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옛 동독 지역 경제력, 여전히 서독 지역의 75%에 머물러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옛 동독 지역 경제력, 여전히 서독 지역의 75%에 머물러
동독 지역 주민 57% “2등 시민이라 느껴”… 경제적 격차 독일 정치의 핵심 과제 11월 9일로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가 30주년을 맞았다. 동유럽 공산체제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 뒤 동독은 개별 주가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각각 가입하면서 해체되고,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재통일(Wiedervereinigung)을 이뤘다. 1871년 프로이센 왕국 주도로 오스트리아를 뺀 나머지 독일어 사용 지역이 하나의 나라로 통일(Einigung)됐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자유진영의 서독과 공산진영의 동독으로 분단됐다가 재통일됐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이 벌인 개혁개방 정책이 동력을 제공했다.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개혁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와 정치 부문의 개방정책인 글라스노스트를 시행했다. 개혁의 물결은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에도 일었다.
그 시작은 1989년 8월 19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인 쇼프론에서 헝가리인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벌인 평화시위였다. ‘범유럽 피크닉’으로 불린 이 시위는 당시 서독 망명을 요구한 동독인 1000여 명이 시위에 참석했다가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그 뒤 9월 25일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시민들이 시위를 시작했으며 10월 9일 매주 열리는 월요시위로 이어졌다. 결국 10월 18일 동독의 최고지도자 에리히 호네커가 물러났지만 시위는 잦아들지 않았다. 월요 시위에선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가 등장해 시위의 상징이 되었다. 베를린 시위에선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라는 구호도 등장해 통일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11월 3일 베를린에서 100만 명이 시위를 벌였고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인들은 자유롭게 동독과 서독을 넘나들게 됐다. 결국 동독은 1990년 3월 18일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실시했으며 집권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은 공산주의 일당독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을 위해 남은 과제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로부터 통일 독일의 영토·외교·군사적 지위를 인정받는 일이었다. 독일은 194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유럽전선 승전국인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됐다. 소련 점령지 한 가운데에 있는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했다. 그 뒤 1949년 미국·영국·프랑스 점령지역에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수립돼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추구했으며, 소련 점령지역에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세워져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와 공산주의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독일의 분단이다. 베를린도 동·서 베를린으로 분할했다. 동독은 1961년 동·서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베를린 장벽을 설치해 주민들의 통행을 막았다. 베를린 장벽은 분단의 상징으로 남았다. 서독은 1955년 미국 주도의 집단방어체제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해 서방 군사동맹의 한 축을 이뤘다. 동독은 1955년 소련 주도의 군사동맹 체제인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이 됐다.
이런 배경이 있는 독일이 재통일을 하려면 동·서독간 합의는 물론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불만을 잠재워야 했다. 그래서 6개국은 1990년 5월 5일에서부터 1990년 9월 12일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2+4 회담을 했으며 그 결과 9월 12일 최종합의 문서인 ‘2+4 조약’에 서명했다. 그 결과 통일 독일은 1991년 3월 15일 이후 국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고, 자신들의 동맹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얻게 됐다. 통일 독일은 나토 동맹의 일원이 됐다. 동독과 동베를린에 주둔한 소련군을 서독 정부의 비용 부담으로 전원 철수하기로 했으며 1994년 이를 완료했다. 서베를린에 남아있던 나토군도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떠났다. 2+4 조약으로 통일 독일군은 병력이 37만 명 이하로 제한됐으며 화생방 무기의 생산과 사용이 금지됐다.
특히 옛 동독 지역에는 외국 군대의 주둔이 금지됐으며 핵무기와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무기의 배치가 금지됐다. 나중에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가 국력을 회복한 뒤 러시아 일각에서는 소련군의 동독 지역 철수는 나토의 동진을 허용한 실수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실제로 나토는 옛 동독 지역은 물론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동유럽 전역과 옛 소련에서 독립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까지 나토에 가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베를린 장벽은 세계의 질서를 바꾼 대전환의 시발점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통일된 독일의 옛 동독 지역에서 지금은 극좌와 극우가 세력을 떨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10월 27일 옛 동독 지역인 튀링겐 주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옛 공산당 계열의 좌파당이 득표율 29.7%로 1위, 극우 성향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23.8%로 2위를 각각 차지했다.
