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통영의 낮과 밤, 그리고 멈춰선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힘[김현아의 시티라이프]
- [지방의 시간을 기록하다]⑤
과거 조선업 호황 누렸던 경제력 있던 도시, 최근 통영이 마주한 성적표는 ‘서늘’
“지금 통영에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
[김현아 가천대 사회정책대학원 초빙교수·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통영’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나는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필자는 ▲이순신 ▲박경리 ▲윤이상이라는 세 명의 인물과 ▲나전칠기 ▲겨울 미각을 깨우는 굴 ▲옛스러운 디저트인 꿀빵이 떠오른다. 하지만 도시를 연구하는 연구자적 입장에서 내게 통영은 아름다운 관광지이기 이전에, 뼈아픈 ‘산업의 흥망성쇠’가 새겨진 현장이다.
한때 ‘말(馬)은 제주로, 돈은 통영으로’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로 통영은 어업과 조선업 호황을 누렸던 경제력이 있던 도시였다. 그렇지만 지금 통영이 마주한 성적표는 서늘하다. 2010년 14만명을 웃돌던 인구는 중소 조선소들의 연쇄 부도와 함께 무너져 내려 2023년 기준 12만명 선마저 위협받고 있다. 한때 전국 시·군 중 실업률 1위(2018)라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고, 정부로부터 수차례 ‘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돼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듯 연명해온 것이 통영의 또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예술과 빛으로 다시 깨어나는 통영의 낮과 밤
그렇지만 최근 방문한 통영에서 필자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과거의 ‘스쳐가는 관광’에서 ‘머무르는 관광’으로 진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낡은 달동네에 벽화를 입혀 전국적인 명소가 된 동피랑과, 박경리 선생의 문학적 향취가 흐르는 서피랑, 여기에 통영의 피카소 전혁림 화백의 예술혼이 담긴 전혁림미술관(전혁림 작가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인왕실에 걸린 <통영항> 그림의 작가) 등이 통영의 낮을 채우고 있다면 남망산 조각공원의 ‘디피랑’은 통영의 밤을 새롭게 정의했다.
화려한 미디어아트로 되살아난 디피랑은 관광객을 밤까지 붙잡아둠으로써 숙박과 야간 식음료 소비를 유도한다. 이는 단순히 볼거리 하나가 늘어난 차원이 아니다. 2023년 국민여행조사에 따르면 숙박 여행자의 1인 지출액은 당일 여행자의 약 2.5배에 달한다고 한다. 지방 소멸의 위기 속에서 도시의 시간을 밤까지 연장하여 경제적 활력을 도모하는 ‘야간 도시 기획’의 모범 답안을 통영이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멈춰선 거인 ‘신아조선소’, 환경만큼 절실한 지역 경제 회복
그러나 디피랑의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옛 신아조선소 부지는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통영 경제 재도약의 핵심이자 1조원 규모(민간투자 포함)의 국책사업으로 화려하게 시작했던 ‘폐조선소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토양 오염 정화 문제와 그로 인한 천문학적인 비용 상승, 행정 절차의 늪에 빠져 수년째 표류 중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만난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는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방증한다.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든다더니 흉물로 방치해 둔 지가 언제인데 펜스만 쳐놓고 있느냐”는 탄식이 주를 이룬다. 조선업이 떠난 자리를 어떠한 산업이나 기업이 메꾸어주지 못한 상황에서 주민들은 환경적 ‘무결점’보다는 경제적 ‘재도약’과 사업의 ‘속도’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관계 당국은 완벽한 오염 정화라는 명분과 법적 기준 뒤에 숨어 서로 책임을 미루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물론 시민의 안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다. 하지만 그것이 사업 지연의 막연한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통영의 지방 소멸 시계는 완벽한 정화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려줄 만큼 여유롭지 않다. 그래서 지금 통영에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첫째, 토양 정화 과정 자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를 역발상의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프로세스 투어리즘’을 제안한다. 펜스로 가리고 숨길 것이 아니라, 오염된 땅이 인간의 노력으로 치유돼 가는 과정을 에코 투어리즘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안전이 확보된 구역부터 단계적으로 개방해, 멈춰선 골리앗 크레인 아래서 설치 미술제를 열거나 팝업 스토어를 운영한다면 ‘공사 중인 현장’조차 MZ세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힙’(Hip)한 콘텐츠가 될 수 있다.
둘째, 개발의 밑그림을 원점에서 다시 그려야 한다. 현재의 주거·상업 위주 개발 계획은 수도권이나 대도시의 문법을 답습한 것으로, 통영과 같은 지방 중소도시에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우리는 프랑스 낭트(Nantes)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낭트는 1987년 마지막 조선소가 문을 닫으며 도시 전체가 실직과 우울감에 빠졌었다. 하지만 그들은 폐업한 조선소 부지를 밀어내고 그곳에 거대한 기계 코끼리와 해양 생물을 전시하는 ‘기계 섬’ 테마파크를 조성했다. 조선소의 기술력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 창의적인 공간은 쇠락해가던 공업 도시를 연간 수백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문화 관광지로 탈바꿈시켰다.
‘프로세스 투어리즘’과 ‘문화 규제 프리존’으로 여는 미래
통영 역시 무리한 고밀도 개발보다는, 통영만의 바다와 조선업 유산을 결합한 ‘문화 규제 프리존’을 도입해야 한다. 용도지역과 건폐율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나 창의적인 건축과 실험적인 콘텐츠가 폐조선소를 채울 때, 비로소 민간 투자의 물꼬도 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강력한 거버넌스의 구축을 촉구한다. 현재의 지지부진함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행정의 문제다. 통영 폐조선소 재생을 위한 ‘범정부 전담 추진단’을 구성해 토양 정화 기준의 합리적 적용(위해성 평가 도입 등)부터 콘텐츠 유치까지 멈춰 서 있는 이 사업의 물꼬를 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소멸해가는 지방 도시에 새로운 심장을 이식하는 국가적 과제다.
이순신 장군의 바다가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했다면, 이제는 혁신적인 공간 재생이 위기의 통영을 구해야 할 때다. 남망산 디피랑에서 쏘아 올린 빛이 건너편 옛 신아조선소의 멈춰선 크레인까지 이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과거의 산업 유산과 현재의 기술, 그리고 미래를 향한 과감한 규제 혁신이 만날 때, 통영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글로벌 문화·예술 거점으로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멈춰선 통영의 시간은 다시 힘차게 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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