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맞닥뜨린 또 하나의 법률리스크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김기동의 이슈&로(LAW)]
자본시장 모든 위법행위 처단하는 여의봉
규정 모호·광범위 해석…법안 재정비 필요
[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 법의 영역에서 ‘포괄적’이라는 말은 칭찬이 아니다. 법 문언이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경우를 꼬집을 때에도 쓰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포괄적 사기금지조항’이라 불리는 자본시장및금융투자에관한법률(자본시장법) 제178조 제1항 제1호에 대한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위 조항은 “누구든지 금융투자상품의 매매 그 밖의 거래와 관련하여, 부정한 수단, 계획 또는 기교를 사용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반 시 최고 무기징역까지 처할 수 있다는 벌칙조항도 있다.
상장과 비상장, 장내와 장외를 가리지 않고 모든 금융상품의 매매 기타 거래에 적용된다. 부정거래행위는 실제 재산상 손실이 없더라도 본 죄가 성립될 수 있다. 한마디로 자본시장의 거의 모든 위법행위에 대해 휘두를 수 있는 여의봉이라고 할 수 있다.
사기금지조항, 韓-美 차이는
여기서 말하는 ‘부정한 수단, 계획 또는 기교’란 무엇일가. 대법원은 “사회통념상 부정하다고 인정되는 일체의 수단, 계획 또는 기교를 말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반면 서울고등법원은 “제1호의 ‘부정한 수단, 계획 또는 기교’를 사용하는 행위는 제2호와 제3호 및 제3항에서 구체화한 부정거래의 내용과 동등하거나 그에 준하는 정도의 불법성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며 보다 좁게 해석한 바 있다.
시장 참여자들은 ‘부정한’이라는 개념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모호해 형사법의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에 반한다는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자본시장에서의 부정거래를 규제하는 위 법 조항은 일본을 모델로 삼은 것인데, 그 뿌리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규칙 Rule 10b-5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규칙은 미국에서 거의 모든 증권사기 사건에 적용되는 ‘포괄적 반사기 조항’(catch-all anti-fraud provision)이다.
한국도 빠르게 발전하는 자본시장에서 발생하는 범죄의 유형을 일일이 열거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포괄적인 사기금지조항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커졌다. 이에 따라 2007년 자본시장법 제정시 Rule 10b-5와 거의 동일한 포괄적 규제조항을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규정의 내용이 동일하더라도, 법 적용상 구체적인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는 SEC에 의한 행정조치나 주주·투자자들에 의한 집단소송에서 문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정거래의 요건 해석에 관한 주요 선례들도 대체로 민사책임이 문제된 사안들이다. 우리나라처럼 형사처벌까지 문제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특히 미국의 규정에 따르면, 민사상 손해배상청구가 인용되기 위하여 원고가 피고의 정보 조작행위(manipulation) 또는 사기행위(deception)을 입증해야 한다. 즉, 조작 내지 사기 혹은 그에 준하는 위법행위가 존재해야만 Rule 10b-5에서 규정한 사기적 부정거래에 따른 책임이 발생하는 셈이다. 이는 사기 등을 요건으로 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규정과 다른 점이다.
우리가 모델로 삼았던 일본조차 이러한 포괄적 사기금지조항을 극히 제한적으로 적용해온 반면, 우리나라는 그 활용도가 늘고 있는 추세다. 한국 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가 2023년도 이상 거래를 심리한 결과 금융위원회에 99건의 불공정거래 혐의를 통보했는데, 그중 ‘부정거래’가 31건으로 전체 혐의사건 중 31.3%에 이른다.
기업 활동에 악영향…부정거래 정의 구체화 필요
최근 들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신라젠의 무자본 인수합병(M&A), 라임·옵티머스 펀드 사기적 판매, 증권 애널리스트 선행매매 등 사건들에도 위 부정거래 조항이 적용됐다.
과거에는 제178조 제2항(위계의 사용)과 함께 보완적으로 178조 제1항 제1호를 적용했으나, 근래 들어 제1항 제1호만을 독자적으로 의율하는 등 점차 그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특정 종목을 ‘매수’ 추천하는 리포트를 작성하기 전에 차명계좌로 그 종목을 미리 매수한 후 리포트 발행 후 주가가 오르자 이를 팔아 수십억원의 부당이득을 취득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은 이 규정의 모호성과 광범위한 해석의 여지 때문에 기업들의 예측 가능성과 법적 안전성을 훼손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투자나 경영상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자본시장법상 부정 거래에 해당하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세계화, 글로벌화로 인해 어느 때보다도 기민하게 의사결정을 해야 할 기업들이 일일이 로펌으로부터 자문을 받은 후에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경제 발전에 크게 저해되는 환경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은 1934년 Rule 10b-5 제정 당시 포괄적으로 규정해 둔 사기적 거래행위에 관하여 법원의 정교한 해석과 유연한 적용을 통해 체계적인 법리를 구축해왔다. 이를 두고 윌리엄 렌퀴스트 전 미국 연방대법원장은 “입법의 도토리로부터 뻗어 나온 사법의 상수리나무(judicial oak which has grown from little more than a legislative acorn)”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 금융당국과 사법당국도 법의 명확성을 높이고, 부정거래에 대한 정의를 구체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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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조항은 “누구든지 금융투자상품의 매매 그 밖의 거래와 관련하여, 부정한 수단, 계획 또는 기교를 사용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반 시 최고 무기징역까지 처할 수 있다는 벌칙조항도 있다.
