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성 강조해서 믿었는데”…커지는 KB신탁 ‘책임론’
[여의도 한양아파트에 무슨 일이] ②
막대한 수수료 내는 신탁방식 정비사업, 운영 미숙 논란 봇물
[이코노미스트 박지윤 기자]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양아파트(여의도 한양) 시공사 선정 총회가 잠정 연기되면서 시행사업자인 KB부동산신탁(KB신탁)의 ‘책임론’이 거세지고 있다. 여의도 한양뿐 아니라 서울 양천구 목동신시가지7단지, 서울 영등포구 신길우성2차·우창아파트 등 신탁방식 재건축을 택한 단지들에서도 잡음이 이어지는 모습이다. 신탁사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재건축 사업추진에 속도를 내기 위해 신탁방식을 택했지만, 막대한 수수료를 낸 것에 비하면 신탁사의 역량이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KB신탁은 서울시로부터 위법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시공사 선정 과정을 중단하라는 권고를 받으면서 결국 10월 29일 예정했던 시공사 선정 총회를 무기한 연기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앞서 서울시는 KB신탁이 여의도 한양 재건축사업의 정비구역을 확정하기 전 시공사 선정에 나선 점을 근거로 들었다. 정비계획 변경 없이 상가 부지를 사업면적에 포함시켜 입찰 공고를 진행하는 등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과 국토교통부 정비사업 계약업무 처리기준 법규를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KB신탁은 시공사 선정 절차를 진행하기 전 토지 등 소유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법률도 검토했지만, 인허가청인 서울시의 판단과 상이한 부분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KB신탁 관계자는 “대형시공사를 선점하고 사업 진행 속도를 올리기 위해 올해 초부터 시공사 선정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며 “다수의 대형 법무법인을 통해 서울시의 이번 판단과 관련, 법률 검토를 진행한 결과 위법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법률 의견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시와의 법적 분쟁이 발생할 경우 최종적으로 법원의 판단을 받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사업이 지연되면 더 큰 피해가 우려되기 때문에 운영위원회와 협의를 거쳐 시공사 선정을 위한 전체회의를 잠정 연기하게 됐다”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빠른 시일 안에 롯데쇼핑과 협의를 마치고 연기 중인 시공사 선정 절차를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신탁방식 정비사업, 자금 조달과 추진력 강점으로 주목
신탁방식 정비사업은 크게 신탁시행과 신탁대행 방식으로 나뉜다. 신탁시행 방식은 조합 설립 없이 신탁사를 시행사로 선정해 사업을 신탁사가 도맡는 것이다. 신탁대행은 조합이 신탁사에 자금 관리 업무 등 일부 업무를 맡기는 방식이다.
신탁방식 정비사업은 전문성이 부족한 조합을 대신해 신탁사가 정비사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사업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신탁사 자체 자금 또는 신용을 활용해 초기 자금 조달에도 유리하다는 점이 더해지면서 신탁방식 정비사업이 대세로 떠오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신탁업계의 허술한 운영과 과열된 수주 경쟁으로 신탁방식 정비사업을 택한 단지 곳곳에서 문제가 터져나오는 모습이다. 여의도 한양뿐 아니라 최근 신탁방식 재건축사업을 택한 단지 곳곳에서도 잡음이 발생하고 있다. 서울 양천구 목동신시가지7단지(목동7단지) 재건축사업에서도 조합 또는 신탁방식을 두고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코람코자산신탁은 목동7단지 정비사업추진위원회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목동7단지 재건축사업을 신탁방식으로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목동7단지 재건축준비위원회는 사업 방식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소유주들과 논의해 사업 방식을 놓고 투표에 부칠 예정이라고 반박했다.
서울 영등포구 신길우성2차·우창아파트 재건축사업도 사업시행자로 선정한 한국자산신탁과 소유주 사이에 마찰이 발생했다. 지난해 5월 대우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한 뒤 공사도급 가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소유주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일반분양 수익 1~4% 수수료 수취, 전문성 체감 어려워
신탁사가 신탁방식 정비사업을 수주하면 총 일반분양 수익의 1~4%를 수수료로 받는다. 다만 정비업계에서는 받는 수수료에 비해 신탁사들의 전문적인 역량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금까지 신탁방식으로 지어진 단지는 손에 꼽을 정도다. 경기 안양 ‘한양수자인 평촌리버뷰’(304가구), 대전 동구 ‘e편한세상 대전 에코포레’(2267가구) 등이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2016년 도정법이 개정되면서 신탁사들이 정비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신탁방식을 택한 수도권 대형 정비사업장의 경우 일반분양 매출의 1~4%라고 해도 수수료가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에 이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부동산금융업계 관계자는 “신탁방식을 선택한 정비사업 현장이 완공까지 이어진 곳은 몇 군데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신탁사가 가져가는 수수료에 비해 전문성은 아직까지 미흡하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그는 “자금 대여를 위해 신탁방식을 택하기도 하는데 현실적으로 시공사가 납입한 입찰보증금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 신탁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다”고 덧붙였다.
신탁사의 전문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신탁계약을 해지하려 해도 요건이 까다로워 제어장치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최근 정부가 신탁계약 해지 요건 완화 내용을 담은 신탁 계약서·시행규정 표준안을 마련했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국토교통부는 표준안을 통해 신탁 계약을 체결한 주민 100%가 계약 해지에 동의하지 않아도 신탁사가 계약 후 2년 내 사업시행자로 지정되지 못하거나 주민 75% 이상이 찬성할 경우 신탁 계약을 일괄 해지할 수 있도록 요건을 완화했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시공사와 비교하면 신탁사 해지 요건은 아직도 문턱이 높다”며 “조합 총회를 열어서 과반 수 이상이 찬성하면 시공사를 변경할 수 있는 것처럼 신탁사도 동일한 기준을 둬야 신탁업계의 공정 경쟁을 강화하고 전문성을 제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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