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석의 ‘의예동률(醫藝同律)’] 조화·균형 이치 담은 휴대용 한약장 -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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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석의 ‘의예동률(醫藝同律)’] 조화·균형 이치 담은 휴대용 한약장

[윤영석의 ‘의예동률(醫藝同律)’] 조화·균형 이치 담은 휴대용 한약장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일입니다. 진료 중에 인사동의 고미술품 가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진료 중에는 사적인 전화를 받지 않는데 아주 시급한 일이라고 원장을 바꿔 달라고 청한 모양입니다. “아주 특이한 한약장이 들어왔는데 보시겠어요? 사겠다는 사람이 지금 있는데 먼저 여쭤보는 거예요. 관심 있으시면 지금 가져가 볼까요?”

당시에는 골동품 수집에 열을 올리는 때였으므로 가격이나 모양을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보겠다고 했습니다. 무거운 한약장을 가져와 보겠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의아했습니다. 10여 분 후 그 골동상이 가져온 한약장을 보니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한 손으로도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한약장이었던 겁니다.

 왕진·여행 때 편리한 휴대용 한약장
한약장은 비슷비슷해 보여도 의원에서 쓰던 것, 관청에서 쓰던 것, 가정에서 쓰던 것, 여행이나 왕진할 때 쓰던 것으로 나뉩니다. 의원에서 쓰던 것은 우선 서랍의 개수가 많아 100여 개 이상의 약재를 담을 수 있습니다. 기능성을 위주로 만든 것이라 실용적이고 장식이 간소하고 소박하게 생겼습니다. 관청이나 왕실에서 쓰던 것은 앞판에 무늬가 좋은 목재를 사용하고 장식을 많이 달아서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관청에서 쓰던 것은 흑칠(黑漆)이 되어있는 것이 많고 왕족이 쓰던 한약장은 주칠(朱漆)이 되어 있어 붉은색을 띱니다. 가정용은 장식이 별로 없이 수수하고 서랍도 50개 이내로 적습니다. 휴대용 한약장은 왕진을 가거나 먼 길을 떠날 때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좌우에 끈을 달 수 있는 고리가 있고 작고 가볍고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날 구입한 휴대용 한약장은 운반할 때 서랍이 쏟아지지 않도록 앞쪽에 가림판이 있고 좌, 우, 상부에 손잡이와 고리가 있어 말안장에 맬 수도 있게 만들었습니다.

한약장을 가만히 뜯어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롱형, 옷장처럼 생긴 의걸이형, 문갑형, 몸체를 반으로 가를 수 있는 갑게수리형, 뚜껑이 있는 박스 모양의 함형, 휴대용으로 쓸 수 있는 상자형이 있습니다. 한약장은 오동나무와 소나무로 많이 짭니다만, 유실수 목재로도 많이 만듭니다. 감나무·밤나무·대추나무·은행나무·배나무·호두나무로 만드는데, 향나무로는 약장을 만들지 않습니다. 향나무 냄새가 약재에 배면 혹시 약효가 떨어질까 해서입니다.

한약장의 값어치를 따질 때에는 이러한 모양뿐 아니라 글씨도 보게 됩니다. 공들여 만든 한약장의 앞판에 약재 이름을 적을 때에는 잘 쓴 글씨를 받아 약재 명을 음각으로 새기고 여기에 흰 가루분을 물에 개어 바릅니다. 그냥 글씨를 쓴 것은 덜 쳐주고 한지에 글씨를 써서 붙인 장은 가격도 훨씬 쌉니다. 사진 속의 휴대용 한약장도 흰 가루분으로 약재명을 적었는데, 200년의 세월 속에서 글씨가 좀 희미해지긴 했지만 친근한 필체로 적은 약명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일반 수집가와 달리 한의사가 한약장을 볼 때에는 약재 종류와 배열을 어떻게 했는지, 약재 명을 틀리게 적지는 않았는지를 눈여겨봅니다. 약재의 이름을 보면 주로 어떤 병을 치료했는지를, 배열을 보면 어느 약재를 많이 사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약재 명이 틀리게 적혀 있으면 수리를 많이 했거나 모조품인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작고 소박한 휴대용 한약장은 고미술품으로서 가치뿐만 아니라 한의학적인 가치도 지니고 있습니다. 약장 안에 8개의 약재만 가지고 다니지만 왕진 때나 여행 중에 어느 병증에도 한약으로 치료할 수 있게끔 군신좌사(君臣佐使)와 계절에 따른 약재를 골고루 배열시켜 놓았습니다. 한의사가 처방할 때에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군신좌사를 정하는 일입니다. 대통령이 내각을 구성할 때 누구에게 무슨 업무를 맡길지,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 때 어떤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만들지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군(君)이 대통령을 의미한다면 신(臣)은 장관을, 좌(佐)는 고위 관료를, 사(使)는 일반 공무원을 뜻합니다. 이들이 유기적으로 잘 돌아가야 나랏일이 잘 되겠지요.

한약 처방에서 군약은 병을 주로 치료하는 역할을 하고, 신약은 군약을 도와서 시너지 효과를 냅니다. 좌약은 다른 병증을 치료하고 혹시 나타날지 모르는 부작용을 방지합니다. 사약은 신약과 좌약을 보좌하고 약을 병소로 끌어가는 역할을 하며 처방을 조화롭게 하고 약맛도 좋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진의 휴대용 한약장에 쓰여 있는 인삼은 군약, 현삼·천궁·작약은 신약, 반하·계지·방풍은 좌약, 감초는 사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재를 두세 개만 조합해도 약효를 볼 수 있지만 이들 여덟 개 약재를 다 같이 써도 보약의 효과가 있습니다. 군약(君藥)인 인삼으로 기운(氣)을 보하면 천궁·작약이 피(血)를 보해주면서 인삼의 효과를 증폭시켜줍니다. 현삼은 이들 인삼의 더운기운을 좀 식혀주므로 부작용을 방지하는 신약(臣藥)의 역할을 합니다. 좌약(佐藥)인 반하·계지·방풍은 보약과 같이 외부의 풍(風)기를 방지하면서 이들 약이 전신으로 순환되게끔 하는 효과를 나타냅니다. 감초는 전형적인 사약(使藥)으로 처방을 조화롭게 하고 약맛도 좋게 해줍니다.

계절별로는 봄에는 방풍·천궁을 많이 쓰고 여름에는 현삼·작약을, 가을에는 인삼·감초를, 겨울에는 계피·박하를 주로 많이 씁니다. 이들 약재는 하나하나씩 따로 쓸 때보다 섞어 쓸 때가 더 좋은 효과를 냅니다. 병증에 한 가지 약재를 오래 쓰는 것보다는 함께 썼을 때가 장기간 복용 시에 생길지도 모르는 부작용을 방지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몸에 좋은 약도 하나만 장복하면 곤란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 모든 일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소통해야 합니다. 몸에 좋은 약재라고 해서 한 가지만 장기복용해서는 건강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한의학의 원리이자 처방의 근간입니다.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이 작은 한약장 약서랍 안에 세상사의 오묘한 이치가 담겨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윤영석 - 경희대 한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한의학 박사. 경희대 한의과대학 외래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7대째 가업을 계승해 춘원당한방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한의학 관련 유물 4500여점을 모아 춘원당한방박물관도 세웠다. 저서로는 [갑상선 질환, 이렇게 고친다] [축농증·비염이 골치라고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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