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일반
넷플릭스도 쇼핑도 음악도 올랐다 ‘구독료 폭탄’에 닫히는 지갑
- [구독 어디까지 해봤니]③
일상이 된 구독, 가계 압박하는 부메랑으로
광고요금제·제휴할인 확산…이탈막기 총력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매달 말일이 다가오면 직장인 김성우(가명·32) 씨의 스마트폰은 연이어 울리는 결제 알림음으로 분주하다. ▲글로벌 OTT 플랫폼 1만7000원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1만4900원 ▲이커머스 멤버십 7890원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1만원까지. 매달 통장에서 고정적으로 빠져나가는 구독료만 합쳐도 이미 5만원을 훌쩍 넘어선다.
최근 고물가 기조 속에서 플랫폼 기업들이 일제히 가격을 올리자 김 씨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커피 몇잔 안 마시면 된다고 스스로 위안 삼았는데, 모든 플랫폼이 동시다발적으로 가격을 올리니 이제는 고정비가 부담으로 느껴진다. 그렇다고 퇴근 후 유일한 취미인 영상 시청과 음악 감상을 단칼에 끊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물가 상승과 구독 서비스의 가격 인상이 맞물린 이른바 ‘구독플레이션’(구독+인플레이션)이 한국 사회에서 본격화되는 모습이다. 플랫폼 기업들의 연이은 가격 인상으로 소비자들의 ‘구독 피로감’은 극에 달했지만, 이미 일상 깊숙이 자리 잡은 서비스를 완전히 해지하기는 쉽지 않다.
이에 따라 소비자들은 무조건적인 이탈 대신 비용을 최적화하는 ‘우회 생존법’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기업들 역시 이탈률을 낮추기 위해 다변화된 요금제 카드를 꺼내 들며 시장의 역학 관계가 급변하고 있다.
끊을 수 없다면 우회적인 방법으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구독 경제는 소비자에게 ‘합리적 소비’의 대명사로 통했다. 적은 비용으로 무제한에 가까운 콘텐츠와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가입자 유치 경쟁이 끝나고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플랫폼 기업들은 일제히 수익성 개선을 이유로 가격 인상 카드를 꺼내 들었다.
실제로 국내외 주요 OTT 플랫폼은 물론 ▲쇼핑 멤버십 ▲음원 ▲AI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가격 인상이 단행됐다. 불과 1~2년 사이에 서비스별로 최소 20%에서 많게는 50%까지 가격이 급등했다. 소비자들 사이에서 ‘물가도 오르는데 디지털 세상에서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이 너무 많다’는 탄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소비자가 특정 서비스에 고착되는 ‘락인 효과’(Lock-in effect)를 노린 플랫폼 기업들의 전형적인 가격 정책이라고 분석한다. 한 번 구축된 디지털 소비 습관은 쉽게 바꾸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 가격 저항선을 시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소비자들이 느끼는 경제적 임계점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의 소비자들이 가격 인상에 직면했을 때 ‘해지’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주로 했다면, 지금의 소비자들은 훨씬 영리하고 능동적이다. 서비스를 유지하면서도 지출을 최소화하는 다변화된 생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OTT 구독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광고형 요금제(AVOD)의 약진이다. 콘텐츠 시작 전후나 중간에 광고를 보는 대신 기존 요금의 절반 수준으로 서비스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돈을 내고도 광고를 봐야 하느냐’는 거부감이 컸지만, 주머니 사정이 가벼워진 소비자들은 빠르게 실리를 택했다. 고화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월 지출을 매장 커피 한 잔 값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 실속파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플랫폼들이 동거 가족이 아닌 제3자와의 계정 공유를 제한하기 시작하자, 소비자들은 또 다른 우회로를 찾았다. OTT 공유 전문 플랫폼을 이용해 1인당 분담금을 낮추거나, 가상사설망(VPN)을 이용해 물가가 저렴한 다른 국가의 계정으로 우회 결제하는 이른바 ‘디지털 망명’이 여전히 성행 중이다. 통신사 제휴할인이나 신용카드 캐시백 혜택을 꼼꼼히 비교해 최적의 조합을 찾는 ‘구독 재테크’ 커뮤니티도 활성화되고 있다.
