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도 가격이 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상식에 속한다. 가격이 시장을, 시장에서 벌어지는 수요와 공급의 함수 관계를 전제하는 거니까 말이다. 당연히 생명마다 가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시장 상황에 따라 생명 가격의 일정한 등락도 상상할 수 있다. 여기까지였다면 가격이 낮게 책정됐거나 그런 사람의 주변인인 경우 그래도 덜 억울할 텐데 가격이 전혀 공정하지 않은 방식으로 매겨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심각한 문제 아닌가. 그럴 때 생명 가격에 관련된 불공정성은, 가령 이런 주제의 원초적 기억에 가까운 유명한 ‘유전무죄, 무전유죄’ 외침을 떠올리게 한다. 돈 있으면 무죄, 돈 없으면 무죄. 이 명제를 생명 가격표 버전으로 비틀면 이렇게 된다. 돈 있으면 높은 가격, 돈 없으면 낮은 가격. 가령 사망사고 보상금이 이런 원칙에 따라 정해지지 않나.
[사진 민음사] 저자 하워드 스티븐 프리드먼은 통계 전문가이자 보건경제학자다. 존스홉킨스대에서 바이오메디컬엔지니어링(전공 공부 이름부터 뭔가 있어 보인다) 박사학위를 땄고 컬럼비아대에서 강의한다. 이런 사람이 자기의 전문지식을 십분 활용해 쓴 책이다. 다시 무전, 유전 얘기로 돌아가면 가령 미국 9·11 테러로 사망한 희생자 3000명의 유족에게 지급된 보상금이 적게는 25만 달러부터 많게는 700만 달러까지 큰 차이가 났다고 한다. 역시 생전 소득을 바탕으로 보상금을 산정했기 때문이다.
사망 보상금은 생명 가격 이야기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저자는 생명 가격이 우리가 먹는 수돗물 수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아이를 낳을 때나, 키워서 교육할 때, 심지어 죽을 때는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거의 생애 주기 형식으로 상세히 살핀다. 굳이 이런 것까지 알 필요가 있나 싶은 좁은 전문분야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책의 대주제, '불공정한 생명 가격표' 산정으로 어차피 수렴되는 얘기들이다.
저자가 생명 가격 산정에 있어서 불공정의 원흉처럼 지목한 게, 대규모 토목 사업에서 흔히 사용되는 비용편익분석이다. 비용편익분석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정부가 가령 화력발전소에 대한 새로운 환경 규제책을 도입하거나 자동차 회사가 문제 있는 부품에 대한 리콜 여부를 결정할 때 어김없이 사용된다. 우리 피부에 와 닿는 문제들 아닌가.
그런데 이 분석이 왜곡에 극히 취약하다는 게 문제다. 가령 기업들은,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비용을 과도하게 높게 추산한다고 한다. 리콜을 전제로 한 비용편익분석 때 지금 당장 투입되는 리콜 비용이, 리콜 시행으로 가령 수십 년 후 소비자 건강 증진에 기여해 예상되는 편익을, 크게 웃돈다면 당장 리콜을 하지 않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담배회사 필립 모리스의 의뢰를 받은 한 컨설팅 업체가 2001년 작성했다는 흡연 관련 보고서는, 생명 가격 왜곡의 끝판왕 같은 느낌이다. 넉넉한 국고에 도움 되니 체코 정부가 국민들에게 흡연을 권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비용편익분석의 마술, 혹은 최악의 도덕적 해이다.
이런 일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언제나 분석보다는 해법 고안이 어렵다. 생명 가격이 책정되는 과정을 감시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일종의 시민운동 아니겠나. 그런 일에 나서는 경우와 나서지 않는 경우를 비교하는 비용편익분석이 필요할까.
[생명 가격표] 저자 하워드 스티븐 프리드먼 번역자 연아람 민음사 328쪽, 1만8500원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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