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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박보미의 ‘도시미술 산책’ ④ 신상호 ‘지적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Desire of Intellectual Beauty)’ - 색과 면이 연출한 균형과 조화

Art | 박보미의 ‘도시미술 산책’ ④ 신상호 ‘지적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Desire of Intellectual Beauty)’ - 색과 면이 연출한 균형과 조화

신상호 작가 : 1947년생.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 도예과를 졸업했다. 40여년 간 흙이 가진 가능성을 탐구하고 현대 도예 예술의 깊이를 더하며 혁신을 이루었다는 평을 받는다. 도자기판에 그림을 그려 가마에서 구운 1979 공간대전 도예상 및 1988 국무총리 표창 등을 받은 바 있으며 2014년까지 홍익대 미대 학장을 역임했다. 런던 대영박물관, 빅토리아 알버 트 박물관, 파리 세브르 국립도자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있다.
깊은 가을입니다. 붉게, 노랗게 물들었던 잎새가 어느새 훌훌 떨어집니다. 이런 색깔은 어디서 왔을까요. 어린애처럼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구경합니다. 초여름에 햇빛이 통과하는 이파리의 투명한 초록빛깔이나,비에 젖어 바닥에 떨어진 낙엽 색깔 같은 것은, 아무리 좋은 물감을 잘 섞어도 똑같이 재현할 수 없습니다. 카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 렌즈로도 절대로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이는 재현할 수는 없단 걸, 시도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게 됩니다.

‘지적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Desire of Intellectual Beauty)’: 금호아시아나 빌딩에 설치, 1080장, 각50×50cm, 2008, 신상호
자연에서 온 색이 이렇게 마법처럼 불가사의하단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가끔 무척 아름다운 장면을 마주할 때면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슬퍼지곤 합니다. 보석 같이 고운 잎사귀를 볼 때도 그렇습니다. 이 빛깔을 간직하고 싶어서 책갈피에 꽂아둔다거나 집에 가져가면 순식간에 원래 빛깔과 느낌을 잃어버립니다. 딱 그곳, 그 시간, 그 순간이어야만 빛나고 살아있는 것들이 그렇지요.

‘아름다움’이란 좋은 건데 왜 마음이 슬플까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바로 이 순간이 절정이로구나, 지금이 지나면 똑같은 것을, 같은 마음으로 마주할 수 없겠지’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가장 빛나는 순간을 목격하는 순간, 영원한 가치와 덧없음의 현실이 동시에 격렬히 부딪쳐 마음이 아픈 것일지 모릅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천진무구한 배냇짓, 연인이 처음으로 서로가 누구보다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오늘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가을의 한 순간…. 사람마다 상황마다 그 순간들은 다양하겠죠. 어릴 땐 몰랐지만 조금씩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에 그냥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어릴 땐 아기가 왜 예쁜지 모르고 나무가 왜 아름다운지 몰랐지만, 이젠 길가 잡초 꽃망울 하나에도 마음이 어릿해집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아니면 철이 좀 든 걸까요.

우리는 ‘영원’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동시에 제한된 시간 위에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중요한 기억과 의미를 어떻게든 잡아두고 싶어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서투르나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글을 끄적이고, 작품을 만들어 내나 봅니다. 어쩌면 절정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스러지는 시간 위에 있기에 오히려 완벽한지도 모릅니다.

아기자기한 정동길, 캐나다 대사관 옆으로 난 나지막한 오르막길은 이국적인 정동공원과 맞닿아 있습니다. 대사관들과 고급 주택들 틈에 난 샛길을 지나서, 바람이 불 때마다 수 백 가지 미묘한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은행나무들을 따라가다 보면 새문안로2길을 만납니다. 이곳에서 금호아시아나 후문 벽면에 설치 된 작가 신상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을 산책을 기념이라도 해주는 것 같아 반갑습니다.

