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부조리극 -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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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부조리극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부조리극

지난 여름 북한 함경북도의 한 마을 주민들. 남쪽이 어느 모로 보나 훨씬 더 잘 산다는 사실을 지금은 많은 북한 주민들이 잘 안다.

지난 여름 북한 함경북도의 한 마을 주민들. 남쪽이 어느 모로 보나 훨씬 더 잘 산다는 사실을 지금은 많은 북한 주민들이 잘 안다.

남한의 1번 국도는 세계에서도 부유하고 선진 기술을 갖춘 수도로 손꼽히는 서울을 뒤로 하고 거대한 언덕을 굽이쳐 오른다. 그리고 북쪽으로 50㎞를 달려 60년 전 과거 속으로 달려간다. 남북한의 접경에 가까워지면 판문점으로 향하는 다차선 간선도로를 따라 아직도 철조망과 초소들이 늘어서 있다. 마치 한국전쟁이 방금 끝난 듯한 인상이다.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 그 3년간의 치열했던 전쟁은 얼마나 긴장감이 팽팽하게 남았든 1953년 평화롭게 종결됐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휴전이다. 공식적으로 전쟁은 막간 휴지기를 맞았을 뿐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철저히 자본주의를 좇는 남한과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광적으로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공산국가 북한을 이른바 비무장지대(DMZ)가 갈라놓는다. DMZ를 따라 남북 양쪽으로 각각 2㎞ 너비인 무인지대를 사이에 두고 전투태세를 갖춘 수만 명의 병력이 대치한다. 그리고 몇 시간 내에 서로를 박살내기에 충분한 포대가 그 뒤를 받친다. 수십 년 동안 간헐적으로 총격전이 발생해 양측에서 다수의 장병이 목숨을 잃었다. 북한 정권은 지금도 첩보원과 공작원 그리고 요즘엔 무인기를 남한으로 내려 보내며 전쟁의 불씨를 계속 살려놓는다. 바다와 하늘에서도 수시로 충돌이 일어난다. DMZ 바로 아래 남쪽에선 계속 땅굴이 발견된다. 수많은 북한군 병력을 한 시간 만에 남쪽으로 급파할 수 있을 만큼 큰 규모다. “우리는 매일 적군과 얼굴을 마주대한다.” 11월 19일 DMZ에서 근육질에 구석구석 반짝반짝 광을 낸 남한 군인이 뉴스위크를 포함한 외국인 기자 방문단에게 말했다.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곳.”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언젠가 한반도를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20년 전 그가 그 말을 한 뒤로 필시 더 위험해진 듯하다. 지난 11월 북한의 소련식 수용소와 기타 인권탄압 행위를 유엔이 규탄 한 뒤 평양 정권은 4차 핵무기 실험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런 과장된 막가파식 벼랑끝 전술이 북한 정권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2013년 북한은 남한뿐 아니라 하와이, 괌, 워싱턴 DC를 향해 미사일을 휘두르며 엄포를 놓았다(아직 사거리가 그 정도에 이르지 못한다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수 년 간에 걸쳐 그런 위협에 맞닥뜨린 미국은 나름의 막판 시나리오를 선택했다. 리언 패네타가 2012년 국방장관이었을 때 남한 주둔 미군 사령관을 만났다. 그뒤 “그 지역에서 전쟁은 하나의 가정이나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며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실재적이고 임박한 문제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돌이켰다. 북한이 대규모로 침략할 경우 미국은 “필요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그는 썼다.

이 모두가 한반도를 일종의 화석화된 냉전 부조리극(theater of the absurd, 희극적 과장을 통해 삶의 불합리성을 보여주는 연극)으로 만든다. 전면전은 생각도 할수 없는 자살행위다. 그러면서도 양측은 ‘통일’을 이야기한다. 공산 북한은 자신들의 군사력으로 남한을 윽박질러 항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남한 정부는 북한의 경제 붕괴가 멀지 않았다며 그때 앞으로 나서 주도권을 넘겨받을 계획이라고 말한다.

