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한국에 ‘량원펑’이 없는 이유…패스트 팔로워의 함정
- [EDITOR's LETTER]
의대로·해외로 빠지는 인재…판을 바꿔야 AI 3강 가능해
천재보다 필요한 건 개척자를 키우는 자본·보상·인프라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가전, 디스플레이 등에서 글로벌 강자로 올라선 한국 기업 상당수가 이 전략으로 시작해 시장 지배력을 키웠다.
그러나 인공지능(AI) 산업은 이 같은 성공 공식이 통하기 어렵다.
AI 산업의 경쟁력은 ‘얼마나 빨리 따라가느냐’가 아니라 ‘누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남이 만든 모델과 아키텍처를 따라가는 동안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시장의 기준 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중국 딥시크를 창업한 량원펑이 대표적이다. 그는 미국의 첨단 반도체 수출 규제라는 악조건에서도 연산 효율과 알고리즘 혁신으로 한계를 돌파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오픈AI를 더 빨리 따라간 것이 아니라 제한된 자원 속에서 기존과 다른 길을 만들어낸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칭화대 같은 연구기관에서 길러진 인재가 창업으로 이어지고, 민간과 정부 자본이 장기 자금을 공급한다. 국가와 지방정부는 연산 인프라까지 지원한다. 화웨이의 ‘천재 소년 프로젝트’처럼 민간에서도 최고 인재에게 파격적인 보상과 연구 환경을 제공한다.
한국의 천재들은 두 번 빠져나간다. 한 번은 의대로, 또 한 번은 해외로다. 자연계 최상위권 학생들의 의대 쏠림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어렵게 이공계에 남아 석·박사까지 마친 인재도 결국 실리콘밸리로 향한다.
한국에 AI 개척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임정환 모티프테크놀로지스 대표는 외산 아키텍처에 기대지 않고 파운데이션 모델의 핵심 연산 구조부터 직접 설계한다. 김장우 망고부스트 대표도 “부품 상인이 되려는 게 아니다”라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통합 설계하는 AI 데이터센터 풀스택에 도전하고 있다.
플리토의 이정수 대표는 글로벌 빅테크가 먼저 찾는 언어 데이터를 만들어 매출의 90% 이상을 해외에서 올린다. 업스테이지는 자체 대형언어모델(LLM) ‘솔라’에 머물지 않고 다음과 AI 에이전트 기업을 품으며 모델에서 플랫폼으로 승부처를 넓혔다.
문제는 이런 개척자들이 언제까지 열악한 여건을 개인의 집념으로 메워야 하느냐다.
한국은 오랫동안 부족한 자본과 인프라를 개인의 헌신으로 메우면서 그것을 경쟁력이라 착각해왔다. 밤을 새우고, 적은 보상을 감수하고, 부족한 장비를 견디는 것을 ‘열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AI 패권 경쟁은 개인의 희생과 열정만으론 이겨낼 수 없다.
필요한 것은 천재 한 명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다. 최고의 인재가 의대 대신 공대를 선택할 이유를 만들고, 해외로 떠나지 않을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 창업한 연구자가 5년, 10년을 내다보며 실패를 감수할 수 있는 자본과 연산 인프라도 공급해야 한다.
무엇보다 성공의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 남들이 검증한 기술을 안전하게 따라가는 사람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먼저 열려는 사람에게 더 큰, 그리고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
한국에도 이미 자기 길을 만들려는 개척자들은 있다. 이들이 몇몇 예외적인 천재로 남을지, 다음 세대가 따라가는 이정표가 될지는 결국 우리가 어떤 판을 만드느냐에 달렸다.
패스트 팔로워로 산업 강국이 된 한국이 AI 3강으로 가려면 이제 남이 만든 길을 빨리 달리는 나라에서, 남들이 따라올 길을 먼저 만드는 나라로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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