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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인사이트 | 미국 페미니즘 폴리틱스(Feminism Politics)] 박 시장이 촉발한 페미니즘의 본질

[채인택의 글로벌인사이트 | 미국 페미니즘 폴리틱스(Feminism Politics)] 박 시장이 촉발한 페미니즘의 본질

국민이 인식하는 평등과 정치인이 생각하는 평등의 간극이 사회갈등의 원인
아르헨티나 페미니스트들이 2019년 5월 28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국회 앞에서 남성 폭력에 항거하기 위한 캠페인으로 여성의 낙태권을 상징하는 녹색 손수건을 들고 합법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사진:AFP=연합뉴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사건의 후폭풍이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피해자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2차 가해가 가해지고 있다. 진상 규명보다 의혹 덮기에 바쁜 모습도 보인다. 사태가 정쟁으로 확대되는 모습까지 모인다.

문제의 본질은 여성 권리에 대한 국민의 인식 발달을 정치권이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여권주의)은 이미 한국은 물론 국제 사회 전반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상당수 정치·경제·사회 지도자들이 아직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숨어있는 이런 인식이 박 시장 사건을 계기로 수면에 등장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국민이 인식하는 페미니즘과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 사이의 간극이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 셈이다.

페미니즘은 정치제도, 문화관습, 사회동향에 존재하는 성별에 따른 차별을 밝혀내고 성차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목적의 이념과 운동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이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 전반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사회 변화 이뤘지만 권리 향상은 못 이뤄
주목할 점은 페미니즘은 인간존중과 권리확대를 추구하는 시민혁명 속에서 생겼으며 19~20세기의 여성참정운동으로 시작해 사회관습이나 인식에 자리 잡은 성차별과 싸우는 사회운동으로 발달했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의 이런 기원은 자연스럽게 지평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사회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은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리버럴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래디컬 페미니즘, 생태주의적 패미니즘 등으로 다양한 흐름을 이뤘다. 그러면서 인종, 사회 계급, 국적, 종교, 연령에 성적 지향까지 폭넓은 문화적·사회적 요인에서 차별금지와 평등을 지향하는 광범위한 사회운동으로 이어졌다. ‘확대된 페미니즘’이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모든 중류의 억압이나 차별에 맞서는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페미니즘은 학문이나 사회적 변화의 영역을 넘어서서 정치의 영역으로 이어졌다. 영국 정치학자이자 교과서 저술가인 앤드루 헤이우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맥밀란)]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이미 정치적 용어다. 역사적으로 여성 참정권 확보운동으로 시작됐지만 갈수록 영역이 확대도 피임약·낙태 합법화, 공적 부문에서 엘리트 여성의 참여 확대, 직장내 젠더 관련 권력관계의 평등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변화를 이끌어왔다.

여기서 생각할 점이 정치는 인간과 권력과의 관계라는 사실이다. 페미니즘 정치는 의회와 정당에서 벌어지는 정치는 물론 사회 전반의 권력 관계에 고루 스며들었다. 사회와 직장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변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일부 정치인과 공직자는 일부 직종을 여성에 맡기거나 여성이 맡아야 좋다는 기대착오적인 인식으로 대응해왔다. 여성 비서에게 속옷 정리나 마라톤 동행, 혈압 측정 등 개인 수발을 들게 하는 것이 뒤늦게 문제가 된 이유다.

대한민국 사회의 역동적인 발전에서 여성 권리의 자각을 지도자들이 과소평가하거나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대한민국 국민은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이라는 정치적 성과를 거뒀다. 이는 같은 해 7·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노동운동의 활성화와 노동조합 활동의 정착이라는 사회적 변화라는 변혁을 이끌었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자각과 사회적 권리 확대는 정치적 변화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촛불혁명은 거대 권력도 시민의 힘으로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정치권력의 교체를 가져왔다. 이는 여성의 정치적 자각과 사회적 권리 확대로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남녀 할 것 없이 정치적 변혁에 힘을 보탰다. 그럼에도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발언권은 이에 비례해 신장하지 못했다. 여성의 인식이나 자각과 현실 사회 사이에 괴리가 생긴 셈이다. 이 간극이 불만을 불러왔다.

