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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 - 유럽 슈퍼 부자들의 현금 밀수

MONEY - 유럽 슈퍼 부자들의 현금 밀수

500유로권은 유럽 세관원들 사이에서 ‘빈 라덴’으로 불린다. 테러리스트들이 선호하는 통화이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기차역 플랫폼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서류가방을 품에 안은 그의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파리 가르 뒤 노르(북역)에서 프랑스 사복 세관원들이 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금융 격차로 신음하는 유럽 대륙에 최근 새로운 범죄 물결이 몰아치고 있다. 남자는 바로 그 현금 밀수의 유력한 용의자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보리스 보일론의 서류가방을 뒤졌더니 35만 유로에 달하는 밀수 현금이 나타났다. 주로 500유로 지폐였다. 유럽 전역의 세관원 사이에서 ‘빈 라덴’으로 불리는 지폐다. 테러리스트들이 선호하는 통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돈을 국가·대륙, 그리고 시간대 너머로 운반하는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뿐이 아니다.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산계급 그리고 저축한 돈이 국세청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부유층 엘리트도 있다.

보일론은 이라크 및 튀니지 주재 대사였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 보유자다. 현재 유럽 전역에서 사법당국의 표적이 되고 있는 ‘현금 운반자’는 그뿐이 아니다. 프랑스·독일·네덜란드·스페인·이탈리아·벨기에·스위스 경찰이 탐지견 훈련에 열을 올리고 있다. 마약퇴치 목적이 아니라 은행권에 사용되는 유형의 잉크와 화학물질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이 같은 기이한 불법적 자금이동 물결은 스위스·룩셈부르크·리히텐슈타인·모나코 은행들의 결정이 촉매가 됐다. 외국인 보유계좌에 적용되는 유서 깊은 비밀주의 원칙을 허물기로 한 결정이다.

이들 국가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압력에 따라 고객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다. 거주 국가의 세무당국에 은행계좌를 신고하지 않을 경우 대신 신고하겠다는 엄포다. 그렇게 하거나 또는 그들이 보유한 금액에 상당하는 수표를 발급한 뒤 그들의 계좌를 폐쇄하는 식이다. 수표는 개인이 다른 계좌를 개설하는 데는 아무 쓸모가 없다. 따라서 애당초 그들이 돈을 숨기고자 했던 금융 당국에 알리는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다른 일로는 탈법을 꿈도 꾸지 않을 사람들이 이제 이판사판의 도박을 하고 있다.

당국 입장에선 더없이 판돈이 큰 도박이다. 프랑스에서만 2012년 하루 평균 31만8000유로의 미신고자금이 압수됐다. 운반자들은 과자 봉지, 여행가방 안감 속, 치약 튜브 속에 돈을 감춘다. 그리고 절박해진 부모가 자녀 호주머니 속에 돈을 숨겨 순진한 아이들을 현금 운반 ‘노새’로 이용하는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프랑스 세관 당국자들의 증언이다.

유럽 전역에 걸쳐 EU·스위스·리히텐슈타인·모나코 당국에 압수되는 자금은 하루 100만 유로 안팎이다(인터폴 통계). 유럽에선 국경 넘어 반출할 수 있는 자금의 법적 상한이 1만 유로 또는 그에 상당하는 기타 통화다. 그 한도를 넘길 경우 자금의 용도와 출처를 밝히는 신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세금을 피하려면 불법 계좌가 개설된 나라로 가서 현찰로 돈을 인출하는 방법밖에 없다.” 2013년 프랑스에서 공동 저술한 ‘현금 은닉처(Cash Cache)’에서 이 같은 현상을 다룬 마티유 드라우스가 말했다. “은행들이 외국 고객들의 계좌를 폐쇄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돈을 신고해 고율의 세금을 물거나 아니면 숨기는 방법이다.”

2013년 여름, 스위스 바젤의 기차역에서 4인 가족이 60만 유로를 분배하고 있었다. 독일로 돌아가는 기차에 탑승하기 전이었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를 잡아탈 계획이었다. 부모가 자녀들의 호주머니 속에 현금을 채워 넣는 모습이 목격됐다고 스위스 당국이 전했다. 그뒤 가족 모두 체포되고 돈은 압수당했다.

지난 2월 쮜리히-파리 특급열차에선 180만 유로를 붕대로 다리에 감은 밀수꾼이 수사관들에게 잡혔다. 2011년 9월엔 쮜리히-뮌헨 특급 열차 안에서 코넬리우스 굴리트라는 한 노인이 세관원들의 검문에 걸렸다. 그가 갖고 있던 9000유로의 용도와 출처에 관한 조사였다. 당국은 그 의혹을 물고 늘어져 다음해 10억 파운드 상당으로 추정되는 나치 시대 미술품을 그의 아파트에서 찾아냈다.

2013년 초 7500만 파운드 상당의 무기명 채권을 휴대하고 차를 몰아 프랑스로 넘어가려던 남자가 스위스 요원들에게 저지 당했다. 무기명 채권은 소유자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거의 현금과 같은 기능을 한다.

독일 당국은 룩셈부르크와 스위스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뒷길에 특별수사반을 배치했다. 용의차량을 메뚜기떼처럼 덮쳐 독일로부터 밀반출입되는 엄청난 양의 현금을 적발했다. 운반자들은 타이어의 안쪽 튜브, 와셔액 저장 탱크, 심지어 에어필터 속에까지 돈을 숨겼다. 2013년 독일 국경경찰의 불법자금 압류 건수가 2666건에 달했다.

밀수꾼이 빈 수프 캔에 돈을 숨긴 일도 있었다. 수프가 들어 있을 때와 똑같은 무게로 돈과 모래를 채워 넣었다. 독일인들은 패닉 비슷한 상태에 빠져 있다. 외국 은행 밀고자들에게 돈을 주면서 자국민의 비밀계좌 데이터를 넘겨받는 방식이 독일 세무당국의 관행처럼 됐기 때문이다.

“어떤 날에는 우리가 검문하는 차 석 대 당 한 대 꼴로 현금이 숨겨져 있다. 종종 수십만 유로 대에 달한다.” 독일 남부 울름 세관의 하겐 콜만이 말했다. 울름 세관은 오스트리아·스위스 국경의 단속 업무를 담당한다.

“최소한의 짐을 든 사업가, 안절부절못하는 가족, 금융수도로 향하는 사람들…. 우리가 단속에 나설 때 주목하는 특징 중 일부다.” 프랑스 세관원 연대 노조의 필립 보크 사무총장이 말했다. “2013년 7월의 보일론 사건은 예외가 아니었다. 35만 유로 이상을 적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유로 위기 때문에 달마다 액수가 늘어난다.”

2013년 10월 스위스가 EU와 체결한 조약은 은행계좌 개설자들에게 보유 금액을 신고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밀반출은 오래 전부터 시작됐지만 스위스 조약 체결 직전 2년 사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압수 당하는 돈의 규모가 엄청나지만 대륙 전체적으로 밀반출입되는 금액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압수액은 비밀 은행계좌에서 일반 가정의 매트리스 밑과 은닉처로 운반되는 규모의 5%에 불과하다고 세관과 경찰 당국은 추산한다.

FC 바르셀로나의 스타 리오넬 메시와 FC 바이에른 뮌헨의 울리 회네스 전 회장은 금지된 은행계좌가 적발된 대표적인 슈퍼 부자 유명인사들이다.

하지만 엄중한 처벌과 전과자 낙인을 내세운 숱한 경고에도 현금 운반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세관원들과의 승자독식 도박 게임에서 계속 주사위를 굴리기로 작심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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