북한은 남한을 가난에 허덕이는 곳으로 묘사하는 정치선전 공세를 오래 전에 포기했다. 1990년대 이후론 그런 메시지를 띄워도 북한 주민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쓴웃음을 짓기 십상이다. 남쪽이 어느 모로 보나 훨씬 더 잘 산다는 사실을 지금은 많은 북한 주민들이 잘 안다. 일정 부분 탈북자가 보내는 편지와 전화 덕분이다. 지난 20년간 2만7000명가량이 주로 중국을 통해 북한 탈출에 성공했다. 북한 주민이야말로 몹시 굶주려 툭하면 나무껍질과 뿌리로 연명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북한 경비병들은 그런 탈북자가 보내오는 우편물을 더는 차단하려 하지 않는다. 우편물 속에는 종종 약간의 현금도 들어 있다. 지금은 그중에서 한 몫 챙기는 걸로 만족한다.

‘탈북자’ 3명이 자신들의 탈출 결정에 남한의 부유한 경제사정은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고 최근 명확히 밝혔다(남한 정부는 평범한 난민이나 고위급 망명자나 모두 탈북자로 부른다). 더없이 혹독한 억압, 잔혹행위 그리고 툭하면 굶주림에 허덕이는 삶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나는 10년 동안 망명을 시도했다.” 이순실(47) 씨가 앞에 앉은 외국인 기자단을 향해 말했다. “중국에 도착할 때마다 발각돼 송환됐다. 마침내 다른 7명과 함께 중국을 거쳐 몽골 사막으로 넘어갔다고 그녀가 통역을 통해 말했다. “자기 오줌을 받아 마시며 버텼다.”

이 씨는 북한인민군에서 간호장교로 근무했지만 제대 후 알거지가 되어 먹을 것을 구걸하고 찾아 다녀야 했다고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남자들이 그녀를 성 노리개로 삼았다. 거리에서 생활하던 중 딸을 출산했다.

한번은 탈출에 실패하고 중국에서 송환됐을 때 두들겨 맞고 끓는 물로 고문을 당했다며 블라우스를 약간 벌려 흉터를 보여줬다. “모두 두 살배기 딸이 보는 앞에서 당한 일이었다. 울음을 터뜨리자 아이도 때렸다.” 아홉번째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했다. 중국인 안내자가 그녀의 딸을 “3달러 가량에 다른 사람에게 팔아 넘겼다. 지금은 아이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한국전쟁에 유엔군으로 참전한 미국과 덴마크, 스웨덴 등 참전용사와 그 가족 115명이 지난 7월 25일 방한해 경기도 파주 DMZ 내 판문점을 방문해 북한군 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전쟁에 유엔군으로 참전한 미국과 덴마크, 스웨덴 등 참전용사와 그 가족 115명이 지난 7월 25일 방한해 경기도 파주 DMZ 내 판문점을 방문해 북한군 사진을 찍고 있다.

이 씨 옆에 앉은 최유진(24) 씨는 다 죽어가는 참새처럼 연약해 보였다. 2008년 고등학교를 마친 뒤 도로건설 공사를 하는 중노동 조로 배치됐다고 했다. “2011년 망명을 시도했다.” 최 씨가 통역을 통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숙모가 같이 중국으로 건너가자고 제안했다.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보낼 수 있다고…. 하지만 그녀에게 배신당했다. 돈을 받고 나를 신부로 팔아 넘겼다. 아버지뻘인 50대 남자였다. 죽고 싶었다. 남자는 그뒤 부부관계를 청산하고 나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 넘겼다.”

