 하지만 국내 유화업계에선 국내 생산 여력이 충분하고, 공급선이 다양해 버틸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일본 수입 의존도가 높은 품목으론 자일렌과 톨루엔 등이 있다. 자일렌은 페트(PET)병과 합성섬유를 만드는 테레프탈산(TPA)의 원료인 파라자일렌(PX)을 합성하는 데 쓰인다. 톨루엔 역시 파라자일렌을 만들거나 시너 등 도료를 만드는 데 쓰인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자일렌을 10억8500만 달러(약 1조2908억원)어치 수입했다. 일본 수입 비중은 95.4%나 된다. 톨루엔의 경우 4억7500만 달러(약 5651억원)어치를 일본에서 사들였다. 톨루엔 역시 일본 수입 비중이 79.3%에 달한다. 유화 업계는 한국의 생산능력이 수입 물량을 대체하고 남는다고 말한다. 파라자일렌 생산 업체 관계자는 “우리나라가 자일렌·톨루엔을 일본에서 수입하지만, 이보다 몇 배 더 많은 양을 생산해 수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초에 일본이 석유화학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행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현대코스모 등 업체가 일본으로부터 자일렌과 같은 석유화학 품목을 들여오고 있는데, 현대코스모는 현대오일뱅크와 일본의 코스모오일의 합작사다. 업계에선 합작사가 수입하는 품목에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를 적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석유화학 원료를 꼭 일본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업계 관계자는 “물리적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일시적으로 일본산 제품의 가격이 낮은 경우나 물량을 맞춰야 하는 상황에는 일본에서 수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는 품목”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LG디스플레이 등은 어떤 품목이 추가 규제대상에 들어갈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일본 기업을 대체할 협력 업체 확보에 주력해 중국·대만 등 중화권뿐 아니라 독일·네덜란드에서도 공급처를 확보하고 있다. EUV 노광장비를 만드는 ASML이 있는 네덜란드 에인트호벤에는 각종 첨단 장비 개발업체가 밀집해 있다.

추가 규제 대상으로 거론되는 첨단 소재에 대해선 선제 대응하는 경우도 있다.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필름인 블랭크 마스크의 경우, 호야·아사히글라스 등 일본 업체로부터 내년 초까지 사용할 물량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갈등이 불거지기 전에 물량을 사전 주문한 덕분이다.

SK하이닉스는 반도체 회선을 그리는 데 쓰이는 원재료인 웨이퍼를 자매회사인 SK실트론을 통해 얻고 있다. SK실트론은 전 세계 웨이퍼 시장에서 9%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삼성 스마트폰과 가전, TV 협력 업체들도 8월 15일까지 최대한의 일본산 부품을 확보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가 최근 이들 업체에 공문을 보내 추가 비용은 삼성이 댈테니 부품 재고를 확보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자율규제 제도가 희망?: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지만, 국내 기업이 일본 내 전략물자(1120개 품목)를 수입할 방법이 전부 막힌 건 아니다. 일본 내 소재·화학 업체들이 기존처럼 포괄허가 방식으로 수출할 수 있는 ‘자율규제’ 제도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전략물자연구원에 따르면 일본은 비(非) 백색국가 수출 때도 백색국가와 사실상 동일한 수준의 혜택을 부여하는 ‘CP(Compliance Program·자율준수기업)’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CP 기업이 전략 물자를 수출할 때에는 통상 90일 걸리는 심사 기간이 1주 정도로 단축된다. 한 차례 심사만 받으면 백색국가 때와 마찬가지로 3년간 수출이 자유롭다. 일종의 ‘수출 프리패스’ 제도다.

8월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화이트리스트 배제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참가자가 발언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현재 총 632개 업체가 일본 경제산업성 홈페이지에 전략물자 CP 기업으로 등록돼 있다. 이 가운데에는 도레이·JSR·스미토모·쇼와덴코 등 일본의 주요 소재·화학 업체도 포함돼 있다. 경제산업성 홈페이지에 등재가 안 된 기업까지 합치면 1300여 곳까지 늘어난다고 한다.

도레이는 LG화학의 전기차 배터리에 들어가는 분리막, 현대차 수소전기차에 들어가는 탄소섬유를 생산하고 있다. 듀폰과도 합작업체를 세워 폴리이미드 필름을 비롯한 각종 첨단 소재를 만들고 있다. JSR은 극자외선(EUV) 공정에 들어가는 포토레지스트(감광액·PR)를 생산하고 있다. 일본 이외에 벨기에에서도 현지 연구기관과 합작 회사를 세워 PR을 생산하고 있어 한국 반도체 기업의 우회 수입처로 주목받고 있다. 스미토모화학은 삼성 폴더블 폰 ‘갤럭시 폴드’에 들어가는 화면 보호막 소재인 투명 폴리이미드(PI)를 만든다. SK와도 국내에 합작 업체를 세운 쇼와덴코는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전 세계 1위 업체다. 다만 CP 인증을 받은 기업이라도 일본 자민당 내각이 행정력을 동원한다면, 수출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앞서 수출 규제 대상에 오른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을 놓고서도 일본 정부는 통상적인 개별 수출 품목(3종) 대비 더욱 까다로운 서류 절차(7종)를 요구하고 있다.