페미니즘이 역사적으로 두 차례의 물결로 이뤄졌다는 점을 새삼 떠올릴 필요가 있다. 1차 물결은 동등한 참정권 확보였고, 2차 물결은 사회 전반에 걸친 양성 평등의 확립이다. 여성 참정권 운동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으며 대한민국은 1948년 헌법을 제정하면서 성차별 없이 모든 국민에게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여성권리를 확대하는 사회운동은 겉과 속이 달랐다. 수많은 남성 정치인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했지만 이는 이미지 정치에 이용되는 경향이 컸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양성 평등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거나 구체적인 권리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여성들의 인식도 변했는데 민주화를 이끈 세력조차 이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셈이다.
 인종 문제 안에 여성차별 이슈 담겨 있어
페미니즘이 정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미국을 보면 잘 드러난다. 페미니즘은 미국의 2020년 대통령 선거 지형에도 이미 거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겉보기엔 인종차별 문제에서 촉발한 인종문제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확대된 페미니즘’의 작동으로 볼 수 있다. 잠시 사태를 살펴보자. 5월 25일 미국 중서부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으로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사태가 발생했다. 흑백 인종차별에서 시작한 운동은 여성·동성애자·이민자·빈민층 등 다양한 계층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차별금지와 평등을 주장하는 시위가 인종을 넘어 젠더, 사회계층, 성적 지향 등 다양한 부분에서의 평등 운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셈이다. 여성을 배려의 대상으로나 여기는 정도로는 전근대적이며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당당한 세계의 절반으로 인정하고 적극적인 유리천정 깨기를 통해 시대를 이끌어갈 기회를 함께 마련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는 현실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민주당은 조 바이든 대선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여성 후보를 내세울 예정이다. 유세과정에서도 이를 밝혔다. 바이든의 당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그가 러닝메이트로 지명한 인물은 미국의 첫 여성 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바이든은 뿐만 아니라 1942년생으로 올해 78세다. 만일 올해 11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해 내년에 취임하면 임기 중 80세를 넘긴다. 차기 대선에 나올 가능성이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부통령을 맡았던 여성이 차기 대선에 대통령 후보로 나설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임기 중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11월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한다면 단순한 민주당의 승리를 넘어 페미니즘 정치의 승리로 기록될 것이다. 여성 부통령, 유색인종 부통령, 유색인종 여성 부통령이 탄생하는 것은 물론 다음 선거에서 그런 대통령의 탄생을 기대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번에 거론되는 민주당 부통령 예비 후보군을 살펴보면 미국 정치가 그동안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서 유색인종·여성 정치인·지도자를 길러왔는지를 알 수 있다. CNN 방송은 6월 26일 카말라 해리스(56) 연방상원의원(캘리포니아), 케이샤 랜스 바텀스(50) 애틀란타 시장(조지아), 발 데밍스(63) 연방하원의원(플로리다), 엘리자베스 워런(71) 연방상원의원(매사추세츠) 등을 유력 후보로 거론했다. AP통신은 미셸 루한 그리샴(61) 뉴멕시코 주지사와 수전 라이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유력 후보로 더했다.
 다양한 인종의 여성 리더들 미국사회 포진
2016년 10월 9일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 루이스 워싱턴대에서 열린 미국 대통령 선거 두 번째 토론.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뒤에는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 / 사진:AFP=연합뉴스
그리샴 지사는 뉴멕시코에서 12대를 살아온 히스패닉(또는 라티노) 집안 출신이다. 그는 히스패닉계표를 모을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이다. 주목할 점은 히스패닉의 정치적 가치다. 히스패닉은 미국 독립 이전 멕시코 땅이었다가 나중에 미국 영토가 된 캘리포니아·뉴멕시코·텍사스 등에서 원래 거주하던 스페인 이민이나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중남미계를 전반적으로 가리킨다. 미국에서 히스패닉 인구는 흑인보다 더 많다. 미국의 인종별 분포를 보면 백인 76.5%에 흑인 13.4%, 아시아계 5.9%의 분포다. 히스패닉은 인종은 아니지만 강력한 정체성을 가진 별개의 인구 집단이자 정치적인 세력으로 미국 인구의 18.35%를 차지한다. 흑인보다 5%포인트 이상 많다. 히스패닉은 미국의 대표적인 경합주인 플로리다 주 등의 표심을 좌우할 수 있다. 경합주은 미국 정치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이 백중세를 이루거나 선거 때마다 지지 정당이 변하는 주를 가리킨다. 그리샴은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히스패닉 출신인데, 바이든도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라 겹치는 문제가 있다.