상장과 비상장, 장내와 장외를 가리지 않고 모든 금융상품의 매매 기타 거래에 적용된다. 부정거래행위는 실제 재산상 손실이 없더라도 본 죄가 성립될 수 있다. 한마디로 자본시장의 거의 모든 위법행위에 대해 휘두를 수 있는 여의봉이라고 할 수 있다.
사기금지조항, 韓-美 차이는
여기서 말하는 ‘부정한 수단, 계획 또는 기교’란 무엇일가. 대법원은 “사회통념상 부정하다고 인정되는 일체의 수단, 계획 또는 기교를 말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반면 서울고등법원은 “제1호의 ‘부정한 수단, 계획 또는 기교’를 사용하는 행위는 제2호와 제3호 및 제3항에서 구체화한 부정거래의 내용과 동등하거나 그에 준하는 정도의 불법성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며 보다 좁게 해석한 바 있다.
시장 참여자들은 ‘부정한’이라는 개념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모호해 형사법의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에 반한다는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자본시장에서의 부정거래를 규제하는 위 법 조항은 일본을 모델로 삼은 것인데, 그 뿌리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규칙 Rule 10b-5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규칙은 미국에서 거의 모든 증권사기 사건에 적용되는 ‘포괄적 반사기 조항’(catch-all anti-fraud provision)이다.
한국도 빠르게 발전하는 자본시장에서 발생하는 범죄의 유형을 일일이 열거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포괄적인 사기금지조항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커졌다. 이에 따라 2007년 자본시장법 제정시 Rule 10b-5와 거의 동일한 포괄적 규제조항을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규정의 내용이 동일하더라도, 법 적용상 구체적인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는 SEC에 의한 행정조치나 주주·투자자들에 의한 집단소송에서 문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정거래의 요건 해석에 관한 주요 선례들도 대체로 민사책임이 문제된 사안들이다. 우리나라처럼 형사처벌까지 문제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특히 미국의 규정에 따르면, 민사상 손해배상청구가 인용되기 위하여 원고가 피고의 정보 조작행위(manipulation) 또는 사기행위(deception)을 입증해야 한다. 즉, 조작 내지 사기 혹은 그에 준하는 위법행위가 존재해야만 Rule 10b-5에서 규정한 사기적 부정거래에 따른 책임이 발생하는 셈이다. 이는 사기 등을 요건으로 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규정과 다른 점이다.
우리가 모델로 삼았던 일본조차 이러한 포괄적 사기금지조항을 극히 제한적으로 적용해온 반면, 우리나라는 그 활용도가 늘고 있는 추세다. 한국 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가 2023년도 이상 거래를 심리한 결과 금융위원회에 99건의 불공정거래 혐의를 통보했는데, 그중 ‘부정거래’가 31건으로 전체 혐의사건 중 31.3%에 이른다.
기업 활동에 악영향…부정거래 정의 구체화 필요
최근 들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신라젠의 무자본 인수합병(M&A), 라임·옵티머스 펀드 사기적 판매, 증권 애널리스트 선행매매 등 사건들에도 위 부정거래 조항이 적용됐다.
과거에는 제178조 제2항(위계의 사용)과 함께 보완적으로 178조 제1항 제1호를 적용했으나, 근래 들어 제1항 제1호만을 독자적으로 의율하는 등 점차 그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특정 종목을 ‘매수’ 추천하는 리포트를 작성하기 전에 차명계좌로 그 종목을 미리 매수한 후 리포트 발행 후 주가가 오르자 이를 팔아 수십억원의 부당이득을 취득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은 이 규정의 모호성과 광범위한 해석의 여지 때문에 기업들의 예측 가능성과 법적 안전성을 훼손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투자나 경영상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자본시장법상 부정 거래에 해당하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세계화, 글로벌화로 인해 어느 때보다도 기민하게 의사결정을 해야 할 기업들이 일일이 로펌으로부터 자문을 받은 후에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경제 발전에 크게 저해되는 환경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은 1934년 Rule 10b-5 제정 당시 포괄적으로 규정해 둔 사기적 거래행위에 관하여 법원의 정교한 해석과 유연한 적용을 통해 체계적인 법리를 구축해왔다. 이를 두고 윌리엄 렌퀴스트 전 미국 연방대법원장은 “입법의 도토리로부터 뻗어 나온 사법의 상수리나무(judicial oak which has grown from little more than a legislative acorn)”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 금융당국과 사법당국도 법의 명확성을 높이고, 부정거래에 대한 정의를 구체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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