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글로벌 에너지 패러다임의 거대한 이동 시작됐다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 호르무즈 해협 폐쇄와 중동 중심 모델의 종말
아세안, 에너지 공조를 통한 전략적 허브 부상
[김상수 Hanbridge 대표] 2026년 초, 세계 경제는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가장 근본적인 지정학적 변곡점에 직면했다. 이란을 중심으로 한 ‘키네틱 분쟁’(Kinetic Conflict)이 격화되며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이 폐쇄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단순한 유가 급등을 넘어 지난 수십 년간 지속된 중동 중심 에너지 의존 모델의 종말을 의미한다.
글로벌 자본은 중동의 불확실성을 피해 지정학적 중립 지대이자 미개발 자원 보유국인 동남아시아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공격적인 상류 부문(Upstream) 개발과 에너지 주권 강화 전략은 아세안을 새로운 ‘전략적 요새’로 각인시키고 있다.
공급망 붕괴가 드러낸 중동의 제도적 취약성
2026년 3월 4일, 호르무즈 해협의 전격 폐쇄로 전 세계 석유 및 천연가스 물동량의 약 20%가 차단되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를 “역사상 최대의 에너지 및 식량 안보 위기”로 규정했다. 브렌트유는 배럴당 120달러를 돌파했으며, 카타르에너지는 모든 수출에 대해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하며 글로벌 가스 시장을 마비시켰다.
이번 위기는 중동 지역의 구조적 취약성을 노출했다. 시리아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발생한 과도 정부의 혼란과 레반트 지역의 거버넌스 실패는 중동을 장기 투자가 불가능한 고위험 지역으로 전락시켰다. 투자자들은 이제 공식 정책보다 비공식 영향력 네트워크인 '그림자 내각'의 위험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자본은 아시아 생산 네트워크와 연결된 안전한 자원 거점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중동이 분쟁에 휘말린 것과 대조적으로, 아세안 국가들은 미·중 경쟁과 중동 분쟁 사이에서 비동맹 중립 노선을 견지하며 공급망 허브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은 풍부한 석유·천연가스 매장량을 바탕으로 미개발 광구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례로 약 210억달러(약 32조원)가 투입되는 마셀라 블록의 아바디(Abadi) LNG 프로젝트는 2026년 4월 착공을 앞두고 있다. 연간 950만 톤의 LNG 생산 능력을 갖출 이 프로젝트는 일본 INPEX, 인도네시아 페르타미나(Pertamina),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Petronas)가 협력하는 아시아 에너지 공조의 상징이다. 또한 이탈리아 에니(Eni)는 동칼리만탄 해상 가스 프로젝트에 대한 최종 투자 결정(FID)을 내려, 중동발 LNG 부족 사태 완화에 기여할 전망이다.
인도 국민들이 2026년 3월 26일 뭄바이의 가스 기관 사무실 근처에서 빈 액화석유(LPG) 실린더를 채우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중동 분쟁 고조로 인해 걸프 지역에서 선적이 중단되면서 전국적으로 LPG 공급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 [사진 EPA/연합뉴스]
말레이시아의 공격적 투자와 자본의 대이동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는 2026년 총 91개의 우물을 시추할 계획이며, 심해 탐사와 탄소 포집 및 저장(CCS) 기술을 결합해 가스의 저탄소 가치를 극대화하고 있다.
중동의 지정학적 프리미엄이 ‘지정학적 벌금’으로 변하면서, 걸프 협력 회의(GCC) 국가들의 국부펀드조차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리고 있다. HSBC에 따르면 향후 10년간 아시아와 중동 간 누적 외국인 직접투자(FDI) 흐름은 2700억달러(약 4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며, 그 중심에는 아세안의 에너지 인프라가 자리 잡고 있다.
2026년 현재 세계 경제는 중동의 황혼과 아세안의 여명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동남아시아는 더 이상 저렴한 노동력의 하청 기지가 아닌, 천연자원과 지정학적 안정성을 결합한 전략적 에너지 보루로 거듭나고 있다.
향후 글로벌 투자 지형은 중동의 변동성을 회피하고 동남아시아의 실질 가치에 베팅하는 방향으로 재편될 것이다. 한국 기업에 이는 에너지 안보 확보를 위한 생존 전략이자 기회다. 중동 의존도를 낮추고 아세안의 상류 자원 및 그린 에너지 생태계에 참여하는 것은 21세기 새로운 에너지 패러다임 대응의 핵심이 될 것이다.
필자는 삼정 KPMG∙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한국벤처투자 등 23년이상 다양한 사업경험과 더불어 벤처캐피탈∙회계법인∙인프라∙스타트업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현재 싱가포르의 Hanbridge의 대표로 한국 중소∙벤처기업의 해외 진출 및 해외 자금 유치를 돕는 역할과 함께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생태계를 연계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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