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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역기구(WTO)의 종말 다가온다?

세계무역기구(WTO)의 종말 다가온다?

‘자유시장 지상주의’라는 오만으로 대중의 반발 커지고, 미국이 양자 무역협정으로 방향 틀면서 무력해져
스위스 제네바의 WTO 본부. WTO는 민주 절차로 선출된 정부가 세계경제의 힘에 저항할 수 없이 무력해지는 현상의 상징이 됐다. / 사진:REUTERS/YONHAP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세계무역기구(WTO)는 망가졌다. 세계의 가장 부유한 나라들이 개도국을 자청해 WTO의 규정을 피하고 우대를 받는다”며 중국 등을 겨냥해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들이 개도국 지위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도 늘 그랬듯이 트럼프 대통령의 편을 들며 중국의 ‘개도국’ 지위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런 간섭을 비판하는 전문가들은 중국이 WTO에서 개도국 지위로 많은 혜택을 누리는 건 아니라며 호주로서도 어느 한쪽 편을 들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런 논쟁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일일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입장을 번복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WTO는 지금 우리가 아는 기구와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십중팔구 기존의 기구로 다시 살아나진 못할 것이다.

사실 WTO의 종말은 오래전부터 예견됐다. WTO는 1995년 오랜 우루과이 라운드 무역협상이 종료되면서 그 협정의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관세·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대체하는 국제기구로 설립됐다. WTO의 설립은 우연하게도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토머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 같은 책이 예시하는 자유시장 지상주의의 전성기와 맞물렸다. 그러면서 그 시대의 자만심을 상징하는 기구로 떠올랐다.

레나토 루지에로 초대 사무총장에 따르면 WTO의 사명은 “단일 세계경제를 위한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WTO는 국제무역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문제에서든 개별 정부의 입장을 무시해도 좋다고 느꼈다. 특히 환경정책 문제에서 그랬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가 ‘참치-돌고래’ ‘새우-바다거북’ 사건이다. 돌고래를 보호하기 위해 참치잡이를 할 때 유자망의 사용을 금하는 미국의 해양포유동물보호법 등을 멕시코가 위반했다는 이유로 미국이 수입제한 조치를 내리자 WTO 패널은 GATT 제 11조 1항 위반이라고 판시했다. 또 바다거북 보호장치를 장착하지 않은 새우잡이 선단을 보유한 동남아 국가가 수출하는 새우에 대한 미국의 수입제한 조치도 WTO 패널은 GATT 제20조 예외조항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정했다.

당연히 WTO는 민주 절차로 선출된 정부가 세계경제의 힘에 저항할 수 없이 무력해지는 현상의 상징이 됐다. 그에 따라 1999년 미국 시애틀에서 개최된 WTO 총회 기간 세계화에 반대하는 시위와 폭동(‘시애틀 전투’로 불린다)이 일어나는 등 대중의 저항이 뒤따랐다. 그 후 엄격한 보안 조치로 ‘시애틀 전투’의 재연은 없었지만 WTO는 ‘천하무적’이라는 이미지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2001년 시작된 WTO 다자간 무역협상인 도하 라운드(뉴 라운드)는 선진국들이 ‘싱가포르 이슈’를 밀어 붙이면서 더욱 힘을 잃었다. 자유무역 어젠다를 무역의 원활화, 정부 조달의 투명성, 투자 정책, 경쟁 정책으로 확대하는 내용으로 전 세계에 자유시장 정책의 채택을 강요하는 것이어서 개도국들의 강한 저항에 부닥쳤다. 도하 라운드는 10년 이상 더 끌다가 2013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일부 사안에서만 겨우 합의를 이루는 것으로 흐지부지됐다.

한편 미국은 처음엔 규정에 기반한 WTO의 다자 간 모델을 전 세계로 확대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지만 갈수록 WTO 규정에 구속받지 않는 양자 간 무역협정으로 초점을 옮겼다. 그로써 미국은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미국은 농업 보호 같은 문제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면서, 지적재산과 미국 투자자에 대한 특별 대우에서 상대국의 양보를 얻어냈다.

이런 과정의 정점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되는 듯했다. 12개국이 참가하는 이 협정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무역체제에서 중국을 제외하려는 지정학적 목표를 가졌다. 힐러리 클린턴은 국무장관 시절 TPP를 국제협정의 ‘표준’으로 치켜세웠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 협정에서 탈퇴했다. 나머지 참가국들이 TPP를 살려냈지만 미국의 참여 없이는 거의 무의미한 협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전쟁은 다른 정책 분야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과거와 급진적으로 단절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오랜 추세를 지속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미국 경제의 거대한 몸집을 이용해 다른 나라로부터 양보를 끌어내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술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가 선정한 표적인 중국과 유럽연합(EU)도 WTO를 이용해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몸집이 크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의 대응은 WTO 분쟁해결 항소기구의 새 판사 임명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WTO를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계속된 재판관 임명 거부권 행사로 현재 항소기구 위원 7명 중 최소 패널 구성에 필요한 3명만 남았다. 그러나 이들 중 2명이 오는 12월 10일 임기가 만료돼 미국이 신임 재판관 임명에 동의해주지 않으면 다음 날부터 사실상 WTO의 분쟁 조정기능은 마비상태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EU는 그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WTO 규정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미국에 보복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틀을 구축했다. 중국도 미국이 참여하지 않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활용해 대응할 준비를 한다. 중국은 대미국 무역 제한에 그치지 않고 중국인 관광객과 기업체 임직원에게도 미국 여행을 하지 말도록 경고할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최근 무역전쟁에서 나타나는 화해의 움직임으로 한동안 긴장이 더는 고조되지 않겠지만 이전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다면 WTO는 사실상 존재 이유가 없어질 수 있다. 그럴 경우 무역 규정은 이전의 GATT 상태로 되돌려질 것이다. 미국 같은 거대한 나라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커진다는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더라도 만신창이가 된 WTO가 온전히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 민주당의 유력 후보자들도 자유무역 옹호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에 맞서 새로운 무역체제로 재무장한 다른 나라들이 무장을 해제하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이런 상황은 특히 ‘하드 브렉시트’(영국이 유럽연합과 결별하면서 단일 시장과 관세 동맹에서 완전히 탈퇴하는 상황) 지지자들에게 흥미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영국이 WTO 규정에 의존하는 데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트러스 영국 통상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WTO ‘개혁’을 원칙적으로 지지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개혁은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규정을 허약하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국이 EU에서 완전히 분리돼 세계 시장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되면 영국은 공정하든 불공정하든 미국·중국·EU의 무역 관행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할 수단이 거의 없어질 수 있다. 호주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호주 정부는 중국에 맞서 트럼프 정부를 지지함으로써 이전에 옹호하던 WTO 규정 기반 질서를 해체하는 일에서 자신도 모르게 미국의 동반자가 되고 있다. 문제는 그런 미래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뾰족한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 존 퀴긴



※ [필자는 호주 퀸즐랜드대학 경제학 교수다. 이 글은 온라인 매체 컨버세이션에 먼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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