특정 인기 콘텐츠가 공개될 때만 반짝 가입했다가 한 달 만에 해지하는 ‘구독 메뚜기족’도 급증했다. 예컨대 화제의 드라마 시리즈가 방영되는 달에만 결제해 모든 에피소드를 몰아본 뒤 곧바로 해지하는 방식이다. 플랫폼이 제공하는 ‘일시정지’ 기능을 적극 활용해, 바쁜 시험 기간이나 출장 기간에는 구독을 잠시 멈춰 불필요한 고정비 지출을 막는 이들도 늘었다.
잡은 고기 놓칠라…기업들의 다변화된 락인 전략
소비자들의 이 같은 방어적 우회 전략은 기업들에게 위기이자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무조건적인 가격 인상이 대규모 고객 이탈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직시한 플랫폼 기업들은 고객을 묶어두기 위한 유연하고 촘촘한 가격 가이드라인을 새롭게 설계하고 있다.
우선 요금제를 점차 세분화하고 있다. 아울러 ▲통신 ▲쇼핑 ▲금융 등 타 산업군과의 묶음 혜택 제공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여기에 경쟁사끼리 손을 잡는 모습도 등장했다. 지난해 11월 ▲디즈니플러스 ▲티빙 ▲웨이브 플랫폼을 한 번에 이용할 수 있는 결합 요금제가 출시된 것이 대표적이다. 3개 플랫폼의 스탠다드 상품을 묶은 요금제는 월 2만1500원으로, 각 서비스를 개별로 구독할 때보다 최대 37% 저렴하다.
넷플릭스는 네이버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네이버플러스 멤버십 가입자는 월 4900원에 추가금 없이 ‘넷플릭스 광고형 스탠다드’ 요금제를 이용할 수 있다. 이는 넷플릭스 광고 요금제의 개별 구독료인 7000원보다 저렴하며, 네이버 쇼핑 최대 5% 적립을 비롯한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아울러 웨이브는 음악 플랫폼 멜론(Melon)과 손잡고 음악과 영상을 모두 제공하는 ‘멜론X웨이브 플레이 패스’를 출시하기도 했다. 이는 웨이브 ‘광고형 스탠다드(월 5500원)’와 멜론의 ‘모바일 스트리밍클럽(월 7590원)’이 결합된 상품이다. 개별 이용 시 합산 금액인 1만3090원보다 약 31% 저렴한 9000원에 두 서비스를 모두 즐길 수 있다.
플랫폼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단일 프리미엄 요금제를 고수해 가입자당 평균 매출(ARPU)을 올리는 것이 핵심이었지만, 지금은 시장이 완전히 변했다”며 “소비자가 아예 플랫폼을 이탈하는 것보다 광고를 보거나 하위 요금제를 쓰더라도 서비스 생태계 내에 머물게 하는 것이 장기적인 생존에 훨씬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가입자 기반이 유지돼야 광고 단가가 올라가고, 이를 바탕으로 추가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구상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현재 소비자들은 극심한 불황기 속에서 지출을 통제하려는 성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며 “특히 구독 서비스는 고정 지출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가계부를 정리할 때 가장 먼저 보게 되는 항목이다. 앞으로는 소비자에게 세분화된 선택권을 부여하고 심리적 저항선을 넘지 않는 유연한 요금제를 설계하는 기업만이 장기적으로 시장에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구독플레이션 시대의 최종 승자는 소비자의 지갑 사정을 면밀히 살피면서도, 그들이 플랫폼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촘촘한 ‘그물망 요금제’를 완성하는 기업이 될 전망이다. 끊기는 아깝고 매달 내기는 부담스러운 구독 서비스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의 지출 방어와 기업의 수익성 확보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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