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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TV에서 OTT까지…시대 넘어 살아남는 프로레슬링 콘텐츠 비결은? [한세희 테크&라이프]

헐크 호건에서 로먼 레인즈까지 ‘인기 지속’

WWE가 어린이도 볼 수 있는 시청 등급으로 내용을 순화하면서 국내 프로레슬링 인기는 다시 가라앉아 이제는 어느 정도 고정 팬층을 확보한 엔터테인먼트 장르 정도로 자리 잡았다. 사진은 레슬매니아 35 전경. [사진 WWE]

[한세희 IT 칼럼니스트] 남성들이라면 아마도 프로레슬링에 대한 추억 한두 가지는 있을 것이다. 1980년대 미군 방송 AFKN에서 미국 WWF 프로레슬링이 방영되며 국내에서도 이를 챙겨 보는 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헐크 호건이나 얼티밋 워리어 같은 슈퍼스타들이 활동하던 시기로, 국내서도 이들의 경기를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대여점에서 볼 수 있었다.

한풀 꺾였던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2000년대 초반 국내 케이블TV 시장 급성장과 함께 늘어난 스포츠 채널들이 프로레슬링 콘텐츠를 수급하면서 다시 불붙기 시작한다. 세계자연기금(WWF·World Wide Fund for Nature)과의 분쟁 후 WWF에서 이름을 바꾼 WWE는 오늘날 탑 할리우드 배우가 된 더 락(드웨인 존슨)과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 같은 스타를 앞세워 새로운 전성시대를 열었고, 이때는 국내에서도 프로레슬링 인기의 중흥기였다. 현재 국내 프로레슬링 팬 중에는 이때를 황금기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이후 UFC나 K-1 같은 이종격투기가 등장하고, WWE가 어린이도 볼 수 있는 시청 등급으로 내용을 순화하면서 국내 프로레슬링 인기는 다시 가라앉아 이제는 어느 정도 고정 팬층을 확보한 엔터테인먼트 장르 정도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의 위상이 어떻든, WWE는 프로레슬링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프로레슬링 기업이나 단체 중 독보적인 1위다. 1999년 뉴욕 증시에 상장했으며, 한 해 매출은 10억 달러에 이른다. 빈스 맥마흔 WWE 회장은 한때 포브스 부자 순위 300위 안에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말 그대로 몸을 바쳐 프로레슬링 사업을 이어 갔다.

프로레슬링 각본보다 더 흥미로운 WWE 가족 드라마

WWE를 본 적이 있다면, 맥마흔 회장을 비롯해 그의 자녀인 쉐인과 스테파니 등이 직접 쇼에 등장해 스토리라인에 참여함을 알 것이다. 프로레슬링은 선수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대립하거나 경쟁하며 경기를 벌이는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데, 이들 오너 일가는 악덕 경영자 기믹을 갖고 등장해 선수들과 대립하고 싸우고, 실제로 링에 올라 선수들에게 얻어맞거나 심지어 직접 경기를 하기도 한다. 또 아버지와 아들, 딸이 서로 싸우고 배신하며 (각본상) 회사에서 서로 축출하려 하는 등 막장 스토리도 수시로 펼쳤다.

그런데 최근 WWE에서는 각본이 아니라 실제 가족 드라마가 이어지고 있다. 빈스 맥마흔은 그간 여러 명의 회사 여직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거나 성추행해 회삿돈 1200만 달러 이상을 지급해 입막음한 사실이 드러나 지난해 6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회사 업무에서 떠나 있던 스테파니가 CEO로 돌아오고, 스테파니의 남편이자 유명 프로레슬러였던 폴 레베스크(트리플 H)가 스토리와 크리에이티브를 총괄하는 임원이 되었다.

하지만 올해 초, 빈스는 미디어 협상과 회사 매각 등에 기여하겠다며 급작스럽게 이사회 의장으로 복귀했다. 이에 스테파니는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WWE를 다시 재미있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들으며 팬들의 지지를 받는 레베스크는 자리를 지켰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선수들 역시 동요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팬들의 우려와 별개로 WWE 주가는 급등했다. 빈스가 회사 매각을 추진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1년 전 50달러 수준이던 주가는 그의 복귀 후 90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실제로 최근 WWE 콘텐츠의 가치가 올라갔기 때문이다. 대형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OTT)가 잇달아 등장하고, 위기를 느낀 대형 케이블 방송 네트워크들도 콘텐츠 확보 경쟁에 나선 데 따른 것이다.
WWE는 ‘러’(RAW)와 ‘스맥다운’(Smackdown)이라는 주간 쇼를 30년 가까이 꾸준히 이어오고 있고, 주류 스포츠는 아니지만 안정적 시청률을 약속하는 팬덤을 갖고 있다. [트리플H 스테파니 빈스 맥마흔 유튜브 캡처]

프로레슬링 콘텐츠가 OTT 시대 주목받는 이유는?

넷플릭스가 개척한 OTT 시장은 디즈니플러스, 컴캐스트의 피콕,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의 HBO맥스 등이 뛰어들고, 코로나19 호황도 끝나면서 적은 비용으로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들에게 WWE는 매력적인 상품이다. WWE는 ‘러’(RAW)와 ‘스맥다운’(Smackdown)이라는 주간 쇼를 30년 가까이 꾸준히 이어오고 있고, 주류 스포츠는 아니지만 안정적 시청률을 약속하는 팬덤을 갖고 있다. 연중 일정 시기에만 시즌이 열리는 다른 프로 스포츠와 달리 WWE는 1년 내내 쉬지 않는다. 인기 선수를 활용한 상품 판매와 영화, 드라마 제작도 가능하다. 최근 WWE 방송 중계권료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그래서 WWE 인수 후보자로 컴캐스트나 폭스, 디즈니, 넷플릭스 등 대형 미디어 콘텐츠 및 OTT 기업들이 즉각 거론되기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가 WWE를 인수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PIF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단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인수해 운영 중이다. 또 사우디아라비아는 국제 사회에서의 인식 개선을 위해 최근 현지에서 WWE 대형 이벤트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등 WWE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전통적 프로 스포츠인 WWE가 시대 변화와 맞물려 OTT 시대에 적합한 콘텐츠로 변신한 것이다. 물론 WWE가 단지 운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사실 WWE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며 커 온 기업이기도 하다. 빈스는 난립한 단체들이 각자 연고지에서 활동하는 지역 흥행 사업이던 프로레슬링을 전국 규모로 키운 인물이다. 뉴욕 지역 단체에 불과했던 당시 WWF의 인지도를 높이려 그는 전국 단위의 TV 중계를 적극 활용했다. 케이블 방송이 확산되자 ‘레슬매니아’ 같은 대형 이벤트를 열고, 시청 권한을 케이블 가입자에 파는 ‘페이 퍼 뷰’(Pay-per-View) 방식을 도입해 다시 한번 비즈니스 모델을 혁신했다.

2014년에는 모든 레슬링 TV 프로그램과 대형 유료 이벤트, 과거 수십년 간 아카이브 영상까지 더해 자체 OTT ‘WWE 네트워크’를 내보냈다. 프로레슬링의 넷플릭스가 된 것이다. 이후 기술 기업으로서 한계를 느껴 작년 4월에는 WWE 네트워크를 컴캐스트에 넘겨 피콕의 일부로 운영하는 10억 달러 규모 계약을 맺기도 했다.

WWE 기업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다만 WWE가 최근 시장이 원하는 바를 고루 갖춘 콘텐츠임은 확실하다. 그것은 바로 확고한 스토리와 팬, 꾸준함과 독특함, 새 기술과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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