한 중국인 남자에게서 또 다른 중국인에게로 열한 번이나 팔려갔다고 그녀가 말했다. 마침내 도망쳐 2013년 기독교 운동가들의 도움으로 중국을 벗어났다. “모든 걸 밝힐 수는 없다”고 그녀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마음속에 깊은 상처가 남아 있다.” 지금은 어떤 희망을 갖고 있나? “내 유일한 소망은 가족을 다시 만나 함께 밥 먹는 것”이라고 그녀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연사로 나선 세 번째 탈북자는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1995년 대홍수가 북한 전역을 휩쓸었을 때 수백만 명이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었다고 전했다. “아버지도 그중 한 명이었다”며 그녀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얼마 안 되는 음식은 군대로 들어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나무껍질과 뿌리로 연명해야 했다…. 주어진 한 줌의 음식도 군인들이 훔쳐갔다.” 2011년 이념적 ‘범법자’로 찍혀 노동수용소로 보내진 뒤 탈출을 결심하고 며칠 밤낮을 걸어 중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기독교 지하조직을 통해 태국으로 넘어간 뒤 한국 대사관을 찾아갔다.

남한에 적응하기는 “어려웠다”고 그녀가 말했다. “김정은에 목매다는 대단히 고립된 사회에서 살았었다.” 김정은은 1945년부터 북한을 통치한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의 손자다. 김일성은 소련이 북한 지도자 자리에 앉힌 1945년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을 통치했다. 그뒤 아들 김정일이 권좌를 물려받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삶은 딴판이었다.”

서울에는 고급 대형차, 4성 호텔, 고급 레스토랑이 도처에 널려 있으며, 패션을 앞서가는 젊은 남녀가 최첨단 기술을 휴대하고 다닌다. 황량하고 궁핍한 북쪽 출신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남한 정부는 그들에게 방 하나짜리 임대주택, 약간의 정착금, 직업훈련을 제공한다.

힘든 변화다. “남한에서 간호사로 일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결국 인기 TV 프로그램 고정출연자가 된 이 씨가 말했다. 북한의 인권기록에 초점을 맞춘 ‘이제 만나러 갑니다’라는 프로그램이다. “전혀 다른 종류의 언어를 배웠다.” 그녀가 통역자를 통해 말했다. “내 꿈을 좇는 대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가장 큰 난관은 언어였다.” 컴퓨터 강습을 받고 있는 최유진이 맞장구를 쳤다. 단지 그녀의 언어능력 부족만 문제가 아니었다. “남한 말에는 외국어 같은 느낌이 있다.” 그녀가 통역을 통해 말했다. “기본적으로 같은 언어이지만 뭔가 다르다. 분단이 계속되면 남북한 사람들이 통역 없이는 서로 대화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들 극소수 행운아들은 지옥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곧 자신들이 발을 딛고 선 곳도 천국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된다. 남한의 정신없이 돌아가는 경제는 이 땅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에게도 무자비한 희생을 강요한다. 남한의 10~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그들에게는 학교 시험에서의 낙제는 직업적·사회적 사망선고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2년 1만4000명 이상의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루 평균 39명 꼴이다. 40대에선 자살이 암에 이어 제2의 사망원인이다. 거의 또는 아무런 연금 없이 은퇴한 뒤 노후에 의지하려던 자식들에게서 버림받은 고령자들도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숫자가 전례 없이 많아졌다.

“도처에서 자살이 일어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I Have the Right to Destroy Myself)’의 소설가 김영하 씨가 지난 4월 뉴욕타임스에 썼다. 누구나 지인 중에 생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있는 듯하다고 그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말한다. 그들이 종종 뛰어드는 너비 800m의 도도히 흐르는 한강은 서울을 관통해 북쪽 DMZ로 향한 뒤 서해로 빠져나간다.

