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생활 5년…"저도 멋진 정장을 입고 싶답니다"
하티스트 엠버서더, 공연기획자 최경민
패션 선택권 보장 받지 못한 장애인 목소리 전달
“편하지만 예쁜 옷 입고 싶었어요”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까. 누군가에겐 쉽지만, 누군가에겐 어려운 고민이다. 특히 옷을 고를 때 제약이 많은 중증장애인들은 매일같이 어려움에 직면한다. ‘입고 싶은 옷’보다 ‘입을 수 있는 옷’을 찾아야 해서다. 휠체어를 탈 경우,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도 팔 움직임이 불편한 옷은 입을 수 없다. 오래 앉아있어야 하니 몸에 딱맞는 옷도 포기해야 한다. 대신 사이즈가 크고 신축성 좋은 옷을 찾는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대한민국의 장애인은 261만8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5.1% 수준이다. 이 중 91만3000명(34.9%)은 경제활동을 한다. 사회에서 옷차림은 인상을 좌우하는 요소다. 입을 수 있는 옷이 한정적이면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공연기획자 최경민씨(39)는 지난해 1월 병원에서 퇴원한 후 갖고 있던 옷을 전부 버렸다. 5년 전 교통사고로 휠체어 생활을 시작하면서 체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 최씨가 입던 기성복은 대부분 일어선 자세를 기준으로 제작됐다. 이런 옷을 입고 오래 앉아있으면, 바지 밑단이 위로 당겨 올라가거나 허리를 숙일 때 속옷이 보이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퇴원 후 혼자 집에서 옷을 입으려니 몸에 맞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바지는 대부분 허리 후크를 잠그는 형식이라 사이즈 조절도 안 되고, 앉아 있으면 허리나 배 부분이 많이 눌려요. 바지 길이도 짧아서 발목 위로 다 올라가고요. 그나마 입을 수 있는 바지는 끈으로 사이즈 조절이 되는 트레이닝복 같은 것들이었죠.”
'패션 테러리스트'였던 그, 장애 탓에 패션에 관심
이러한 상황은 최 씨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고 전엔 스스로를 '패션 테러리스트'로 부를 정도로 옷에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는 입을 옷을 찾는 데 적잖은 시간을 쏟고 있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줄어드니 난감한 일도 생겼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지인 경조사 때 입을 정장 한 벌이 없었다. 휠체어를 밀려면 움직임이 잦은 어깨 부분이 넉넉한 옷을 입어야 한다. 사이즈가 맞는 정장 재킷은 어깨가 꽉 끼어 불편했고, 한 사이즈 큰 재킷을 입으면 어깨선이 쳐져 옷맵시가 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최씨에게 ‘하티스트’를 추천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하티스트는 삼성물산 패션부문에서 출시한 장애인 전문 의류 브랜드다. 장애인 의복 문화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됐다. 일상에서 장시간 앉아 있고, 상체를 주로 움직이는 휠체어 사용자의 신체적 특징과 생활 패턴을 고려해 제작된다. 하티스트의 옷은 지난해 7월 국립재활원 장애인보조기기 교부사업 품목으로도 등록되며, 장애인들의 접근성이 제고됐다. 옷을 입고 싶은 이들은 신청 결과에 따라 개인별 총 15만원 한도(2년간)로 지급받을 수 있다.
휠체어를 탄 채로도 편하게, 또 예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찾던 최 씨는 곧장 하티스트 옷을 구매했다. 직접 입어보니 기성복과는 확실히 달랐다. 상의 어깨 접합 부분엔 신축성 잇는 원단이 적용돼 움직이기 수월했고, 하의는 밑위 길이가 길어 앉은 자세에서도 속옷이 드러나지 않았다. 셔츠 단추나 바지 후크도 마그네틱 버튼, ‘찍찍이’로 불리는 벨크로로 돼있어 열고 닫기가 쉬웠다. 물론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사이즈였다.
“옷을 입어보니 편하긴 한데, 사이즈가 다양하지 않은 느낌을 받았어요. 대부분 큰 옷이 많았죠. 저는 가장 작은 L을 구매했는데도, 바지가 2인치 정도 컸거든요. 결국 따로 줄여서 입었어요. 휠체어 사용자들은 움직임이 불편하기도 하고, 복근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서 체형이 바뀌거든요. 그러다보니 크게 제작된 옷이 많았던 것 같아요.”
최씨는 이러한 의견을 패션회사에 전달하면 휠체어 사용자들에게 더 좋은 옷이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취지로 지난해 8월 모집한 ‘하티스트 엠버서더’ 1기(총 3명)에 지원해 선발됐다. 엠버서더는 하티스트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디자인‧소재‧사이즈‧기능 등 자신을 위한 맞춤의류 제작에 참여하는 기회도 얻는다.
“엠버서더 활동의 핵심은 옷 제작과정에서 의견을 내는 거예요. 미팅을 여러 번 진행했고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 기존 옷의 문제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 했어요. 다음 미팅에서는 옷감의 재질이나 디자인의 디테일, 사이즈 등 구체적인 사항을 디자이너 등 팀원들과 소통했습니다. 특히 저는 정장을 입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사고 이후 휠체어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정장을 입는 건 포기한 상태였거든요.”
제작할 옷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지면 옷 제작과 리뷰, 수정에 들어간다. 최씨는 이 과정을 반년 넘게 반복했다. 옷 제작이 완료되면, 집에서 받아 입어보고 불편한 점을 다시 하티스트 팀에 전달해 고치는 식이다.
“1차로 제작된 정장을 받았을 때 여러 의견을 드렸어요. 예를 들면 정장 바지는 앞면에 칼 주름이 잡혀 있잖아요. 그게 없더라고요. 칼 주름이 없으면 바지가 정장 느낌이 들지 않고, 면바지 같이 캐주얼해 보이죠. 또 재킷은 주머니 위치를 좀 조정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서 있을 때랑 앉아 있을 때 적합한 주머니 위치가 다를 수 있거든요. 셔츠의 경우에도 앉아서 허리를 숙였을 때 바지 밖으로 셔츠 뒷면이 빠져나오지 않도록 뒷부분을 좀 길게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입고 싶은 옷'을 입을 권리가 있다
최씨의 의견이 반영된 정장은 현재 하티스트 온라인 사이트에서 판매 중이다. 최씨는 “지금 나와 있는 정장 중에선 휠체어 사용자에게 가장 적합한 옷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옷의 편의성 외에도 특별히 신경 썼던 점은 정장의 색감이다. 경조사에 입고 참석할 수 있게 점잖은 색을 골랐지만 평상시에 입기 무거운 검은색은 피했다.
“엠버서더 활동을 하고, 옷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과정에서 패션에 대한 관심이 많이 커졌어요.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 아무래도 주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고, 그러다보면 사람들 시선을 인식하게 돼요. 제가 다치지 않았다면 어떤 옷이든 편하게 입었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보이는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되죠. 그래서 하티스트팀에도 다양한 의견을 드렸는데, 제가 만족할 때까지 옷을 수정해주셨어요.”
누구에게나 ‘입고 싶은 옷’을 입을 권리가 있다. 최씨는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는 요즘 입고 싶은 옷으로 ‘트렌치코트’를 꼽았다. 그는 “무릎을 살짝 덮는 긴 기장이 좋을 것 같다”며 “앉은 자세로 입어도 예쁘고 편하려면 코트처럼 앞은 길고, 뒤는 짧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강민혜 기자 kang.mi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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