연방의회의 집권당으로 2014년 이 지역 지방선거에서 2위를 차지했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소속한 기독민주당(CDU)은 지난 2014년 선거보다 11%포인트 떨어진 22.5%의 득표율로 3위로 떨어졌다. 지금까지 튀링겐 주는 좌파당이 사민당·녹색당 등과 대연정을 이뤄왔는데 중도 좌파인 사회민주당은 8.5%, 녹색당은 5.4%, 자유민주당은 5.0%를 각각 득표해 기존 정당의 연합으로는 연정을 구성할 수 없게 됐다. AfD는 지난 9월 옛 동독 지역인 작센 주와 브란덴부르크 주 선거에 이어 튀링겐 주에서 2위를 차지하며 확장세를 이어갔다. AfD의 확산에 배경에는 독일 전체를 휩쓸어온 반난민·반이슬람 정서와 함께 옛 동독지역이 독일 내에서 ‘2등 시민’으로 대접 받는다는 불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옛 작센 왕국의 수도로 옛 동독 지역의 대표적인 경제·문화 도시인 드레스덴은 지금 반난민·반이슬람 운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서구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PEGIDA)’라는 이름의 극우파 조직도 드레스덴에서 시작됐다. PEGIDA는 지난해 작센 주의 공업도시인 켐니츠에서 폭력 시위를 일으키기도 했다. 켐니츠는 동독 시절 공산주의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카를마르크스슈타트로 불렸다. 마르크스의 고향은 독일 서부 트리어지만 동독 공산정권은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동독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비슷한 인구의 켐니츠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도시 한복판에는 마르크스의 거대한 두상을 설치해 지금도 있다. 주민들은 통일독일 직전인 1990년 6월 공산당 정권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주민투표를 통해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통독 이후 전통적인 기계산업 도시의 영광도 되찾아가고 있지만 옛 서독 지역만큼의 활기를 유지하지는 못한다. 갑자기 찾아온 통일이었지만 사실 동·서독은 문화적으로는 의외로 빠르게 통합을 이뤘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상호 증오 심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분단 시절에도 동독 주민들은 서독의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다. 이는 문화적인 이질화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공산 체제에 지나친 자신감이 있었던 동독 당국은 주민들이 서독 방송을 보면 자본주의의 모순을 목격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서독의 발달한 물질문명에 대한 동경만 낳았을 뿐이다. 주민들의 상호 왕래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 동독인은 국가의 허가를 얻으면 서독 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고, 서독인은 동독 당국이 허용하면 동독을 방문하거나 머물 수도 있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서독의 목사인 아버지가 동독에서 생활한 경우다. 동독 당국은 서독의 반공인사 등을 골라내 방문을 불허하는 방법으로 정치적 압력을 가했다. 통일 뒤 문화적인 통합에는 문제가 없는 이유다.
결국 문제는 경제적인 격차였다. 켐니츠에 있는 공산주의 창시자 마르크스의 동상 앞에서 극우 세력이 이민과 이슬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은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유럽연합(EU) 내부에서 국경이 사라지면서 동유럽의 이민자가 옛 동독 지역으로 이주해 일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소득도 생각보다 늘지 않는 상황에서 실업자가 늘면서 극우정치가 만연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옛 동독 지역은 베를린장벽 붕괴 30년 뒤인 현재 옛 서독 지역과 비교해 생산성과 임금이 80% 수준에 머물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착시효과라는 주장이다. 옛 동독 지역의 생산성은 유럽 최고 수준인 옛 서독 지역보다는 낮지만 유럽 전체로 보면 상위권이기 때문이다.
