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주요국 중앙은행의 딜레마 - 돈 계속 풀어도 물가는 오르지 않고… -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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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주요국 중앙은행의 딜레마 - 돈 계속 풀어도 물가는 오르지 않고…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의 딜레마 - 돈 계속 풀어도 물가는 오르지 않고…

할로윈데이였던 10월 31일, 일본은행이 양적 완화 규모를 더 늘리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든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회견에서 “대중들의 디플레이션 기대심리를 근절하는 작업이 위험에 처했다”며 “그래서 우리는 디플레이션을 종식시키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은행을 포함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모든 정책행위는 ‘일본화(日本化)’를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일본화란 바로 부채 디플레이션이다. 물가상승률이 낮아지거나, 물가가 아예 하락하면 부채 원금의 실질 상환 부담은 증가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출을 꺼리고 소비를 줄인다. 경기와 물가가 더 낮아지고 빚을 못 갚는 사람이 늘어난다. 이로 인해 경제가 침체되고 물가가 하락하는 악성 순환고리가 형성된다.이게 부채 디플레이션이다.

이 파국을 촉발하는 방아쇠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의 저하’다. 바로 디플레이션 심리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일정한 수준(예 2%)으로 안정돼 있는 동안에는 저물가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별 문제가 없다.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져들지 않은 것도 ‘잘 고정되어 안정적인(well anchored and stable)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덕분이었다.

그러나 만약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흔들리고 디플레이션 기대가 형성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심리는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물가는 실제로 떨어지게 된다. 저물가는 그 자체로 중앙은행에 위협이 되기보다는, 장기간 지속될 경우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저하시키기 때문에 디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야기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일본은행이 다시 칼을 꺼내 든 것도 구로다 총재가 지적했듯이, 살아나려는 듯하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다시 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저하 막으려는 몸부림
예를 들어 우리가 5억 원짜리 아파트를 사기 위해 3억 원의 빚을 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 3억 원의 빚은 10년의 거치기간을 부여 받았으며, 연 4%의 고정 이자율이 적용된다. 이 빚을 내는 당시 채무자는 물가가 장기적으로 한국은행이 약속한 목표(3%)를 유지할 것으로 믿고 있다. 연 4%의 고정 이자율은 이러한 장기 물가전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목표보다 낮은 저물가가 장기간 이어진다면 문제가 생긴다. 물가가 연평균 3%씩 오를 경우 10년 뒤 부채 3억 원의 ‘실질 가치’는 2억2000만 원이 된다. 하지만 물가가 1.5%로만 계속 상승한다면 10년 뒤 부채의 실질 가치는 2억6000만 원이 된다. 빚을 낼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 원금 부담이 4000만 원가량 더 커진다.

이 정도라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물가가 장기간 계속해서 한국은행의 약속에 못 미치게 되면 경제 주체들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에 변화가 발생한다. 경제활동이 본격적으로 위축되고, 이것이 다시 물가하락을 부추긴다. 그래서 만약 10년간 물가상승률이 연 평균 -0.5% 수준으로 저하(약한 디플레이션)된다면 어떻게 될까? 10년 뒤 원금 3억 원이란 부채의 실질 가치는 3억2000만 원이 된다. 채무자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부담이 9000만원이나 증가한다. 만약 이 채무자가 갚을 수 있는 최대의 한도까지 빚을 낸 것이라면, 이 부채는 상환이 불가능해진다.

부채 디플레이션의 방아쇠를 당기는 ‘기대 인플레이션의 저하’는 중앙은행의 물가안정 의지와 능력에 대한 불신을 의미한다. 그래서 중앙은행들은 기대 인플레이션이 흔들릴 조짐을 보일 때마다, 중앙은행의 물가안정 의지와 능력이 의심받을 때마다 뭔가를 보여주려고 애쓰게 된다. 과거의 일본(잃어버린 20여 년)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지금은 부채가 턱밑에까지 차 있다. 어지간한 자극이 아니라면 부채를 더 늘려서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만한 화학적 동기와 물리적 여력이 없다. 오히려 빚이 너무나 많아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실질 상환 부담 공포’가 자극될 정도다. 지금 물가는 ‘하방’ 순환고리 형성에 취약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좋은 디플레이션(benign deflation)’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좋은 디플레이션이란 수요 부진이 아닌 공급 충격에 의해서 물가가 떨어지고 실질 구매력이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생산성 혁명이 일어나거나 새로운 에너지원을 발견했을 때 발생한다. 그러나 좋은 디플레이션이라 하더라도 강도가 지나치면, 요즘 같은 때에는 악성(malicious)으로 변질될 수 있다. 잔뜩 짊어지고 있는 부채의 실질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가 행한 2차 양적 완화(QE2)는 경기와 고용보다는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었다. 연준은 달러화를 절하해 원유와 같은 원자재 가격을 인상시키는 방법을 동원했다. 설사 그것이 경제 주체들의 실질 구매력을 일시적으로 저해하는 것이더라도 당시 다시 형성되고 있던 디플레이션 심리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연준은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부채 부담을 안고 있다. 이 막대한 부채 부담을 털어내는 과정은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누군가에는 반드시 엄청난 고통이 된다. 인플레이션으로 빚을 해소한다면 채권자(저축자)가, 실질 소득의 증가를 통해 해소하려면 채무자가 고통을 짊어져야 한다. 그리고 부채 감축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세계 경제의 빚은 지금도 계속 늘고 있다.

관건은 중앙은행들이 돈을 더 찍어낸다고 해서 과연 인플레이션을 살려낼 수 있느냐는 점이다. 지금 중앙은행들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여기에 있다.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지금 금융시장에서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이 고개를 들고 있다. 화폐 증발은 과거(old normal)에는 그 효과가 즉각적 이었다. 그러나 부채가 목에까지 차 있는 지금(new normal)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인플레이션은 공급 능력을 초과하는 새로운 수요가 등장하는 때에만 발생할 수 있다. 모든 경제 주체들의 빚이 한계치로 불어나 있는 현 상황에서 그나마 무리를 해서라도 지출을 늘릴 수 있는 곳은 정부뿐이다. 재정지출을 늘리지 않는다면 중앙은행들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사수 노력은 불발에 그칠 수 있다.
 주요국 정부의 합의와 공조 절실
문제는 먼저 움직이는 정부가 손해를 본다는데 있다. 지금은 모두가 경쟁적으로 돈을 풀어 자국의 화폐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환율전쟁의 상황이다. 혼자서 재정지출을 확대하는 부양에 나서면 그 과실은 전 세계로 흩어져 버린다. 수입이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9~2010년 사이 중국의 대대적인 경기 부양책이 대표적인 사례다. 따라서 이 문제는 주요국 정부들의 합의와 공조를 통해서만 풀 수 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세상은 더 위험해진다. 돈은 갈수록 더 많이 풀려 나오고 있으며, 중앙은행들에 대한 신뢰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주요국들이 공동 부양에 합의하려면 상황이 좀 더 심각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적 명분을 얻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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