맨해튼, LA 나아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도쿄에서와 달리 자립성에 강한 자부심을 갖는 남한에선 정신과 치료가 대체로 터부시된다. “누군가 자살을 생각하면 살겠다는 의지가 부족하며 나약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고 김 씨는 썼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동정심이나 관심은 거의 없다.” 한국의 제2 도시인 부산맨해튼, LA 나아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도쿄에서와 달리 자립성에 강한 자부심을 갖는 남한에선 정신과 치료가 대체로 터부시된다. “누군가 자살을 생각하면 살겠다는 의지가 부족하며 나약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고 김 씨는 썼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동정심이나 관심은 거의 없다.” 한국의 제2 도시인 부산시 관계자들이 시민의 우울증을 보살피는 작은 조치들을 시행하고 있다고 그가 덧붙였다. 하지만 부산 인구는 300만 명에 불과한 반면 서울은 2200만 명에 달한다.

출산율이 낮아지고 있다는 더 나쁜 소식도 들려온다. “남한의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갈수록 미루거나 포기하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과 경제적 자원 부족 탓이다.” 코리아타임스가 11월 24일자에서 의회 예산처 통계를 인용해 보도했다. “그에 따라 낮은 출산율과 인구 고령화로 인해 경기가 침체될 수 있다.”

이 모든 요인이 북한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정부 당국자들의 희망에 재를 뿌릴지 모른다. 그리고 전적인 군사점령은 아니더라도 남한이 위협에 굴복하리라는 북한 강경파들의 환상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냉전은 계속된다. DMZ를 따라 남북한 병력이 서로 박격포 사거리 내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한다. 판문점 ‘평화의 집’ 건너편에서 무장한 초병들이 서로를 노려본다. 평화의 집은 공공경비구역 중앙의 간이건물 집합이다. 남북 양측은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만나 끝없는 때로는 허황된 요구를 주고받는다.

최근 가을 햇빛이 DMZ를 호박색으로 물들인 날의 오후였다. 휴전선 양쪽 북한과 남한 기념품점에서 방문객들에게 판매하는 티셔츠와 모자에 똑같은 구호가 새겨져 있었다. “한국은 하나다.”
 북한 외화벌이꾼들의 노예 생활
카타르 도하에 새로 건설된 할리파 스포츠 콤플렉스 외부의 도로를 청소하는 근로자.

카타르 도하에 새로 건설된 할리파 스포츠 콤플렉스 외부의 도로를 청소하는 근로자.


카타르 공사판에서 수천 명이 개인적으로 임금을 거의 받지 못하고 착취당해영국 신문 가디언의 탐사보도에 따르면 북한 근로자 수천 명이 카타르의 건설 공사장에서 사실상 노예로 일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임금을 거의 받지 못한다. 급여는 대부분 그들을 채용한 회사를 통해 북한으로 송금된다. 가디언지가 인용한 전직 북한군 장교(2005년 탈북했다)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보통 해외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벌어들이는 전체 임금의 70%를 가져가며, 근로자 자신은 숙식비를 제하고 나면 임금의 약 10%만 받는다. 가디언지가 카타르에서 만난 한 북한 근로자는 “우리는 조국을 위해 외화를 벌려고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북한의 강제노동 이야기는 새롭지 않다. 미 중앙정보국이 발행하는 CIA 월드 팩트북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외국 정부와 계약에 따라 해외에서 일하는 북한 근로자 다수는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탈출하거나 외부인에게 불만을 호소하려고 하면 정부의 보복을 당할 수 있다.”

북한은 핵프로그램과 인권 유린으로 다양한 국제 제재를 받고 있다. 그와 함께 근년 들어 가뭄과 기아에 시달리면서 외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외화를 벌어들일 방법이 거의 없다. 과거 북한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짝퉁 담배를 제조하거나 심지어 미화 달러를 위조하기도 했다.