발길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봅니다. 수많은 색깔이 있지만 어느 하나 보기 싫게 튀지 않고 거슬림이 없습니다. 수직으로 교차하는 색 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네요. 도서관의 선반들 같기도 하고, 유리로 만들어진 빌딩들 풍경 같기도 합니다. 색과 색 사이로 공기가 흐르는 것처럼 공간감이 느껴집니다. 모든 색이 마음 편한 교향곡처럼, 눈으로 마시는 칵테일처럼 즐거운 느낌을 주네요. 이 정도의 균형과 조화를 만들어 내자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의 실험과 경험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작품이 무척 모던하고 세련미가 있어 젊은 외국 작가로 추측하기 쉽지만, 그는 1940년생의 노장 도예가이자 조각·건축 분야를 넘나드는 아티스트 신상호 작가입니다. 전통을 강조하는 환경과 시대를 거쳐 오면서도 그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롭고, 그래서 형식과 틀에도 얽매이지 않지만은근한 한국의 멋이 묻어나옵니다. 끊임없는 실험과 파격에 대한 용기, 완성도를 향한 오랜 집착이 작품에 스며 나옵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한국인이기 전에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아티스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사실 우리나라 미술계는 아무래도 좁기 때문에, 어지간하지 않으면 내부의 시선이나 판단에서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작가의 커리어가 전통 형식에 대한 압박이 특히 강한 도예 분야에서 시작된 것을 감안하면 특히 노장 아티스트에게서 파격과 자유로움을 찾기는 더욱 어렵죠. 그것들이 예술의 본질이어야 함에도 말입니다. 그래서 신상호 작가의 지난 시간이 더 신선하고, 값지게 여겨집니다.

물감의 원료인 색 안료는 표면에 부착시키는 물이나 오일이 마르면 생생함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종이나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시간이 흐르면 원래의 빛을 상당 부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흙 반죽에 그림을 그린 후 유약을 발라서 구우면 영속성이 생깁니다. 서로 섞인 안료가 가마 속 열기와 만나 생기는 우연성도 중요합니다. 이런 방식은 빛과 물기를 품어 자연에 가까운 투명함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당연히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쓱쓱 그린 그림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 기술이 필요합니다. 집착에 가까운 인내가 없으면 불가능하겠지요.
 스러지는 시간 때문에 더 완벽한 절정의 순간
깊은 가을, 지나가는 시간과 아쉬움, 그리고 그것을 붙잡고 싶은 인간의 간절함과 열정을 생각합니다. 예술가와 혼이 담긴 작품. 그 덧없긴 하나 뜨거운 집념이 모닥불 같은 열기로 냉혹하고 메마른 풍경 속에 있는 우리를 위로합니다. 수많은 차가 끝없이 행렬을 이루는 광화문 네거리. 대로는 번잡하지만 빌딩의 한 겹만 물러서도 금세 걷기 좋은 길이 펼쳐집니다. 소음이나 사람들은 한결 덜하고 나무나 바람소리는 더해지니까요. 온갖 색을 머금고 오래오래 변치 않을 이 작품이 있는 한, 곧 알록달록한 낙엽이 자취를 감추는 겨울이 되더라도 덜 서운할 것 같습니다. 한겨울 마음을 부풀게 하는 색들의 운율이 그리워질 때면, 전 또 이 골목을 서성이게 될 것 같네요.

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곳 :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115번지 금호아시아나 본관

서울 종로구 신문로 금호아시아나 본관은 ‘뒷면이 더 아름다운 건물’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본관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건물 외관에 높이 91.9m 규모의 대형 미디어 파사드인 ‘LED 갤러리’를 운영 중이다. 신상호 작가의 작품 ‘구운 그림’은 디지털 캔버스의 하단에 위치한다. 구운 그림은 1300도 이상 고열에서 구워 철보다 단단한 50×50cm 크기의 타일 1080매로 구성된다. 전통 목조 건축 방식을 차용해 화학적 접착제를 쓰지 않고 격자형 틀을 일일이 덧대 타일을 끼워 맞췄다.



박보미

문화예술 기업 ‘봄봄(vomvom)’ 디렉터.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국제디자인대학교대학원 (IDAS)에서 미디어디자인을 공부했다. 영화미술, 전시기획, 큐레이팅, 미술칼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bomi10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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