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노동자탄압·임금억제로 물가 안정…조작사건도 많아
[전두환 정부 경제통치 평가③] 노동정책
최저임금·국민연금의료보험·고용평등 개선
제3자 개입 금지 조항 개악으로 노조 탄압
정권 유지 위해 '북풍정치' 등 공작도 많아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23일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장본인이어서 각계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남긴 명암을 짚어봤다. [편집자]
전두환 정권의 철권통치 대상엔 노동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불순분자로, 그들의 파업·집회를 사회혼란으로 여겼다. 정권에 대항하는 노동운동가들을 삼청교육대에 강제수용하는 등 인권유린은 다반사였다. 심지어 근로자 임금 인상 억제를 강제해 국가 차원에서 물가 안정 수단으로 악용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부(1980년 9월~1988년 2월)는 앞서 박정희 정부가 수립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96년 총 7차) 중 5차(1982~1986년)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경제개발 계획은 5차부터는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0~1970년대에는 먹고 사는 생존이 중요한 과제였다면, 1980년대엔 자유·문화·복지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던 시기였다.
전두환 정부는 경제개발 계획을 이어나가 박정의 정부를 잇는 적통 정권임을 알리는 동시에, 사회 변화를 반영해 신군부에 대한 저항감을 줄이고 정권의 안착을 도모했다. 그 예로 국풍81 축제, 한국프로야구·축구 창설, 야간통행금지 해제,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을 진행했다.
사회·근로·연금·의료 관련 복지제도도 개선해나갔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농어촌을 떠나는 이농과 대도시 집중화가 심화하고, 소득불평등과 도시빈민이 증가하던 사회구조 변화도 복지 확충의 한 배경이 됐다.
근로복지 분야에서는 1984년 최저임금제 시행 방안, 1986년 의료보험 전국민 확대 방안과 국민연금제도·최저연금제 도입 방안, 1986년 최저임금법 제정, 부당 노동행위 처벌을 담은 노동조합법 개정 등을 발표했다.
최저임금제는 1953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근거를 마련했으나 기업주들의 반발과 사회여건 부족으로 보류됐다. 그러다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 1986년 국민복지 증진의 일환으로 도입을 결정, 그 해 연말에 법을 만들어 정권 말기인 1988년 시행에 들어갔다. 최저임금제를 통해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하도록 강제성을 못박았다.
사회복지망 확충으로 도시빈민·소득불평에 대응
대책의 하나로 국민의 절반에 머무르던 의료보험 혜택을 모든 국민이 받도록 하는 ‘전 국민 의료보험 조기 정착’ 방안을 1987년에 제시했다. 이에 따라 의료보험을 1988년 농어촌으로, 이듬해엔 도시 전역으로 확대했다.
국민복지연금도 1986년 법 개정을 거쳐 수혜 폭을 넓혔다. 18~60세 미만 모든 취업연령층으로 확대, 1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 우선 실시, 사용자와 근로자 균등 분담, 정부가 제도운영관리비 부담 등의 내용으로 개선했다. 1987년엔 근로자의 주거 안정과 목돈 마련을 지원하는 법도 만들어 이듬해 시행했다.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엔 노동관계법·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 등을 개정했다. 이를 통해 행정관청의 재량권 남용 축소, 노동조합 요건 축소와 설립 자유화, 단체교섭권한 위임절차 간소화와 사후신고, 노사 간 세력 균형을 위한 근거 마련 등의 조치를 취했다. 같은 해에 노후생활 연금신탁제를 도입하고 남녀고용평등법을 만들어 여성차별 철폐 기반도 마련했다.
이렇게 전두환 정부 때 기틀을 마련한 사회·근로 복지정책들은 신군부 차기 정권인 노태우 정부 때도 계속 이어졌다.
정권의 폭압에 청년 노동자들 분신자살 잇따라
옛 노동부(현 고용노동부)의 노사분규 통계를 살펴보면 1985년에는 노사분규 265건, 노사분규참가자 2만8700명, 노동손실일수 6만4300일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권 말기인 1987년엔 3749건, 126만2300명, 694만6900일로 급증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노동자·학생·시민들의 민주·자유 열망이 폭발한 것이다. 이렇게 억눌렸던 민심은 대통령직선제와 정당·언론 자유화를 추진한 차기 노태우 정부 때 봇물처럼 표출됐다.
이 때문에 전두환의 철권통치 때 적지 않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잇따랐다. 부산에서 상경한 김종태씨는 1980년 서울 신촌역 부근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학살 사건을 알리고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했다. 김씨는 앞서 2년 전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는 야학을 운영하다 정부 감시에 걸려 강제 해산됐다.
1984년엔 택시운전사 박종만씨, 1985년엔 건설노동자 홍기일씨, 1986년엔 금속노동자 박영진씨 등이 노조탄압 규탄, 근로기준법 준수, 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했다. 이 밖에도 노동운동을 하던 수많은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의문사·행방불명·행려병자 등으로 사라져갔다. 당시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 연금,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등 온갖 박해가 이어졌다.
조작사건·경제정책에 희생되고 강제 수용되기도
전두환 정권은 집권 초기 1980년 12월에 ‘제3자 개입 금지’ 규정을 추가하는 등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개악했다. 제3자 개입 금지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이나 노동운동 전개를 외부 세력이 돕지 못하도록 원천 금지한 조항이다.
제3자 개입 금지는 정부와 기업이 노동계를 탄압하는 주요 수단으로 악용됐다. 이후 정권이 바뀌고 일부 법 개정이 이뤄졌지만 그 잔재는 20여년동안 이어졌다. 결국 시민단체와 노동계의 반발로 2005년 노사관계선진화 방안에 채택돼 2006년에 결국 폐지됐다.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 임금 인상 억제를 물가 안정 정책의 하나로 악용하기도 했다. 집권 초기 1980~1981년에 유가와 물가가 급등하자 인상을 부추기는 나쁜 심리를 내쫓자며 ‘부정적 심리 추방운동’을 벌였다. 그 대상 중 하나가 노동자 임금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임금 동결을 선언하며 노동자 임금 인상을 통제했다.
☞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대장까지 지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순자(82)씨를 비롯해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가 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의 5·16 군사구데타 때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주도하고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조사하면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신군부 정권을 출범시켰다. 1980년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전남도민들을 유혈진압했다. 간선제로 1980년 11대 대통령, 1981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 2월까지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대통령직 퇴임 후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반란·내란죄, 광주시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죄목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박정식 기자 park.jeongsi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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