EU의 통계청인 유로스타가 올해 2월 26일 발표한 2017년 유럽 각국의 지역별 1인당 국내총생산(GDP) 통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이에 따르면 EU 평균 1인당 GDP는 3만 유로인데 독일은 3만9000유도다. 지역별로 보면 옛 서독지역인 함부르크(6만4700유로), 브레멘(4만9700유로), 바이에른(4만6100유로), 바덴뷔르템베르크(4만5200유로), 헤센(4만5000유로)이 4만 유로를 넘으면서 상위권을 형성했다. 반면 옛 동독지역인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2만6700유로), 작센안할트(2만7400유로), 브란덴부르크(2만7800유로), 튀링겐(2만8900유로), 작센(2만9900유로)로 2만 유로 대를 유지하면서 독일에서 경제적 낙후지역을 형성했다. 과거 동·서 베를린이 합쳐진 베를린은 3만7900유로로 중간 수준이었다. 나머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3만8700유로), 자를란트(3만8600유로), 니더작센(3만6500유로), 라인란트팔츠(3만5700유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3만2400유로)은 모두 옛 서독 지역으로 3만 유로 대를 유지했다. 옛 동·서독의 지역별 경제 양극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통계다.
하지만 옛 동독 지역의 1인당 GDP는 옛 서독 지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적어 보이지만 유럽 전체에서 보면 그리 나쁘지 않다. 이탈리아(2만8500유로), 스페인(2만5100유로)과 비슷하고 옛 동유럽 체제전환국인 체코(1만8100유로), 헝가리(1만2700유로), 폴란드(1만2200유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심지어 프랑스도 지역별로 따지면 파리 중심의 수도권인 일드 프랑스와 독일과 국경을 접한 동부 알자스 등 몇 군데를 제외하면 옛 동독 지역과 경제적으로 비슷하다. 통일 이후 옛 동독 지역의 옛 서독 지역 대비 1인당 GDP는 1991년 42.9%에서 2000년 67.2%, 2008년 70.9%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통일대박은 아닐지 몰라도 옛 동독 지역은 유럽 전체 수준에선 상당히 높은 경제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나 영국, 이탈리아 중부와 비슷하다. 동유럽 옛 공산권의 어느 나라보다 높은 경제 수준이다.
공산주의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체제전환을 한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옛 동독 지역은 부동산 비용과 생활물가가 낮아 옛 서독 지역의 80% 정도면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은 유지할 수 있다. 옛 동독 지역 예나에 위치한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 경제·경영학과의 비즈니스 동력·혁신 및 경제변화 담당 교수인 미카엘 프리치 박사의 주장이다. 독일연방정부는 옛 서독 지역에서서 연대세를 받아 옛 동독 지역의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투자해 장기적으로 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꾸준히 펴고 있다. 그 효과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주장도 많다. 일부에선 체제 전환 뒤 30년이 지나도 옛 동독 지역이 옛 서독 지역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과거 공산체제의 부작용이 지금도 장기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라는 주장도 편다. 프리치 박사는 이를 공산주의 시절에 겪었던 트라우마에 따른 강박 증세로 표현한다. 예로 과거 동독 시절 공장이나 사업소들은 중앙에서 배정하는 원료만으로 가동해야 했기 때문에 부품과 원자재를 일단 필요 이상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전통과 강박 관념이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도 옛 동독 지역의 기업은 옛 서독 지역의 기업보다 원료를 충분히 확보하려는 경향이 보인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옛 동·서독 지역 간 경제적 격차는 독일 국내 정치의 핵심 과제다. 지난 9월 25일 독일의 연방경제에너지부가 발표한 ‘독일 통일 현황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옛 동독 지역 경제력은 옛 서독 지역의 75%, 평균 임금은 84% 수준으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주민들의 심리다. 보고서의 설문조사에선 옛 동독 지역 주민 57%가 자신을 ‘2등 시민’으로 느낀다고 응답했다. 옛 동독 지역 주민의 박탈감을 잘 보여주는 조사 결과다. 메르켈 총리도 10월 28일 주례 팟캐스트에서 “1990년 옛 서독지역의 43%였던 옛 동독지역의 경제력이 현재 75%까지 올라온 것은 대단한 성공이지만, 한편으론 아직 갈 길이 멀다”라고 지적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는 독일의 깊은 고민이다.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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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작은 1989년 8월 19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인 쇼프론에서 헝가리인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벌인 평화시위였다. ‘범유럽 피크닉’으로 불린 이 시위는 당시 서독 망명을 요구한 동독인 1000여 명이 시위에 참석했다가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그 뒤 9월 25일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시민들이 시위를 시작했으며 10월 9일 매주 열리는 월요시위로 이어졌다. 