- 세종=김기환 기자, 이동현·김영민·허정원 기자 khkim@joongang.co.kr
 [박스기사] 한국 정부의 대응 카드는 - ‘외교→통상분쟁 해결’로 방향 선회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함에 따라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 대외 공세를 본격화한다. 지금까지 외교적 해결을 위해 양자 협의 등을 추진했다면 이제는 국제통상법상 분쟁 해결에 초점을 두고 대응해 나갈 계획이다. 첫 단추는 공식 양자 협의 요청서 발송이다. 사실상 WTO 제소 첫 단계다. 요청서 자체가 제소장 역할을 하게 된다. 산업부 관계자는 “소장을 중간에 수정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일본의 법 위반 증거를 최대한 확보한 이후 제소를 해야 할 것”이라며 “시기는 전략적으로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양국은 양자 협의에 착수하지만 일본 측이 협의에 불성실하게 나오면 우리는 WTO에 재판부에 해당하는 패널 설치 요청서를 낸다. 이후 WTO 사무국이 직접 나서 재판관 3인을 선출하고 1심 절차를 진행한다. 1심 결과에 불복하면 상소기구로 사건이 올라간다. 상소심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 2년 이상 소요되는 게 일반적이다. 앞서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의 경우 일본의 제소 이후 최종 결정까지 4년가량 걸렸다. 하지만 이번엔 사안의 복잡성 등을 감안할 때 시일이 길어질 가능성도 크높다.

WTO 분쟁해결 절차에 들어가면 한일 양국은 길게는 수년이 걸리는 최종 결정까지 치열한 ‘법리 다툼’을 벌일 것으로 예상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일본의 대 한국 수출규제 강화에 대한 국제통상법적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양측이 날선 공방을 벌일 부분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조문 가운데 5개 조항이다. 이 가운데 3개 조항은 한국의 ‘창’으로, 2개 조항은 일본의 ‘방패’로 쓰일 논거가 될 전망이다.

한국이 활용할 수 있는 카드로는 우선 회원국이 수출허가 등을 통해 수출을 금지하거나 제한하지 못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는 ‘11조 1항’이 꼽힌다.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는 사실상 수출제한 조치에 해당할 소지가 많다. 이런 수출제한 행위는 관세부과보다 손쉽게 무역제한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어 WTO가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면 이를 금지하고 있다.

일본은 ‘수출 규제가 아닌 개별 수출허가제로 전환한 것’이라고 반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맞받아치기 위해서는 일본의 규제로 실제 우리의 수입 물량이 감소했고, 이것이 일본의 조치에 의한 것이라는 인과관계를 입증할 필요가 있다. 1조1항도 한국이 활용할 수 있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는 최혜국대우를 규정한 조항이다. 일본은 특혜를 부여하다 보통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외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 한 특정 국가에 계속 특혜를 주다가 취소하는 것도 1조1항에 위배된다.

WTO 회원국 간에 ‘일관적이고 공평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통상 관련 제도·법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10조3항도 한국에 유리하다. 일본이 한국만을 ‘타깃’으로 제재를 가했기에 이 조항을 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일본은 21조로 한국에 맞설 것으로 보인다. 21조는 WTO 회원국이 자신의 필수적 안보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GATT 상의 의무를 위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그간 WTO 분쟁에서 다른 조항을 무력화시키는 최상급 ‘카드’였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보호무역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를 자주 활용해왔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는 것을 증명할 어떤 구체적 증거도 내세우지 못했다. 이 때문에 되려 일본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천기 KIEP 부연구위원은 “우리 정부는 이번 수출허가 강화가 사실상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로서 또는 외교·정치적 마찰을 이유로 부과됐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해야 한다”며 “아베 총리가 선거 유세 과정에서 일본의 공식입장인 ‘국가안보 위협’과는 맞지 않는 언급이 있었는데, WTO 제소 때 이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일본의 또 다른 방패막이는 전략물자 수출통제 실효성 확보를 위한 예외조치를 인정한 20조다. 그러나 조치를 취하기 전에 이해 당사국 간 합의 도출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단서가 달려 있다는 점에서 일본이 이를 입증할 책임이 크다.

- 세종=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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