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처럼 모아서 정승처럼 썼던 '자린고비' 조륵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⑫]
‘천장 굴비’ 이상 가는 자린고비 실존 인물 조륵(趙玏)
시장서 생선 만진 손 씻고 그 물로 생선국 끓이기도
기근에 고통받는 사람들 위해 재산 나눠
온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밥 두 숟가락을 먹고 천장에 매달려 있는 굴비 한 번 보고 다시 밥 두 숟가락을 먹고 천장의 굴비(지역에 따라 소금 혹은 새우젓이 대신 등장한다)를 바라보고를 반복했다. 가족 중 누군가 한 숟가락만 먹고 보기라도 하면 “그렇게 자주 보면 너무 짜다. 물 마셔라”라는 불호령이 내렸다. 지인이 생선 한 마리를 선물하니 “이 물건은 밥도둑이다”라며 담장 밖으로 던져 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법한 ‘자린고비’ 이야기다.
그런데 이 ‘자린고비’는 버전이 각양각색이다. 한국구비문학대계를 보면 의왕, 음성, 충주, 서산, 동두천, 김천, 서산, 담양, 문경 등 전국적으로 퍼져있다. 심지어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시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원 또한 ‘어진(자인) 부모(고비)’에서 유래했다는 설, 부모님 제사에 쓰는 지방을 기름에 절여 재사용한 ‘절인 고비’가 유래라는 설이 있다. 앞서 소개한 일화의 ‘절인 굴비’, 혹은 아니꼬울 정도로 쪼잔하다는 뜻의 ‘작은 꼽재기’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화의 내용도 다양한데, 이 일화들이 모두 집대성되어 등장하는 사례가 두 번 있다. 하나는 18세기의 문헌 〈해동화식전〉에 등장하는 ‘자린급(煮吝給)’이고, 다른 하나는 충주의 실존 인물 조륵(趙玏)이다. 이번 화에서는 이중 조륵을 다룬다. 자린고비의 모델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인데다 큰 부자이기 때문이다.
상상 뛰어넘는 자린고비 보여준 조륵
사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것이다. 절약하고 아끼는 것은 좋지만 자기 몸을 고되게 만들고 가족까지 힘들게 하니 말이다. 너무 쪼잔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소하다 싶은 것도 낭비하지 않는 자세만큼은 본받아야 한다. 일화를 하나 더 보자. 어느 날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이 물었다. “저도 저희 마을에선 소문난 구두쇠지만, 재산을 별로 모으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공처럼 부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조륵이 말했다. “따라오시오. 나와 같이 잠깐 나갑시다.” 그리고는 손님을 충주 탄금대로 데려갔다. 깎아지른 듯한 높은 절벽 아래는 강물이 굽이쳐 흐르고, 그 낭떠러지 아래로 소나무 가지가 하나 드리워져 있었다. 조륵은 손님에게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를 붙잡도록 했다. 손님이 시키는 대로 하자 이번에는 한 손을 놓고 나머지 한 손으로만 잡도록 했다. 손님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조륵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 조륵은 “자, 이번에는 그 손도 놓으시오”라고 했다. 손님은 깜짝 놀랐다. 손님이 “아니, 나보고 떨어져 죽으란 말씀입니까?”라고 소리치자, 조륵은 천연덕스럽게 “좋소. 이제 나무에서 내려오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곤 “자, 나는 그대에게 부자가 되는 방법을 다 알려주었소”라고 말했다.
손님이 “죄송합니다만, 어리석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알기 쉽게 말씀해주십시오”라고 요청하자, 조륵이 물었다. “큰 부자가 되려면 마음가짐이 중요하오. 방금 그대가 한 손으로 가지를 잡고 있을 때, 꽉 붙잡아 놓치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했소. 그 이유가 무엇이오?” 손님이 대답했다. “그야 그 손마저 놓으면 죽게 생겼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조륵이 말했다. “바로 그것이오. 당신 손에 있는 쌀 한 톨, 엽전 한 잎을 방금처럼 놓치지 않으려고 해보시오. 이것을 놓치면 죽는다는 마음가짐이어야 하오.” 손님은 “깊이 명심하겠습니다”라며 인사하고 떠났다고 한다.
세계적 부자들, 조륵과 통한다
물론 이렇게 빡빡하게 사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자린고비처럼, 구두쇠처럼 살아야 돈을 모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본인을 불편하게 만들고 가족을 힘들게 만들면서까지 부자가 되어야 하느냐에 대해선, 이견이 갈릴 것이다. 하지만 많든 적든 돈을 모으려면 푼 돈이라도 낭비하지 말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교훈만큼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자린고비’엔 수전노라는 뉘앙스가 없다. 오로지 돈만 밝히는 사람답지 못한, 그런 사람은 아니다. 돈을 쓰는 데 인색하고 지나칠 정도로 절약할지언정, 써야 할 때는 쓰는 것이 또한 자린고비 정신이다. 조륵은 환갑이 되자 친척과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크게 잔치를 열었다. 그리곤 말했다. “여러분! 내가 그동안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려고 구두쇠 짓을 한 것이 아니오. 여기 계신 여러분께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한평생을 아껴가며 돈을 모으고 또 모았소. 이제는 그 재산으로 남은 생을 베풀며 살 것이오.” 이후 조륵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곡식과 재물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멀리 전라도, 경상도에서 기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까지 구휼미를 보내주었다. 나라에서 이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벼슬을 내려주었지만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이상 어떻게 돈을 모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해 하나의 모범을 보여준 ‘자린고비 조륵’의 일화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이용우 기자 lee.yongwo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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