결국 10월 18일 동독의 최고지도자 에리히 호네커가 물러났지만 시위는 잦아들지 않았다. 월요 시위에선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가 등장해 시위의 상징이 되었다. 베를린 시위에선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라는 구호도 등장해 통일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11월 3일 베를린에서 100만 명이 시위를 벌였고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인들은 자유롭게 동독과 서독을 넘나들게 됐다. 결국 동독은 1990년 3월 18일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실시했으며 집권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은 공산주의 일당독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동독지역, 극우·극좌 세력 떨쳐
이런 배경이 있는 독일이 재통일을 하려면 동·서독간 합의는 물론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불만을 잠재워야 했다. 그래서 6개국은 1990년 5월 5일에서부터 1990년 9월 12일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2+4 회담을 했으며 그 결과 9월 12일 최종합의 문서인 ‘2+4 조약’에 서명했다. 그 결과 통일 독일은 1991년 3월 15일 이후 국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고, 자신들의 동맹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얻게 됐다. 통일 독일은 나토 동맹의 일원이 됐다. 동독과 동베를린에 주둔한 소련군을 서독 정부의 비용 부담으로 전원 철수하기로 했으며 1994년 이를 완료했다. 서베를린에 남아있던 나토군도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떠났다. 2+4 조약으로 통일 독일군은 병력이 37만 명 이하로 제한됐으며 화생방 무기의 생산과 사용이 금지됐다.
특히 옛 동독 지역에는 외국 군대의 주둔이 금지됐으며 핵무기와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무기의 배치가 금지됐다. 나중에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가 국력을 회복한 뒤 러시아 일각에서는 소련군의 동독 지역 철수는 나토의 동진을 허용한 실수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실제로 나토는 옛 동독 지역은 물론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동유럽 전역과 옛 소련에서 독립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까지 나토에 가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베를린 장벽은 세계의 질서를 바꾼 대전환의 시발점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통일된 독일의 옛 동독 지역에서 지금은 극좌와 극우가 세력을 떨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10월 27일 옛 동독 지역인 튀링겐 주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옛 공산당 계열의 좌파당이 득표율 29.7%로 1위, 극우 성향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23.8%로 2위를 각각 차지했다.
연방의회의 집권당으로 2014년 이 지역 지방선거에서 2위를 차지했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소속한 기독민주당(CDU)은 지난 2014년 선거보다 11%포인트 떨어진 22.5%의 득표율로 3위로 떨어졌다. 지금까지 튀링겐 주는 좌파당이 사민당·녹색당 등과 대연정을 이뤄왔는데 중도 좌파인 사회민주당은 8.5%, 녹색당은 5.4%, 자유민주당은 5.0%를 각각 득표해 기존 정당의 연합으로는 연정을 구성할 수 없게 됐다. AfD는 지난 9월 옛 동독 지역인 작센 주와 브란덴부르크 주 선거에 이어 튀링겐 주에서 2위를 차지하며 확장세를 이어갔다. AfD의 확산에 배경에는 독일 전체를 휩쓸어온 반난민·반이슬람 정서와 함께 옛 동독지역이 독일 내에서 ‘2등 시민’으로 대접 받는다는 불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옛 작센 왕국의 수도로 옛 동독 지역의 대표적인 경제·문화 도시인 드레스덴은 지금 반난민·반이슬람 운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서구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PEGIDA)’라는 이름의 극우파 조직도 드레스덴에서 시작됐다. PEGIDA는 지난해 작센 주의 공업도시인 켐니츠에서 폭력 시위를 일으키기도 했다. 켐니츠는 동독 시절 공산주의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카를마르크스슈타트로 불렸다. 마르크스의 고향은 독일 서부 트리어지만 동독 공산정권은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동독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비슷한 인구의 켐니츠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도시 한복판에는 마르크스의 거대한 두상을 설치해 지금도 있다. 주민들은 통일독일 직전인 1990년 6월 공산당 정권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주민투표를 통해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통독 이후 전통적인 기계산업 도시의 영광도 되찾아가고 있지만 옛 서독 지역만큼의 활기를 유지하지는 못한다.