한편 2022년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개최권을 딴 카타르는 건설 공사에 동원한 이주근로자 수십만 명을 착취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국제인권감시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의 보고서에 따르면 카타르의 이주근로자들은 인신매매와 강제노동에 시달린다. 카타르의 법에 반해 근로자들은 업주에게 여권을 압수당하며, 이주근로자가 고용주의 과도한 통제를 받는 ‘카팔라(kafala)’라는 전통적인 근로계약에 따라 카타르를 출국하려면 고용주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카타르의 인구는 약 200만 명이지만 카타르 국민은 그중 약 10%에 불과하다. 미 국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카타르 인력의 94%는 이주근로자다. 카타르는 2022년 월드컵 개최를 준비하면서 기반시설 건설에 약 1000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다. 지난 5월 카타르 정부는 지난 2년 동안 이주근로자 약 1000명이 사망했으며, 그중 다수는 심장마비가 원인이었다고 인정했다.

카타르 노동사회부의 대변인은 성명서를 통해 정부는 근로자 임금 문제를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며 카타르에 등록된 북한 근로자는 2800명으로 임금과 대우 측면에서 “불만 신고 건수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 MARK HANRAHAN
 “나는 억류되기 위해 북한에 갔다”


억류됐다가 풀려난 미국인 매튜 밀러의 횡설수설미국 캘리포니아주 출신인 매튜 토드 밀러(25)는 북한으로 정치망명을 시도하면서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는 평양 공항에서 관광비자를 찢으며 체포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밀러는 미국의 북한 문제 전문 웹사이트 NK뉴스(NKNews.org)와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체포되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고 밝혔다. “북한의 일반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해보기 위해서였다.” 밀러는 지난 9월 14일 북한에서 재판을 받고 “반공화국 적대행위”를 저지른 죄로 6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미국인으로서 북한의 법정에 서기가 아주 어려웠다고 말했다. “나는 … 억류되기 위해 북한에 갔다. 내가 북한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나를 체포하지 않고 그냥 내보내는 게 가장 큰 우려였다. 나는 북한에 머물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떠나기를 원했다. 첫 날 밤 그들은 ‘다음 비행기로 떠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거부했다. 무조건 떠나지 않고 버텼다.” NK뉴스에 따르면 밀러는 북한에 도착한 지 15일이 지날 때까지 당국에 의해 공식 구금되지 않았다.

밀러는 평양 공항에서 관광비자를 찢었을 뿐 아니라 공책에 여러 가지 황당한 주장을 적었다. 자신이 ‘해커’이며 미군의 중요한 기밀을 갖고 있으며,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에서 투옥되지 않으려고 망명을 원한다”고 그는 공책에 적었다. “남한에서 미군을 몰아내는 것이 내 목표다. 그래서 남한의 미군 기지에서 문서들을 입수하려 했다. 과거에 나는 위키리크스에 참여했다. 미군은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에 반대한다.”

밀러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공책에 쓴 글이 도를 넘었다고 인정했다. “여러 가지 과장을 늘어 놓았다. … 북한 당국은 그게 허위라는 걸 즉시 알고는 북한을 방문한 진짜 이유를 따져 물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밀러는 가까운 친구와 일정한 직업도 없었다. 북한에서 억류되기 전에 아시아에서 오래 지내는 동안 생계 수단도 없었다. 또 밀러는 루이스 캐럴이 쓴 고전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집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밀러는 재판에서 형을 선고 받은 뒤 국제 언론에 배포된 동영상에 등장해 북한에서 하는 교도소 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루 8시간 노동한다. 대부분은 땅을 파는 것 같은 농사다. 그외에는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이 완전히 격리돼 있다.”

밀러는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오바마 대통령 특사로 북한을 방문한 후 억류돼 있던 다른 미국인 케네스 배와 함께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클래퍼 국장은 억류된 두 사람의 행위를 사과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북한을 찾았다.

밀러는 나름대로 앨리스처럼 북한이라는 ‘거울 속’을 여행하는 데 들인 대가에 후회하는 듯하다. 그는 NK뉴스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상황을 잘 몰랐던 건 아니다. 위험과 초래될 결과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여행으로 나 외에는 아무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죄책감이 든다. 내 행동은 범죄였다. 북한인들과 미국인들의 많은 시간을 빼앗았다. 내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은 관리들 모두에게 미안하다.” ― MARK HANRA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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