라이스 전 보좌관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스탠퍼드대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교육 받은 뒤 빌 클린턴 행정부의 국가안보실에서 1993~1997년 근무했다. 1997~2001년 국무부 아프리카 담당 차관으로 일하며 지역 개발과 에이즈 협력에 주력했다.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일하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2013~2017년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을 지냈으며 2009~2013년 유엔대사를 맡았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유엔대사를, 트럼프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고 최근 외교 막후를 폭로해 물의를 빚은 존 볼튼과 경력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소속 정당에 대한 충성심, 업무스타일, 그리고 인종 정체성은 반대다. 라이스 보좌관은 성공한 흑인 여성 외교관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바이든이 연방상원에서 외교위원장을 오래 맡은 외교통이라 경력이나 전문 분야가 겹치는 것이 한계로 지적된다.

워런은 백인으로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파산법을 강의하던 교수 출신이다. 변호사로 소비자 보호와 경제 분야 전문가이기도 하다.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와 바이든과 대결하기도 했다. 버니 샌더스 연방상원의원과 함께 미국 민주당의 진보세력의 주축으로 평가 받는다. 문제는 나이가 72세라 바이든과 정부통령으로 나설 경우 모두 70대라는 게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유력한 주자로 꼽히는 해리스 연방상원의원은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 첸나이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던 타밀족 출신의 어머니와 자메이카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시아말라 고팔란 해리스는 유방암 전문 과학자이며, 아버지 도널드 해리스는 스탠퍼드대 경제학 교수다. 해리스는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에 대해 ‘흑인’으로 말하고 있다. 해리스는 변호사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주 법무장관을 지냈다.
 미국 대선, 페미니즘 정치의 열매 수확 앞둬
바텀스 시장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변호사다. 기업체와 로펌 등에서 사회경험이 풍부하게 쌓았다는 장점이 있다. 판사와 시의회 의장을 거쳐 애틀란타 역사상 처음으로 입법·사법·행정 분야에서 모두 근무한 경력도 있다.

데밍스 연방하원의원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경찰에 27년간 근무하며 플로리다주 올란도의 첫 여성 경찰서장을 지냈다. 여성과 대한 유리 천정을 하나 깨부순 인물로 평가받는다.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진행하면서 실무를 맡았다.

정치전문 매체인 폴리티코는 7월 12일 태미 덕워스(52) 일리노이주 연방상원의원을 유력 후보로 꼽았다. 덕워스는 미국 퇴역군인과 중국계 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국 방콕에서 태어났다. 미국 육군에 들어가 1992~2014년 복무하면서 중령으로 전역했다. 헬기 조종사로 이라크전에 참전했다가 두 다리를 잃는 전상을 겪어 의족을 차고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행정부에서 2009~2011년 국가보훈부 차관을 지냈으며 일리노이주 연방하원의원을 거쳐 2017년 연방상원의원이 됐다. 미국 연방상원의원 중 두 번째 아시아계이며 첫 참전여성이다.

미국은 여성들이 집단적·사회적으로 성폭행·성희롱·성차별을 사회적으로 고발하는 ‘미투(Me Too) 운동’이 2017년 10월 처음 나타난 나라다. 미투 운동은 할리우드의 권력자인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행과 성희롱을 폭로하기 위해 시작됐다. 하지만 그 배경은 남성이 지배해온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벌어져온 부절절한 젠더 불균형, 또는 젠더 간 권력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와인스틴이 영화 제작이나 캐스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바탕으로 개인의 성적자유결정권을 유린하고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상하 관계, 주중 관계, 계약 관계로 이뤄진 사회와 직장의 다양한 영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상으로 벌어져왔다.

여성의 사회진출, 디지털 미디어 확산에 따른 여성의 젠더 인식 확대와 연대 강화 등 여러 요수가 결합해 오늘날 미국이 미투의 중심국가이자 페미니즘 정치의 선두 국가로 대두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번에 민주당 부통령 예비후보로 거론되는 미국 여성 지도자들의 면면을 보면 드러난다. 다양한 분야에서 실력과 경험을 쌓아왔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홍보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여성과 소수파의 사회적 인식 확대와 자각이 사회적 변혁으로 이어진 경우일 것이다. 장구한 페미니즘 정치에서 하나의 싹이 돋아난 셈이다.

한국의 성추행 사건도 단순히 개인의 일탈을 넘어선다. 산업화와 민주화까지 이뤘지만 그동안의 사회적 변화와 여성들의 인식 변화를 제대로 감안하지 못한 지도자들이 벌이는 인지 부조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사회는 변하고 있고, 사람의 인식도 바뀌는데 정치와 제도가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페미니즘은 이미 세계를 바꾸고 있는데 말이다. 페미니즘은 인간적인 21세기를 살기 위해 반드시 함께 가야 할 시대정신의 동반자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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