문화적으로는 빠르게 통합
결국 문제는 경제적인 격차였다. 켐니츠에 있는 공산주의 창시자 마르크스의 동상 앞에서 극우 세력이 이민과 이슬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은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유럽연합(EU) 내부에서 국경이 사라지면서 동유럽의 이민자가 옛 동독 지역으로 이주해 일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소득도 생각보다 늘지 않는 상황에서 실업자가 늘면서 극우정치가 만연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옛 동독 지역은 베를린장벽 붕괴 30년 뒤인 현재 옛 서독 지역과 비교해 생산성과 임금이 80% 수준에 머물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착시효과라는 주장이다. 옛 동독 지역의 생산성은 유럽 최고 수준인 옛 서독 지역보다는 낮지만 유럽 전체로 보면 상위권이기 때문이다.
EU의 통계청인 유로스타가 올해 2월 26일 발표한 2017년 유럽 각국의 지역별 1인당 국내총생산(GDP) 통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이에 따르면 EU 평균 1인당 GDP는 3만 유로인데 독일은 3만9000유도다. 지역별로 보면 옛 서독지역인 함부르크(6만4700유로), 브레멘(4만9700유로), 바이에른(4만6100유로), 바덴뷔르템베르크(4만5200유로), 헤센(4만5000유로)이 4만 유로를 넘으면서 상위권을 형성했다. 반면 옛 동독지역인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2만6700유로), 작센안할트(2만7400유로), 브란덴부르크(2만7800유로), 튀링겐(2만8900유로), 작센(2만9900유로)로 2만 유로 대를 유지하면서 독일에서 경제적 낙후지역을 형성했다. 과거 동·서 베를린이 합쳐진 베를린은 3만7900유로로 중간 수준이었다. 나머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3만8700유로), 자를란트(3만8600유로), 니더작센(3만6500유로), 라인란트팔츠(3만5700유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3만2400유로)은 모두 옛 서독 지역으로 3만 유로 대를 유지했다. 옛 동·서독의 지역별 경제 양극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통계다.
하지만 옛 동독 지역의 1인당 GDP는 옛 서독 지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적어 보이지만 유럽 전체에서 보면 그리 나쁘지 않다. 이탈리아(2만8500유로), 스페인(2만5100유로)과 비슷하고 옛 동유럽 체제전환국인 체코(1만8100유로), 헝가리(1만2700유로), 폴란드(1만2200유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심지어 프랑스도 지역별로 따지면 파리 중심의 수도권인 일드 프랑스와 독일과 국경을 접한 동부 알자스 등 몇 군데를 제외하면 옛 동독 지역과 경제적으로 비슷하다. 통일 이후 옛 동독 지역의 옛 서독 지역 대비 1인당 GDP는 1991년 42.9%에서 2000년 67.2%, 2008년 70.9%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통일대박은 아닐지 몰라도 옛 동독 지역은 유럽 전체 수준에선 상당히 높은 경제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나 영국, 이탈리아 중부와 비슷하다. 동유럽 옛 공산권의 어느 나라보다 높은 경제 수준이다.
공산주의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체제전환을 한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옛 동독 지역은 부동산 비용과 생활물가가 낮아 옛 서독 지역의 80% 정도면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은 유지할 수 있다. 옛 동독 지역 예나에 위치한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 경제·경영학과의 비즈니스 동력·혁신 및 경제변화 담당 교수인 미카엘 프리치 박사의 주장이다. 독일연방정부는 옛 서독 지역에서서 연대세를 받아 옛 동독 지역의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투자해 장기적으로 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꾸준히 펴고 있다. 그 효과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주장도 많다. 일부에선 체제 전환 뒤 30년이 지나도 옛 동독 지역이 옛 서독 지역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과거 공산체제의 부작용이 지금도 장기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라는 주장도 편다.
메르켈 총리 “아직 갈 길 멀다”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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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이재명 “‘국장’ 떠나는 현실...PER 개선하면 ‘코스피 4000’ 무난”
7롯데바이오로직스 설립 2년 만 수장 교체…신임 대표는 아직
8상법 개정 되지 않는다면 “국장 탈출·내수 침체 악순환 반복될 것”
9열매컴퍼니, 미술품 최초 투자계약증권 합산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