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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천혜 기후 갖춘 몽정산 중국의 첫 차 재배지

[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천혜 기후 갖춘 몽정산 중국의 첫 차 재배지

연중 300일 비오고 온화해 차의 성산 (聖山)으로 불려... 감로·황아 등 중국 10대 명차 생산지
해발 1400m에 있는 몽정산 차밭과 몽정산 고자원.
차(茶)는 약용식물로 출발했다. 역사와 전설이 혼재된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 불과 농업을 관장하는 염제(炎帝), 신농(神農)이 72가지 독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다 찻잎을 먹고 해독했다는 기록이 차의 첫 등장이다. 동이(東夷)족으로 알려진 신농은 불 사용법을 가르치고 농경사회를 일으킨 시조다. 산야를 돌아다니며 매일 100종류가 넘는 식물을 직접 먹어보고 독초를 가려내고 약성을 찾아내 백성을 위한 약을 만들던 신농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독초에 중독됐다. 몸에 지니고 다니던 여러 해독제를 써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바람결에 날아온 향긋한 나뭇잎을 먹은 신농은 배의 통증이 사라졌다. 나뭇잎은 신농의 위장을 검사하듯 돌아다니며 독초의 독성을 무력화시키고 신농의 생명을 구했다. 신농은 이 나뭇잎을 ‘검사하다’는 뜻으로 ‘사(査)’라고 칭했다.

차의 기원에 대한 이설(異說)은 고대 인도의 명의였던 기바설(嗜婆說)과 중국 선종(禪宗)의 창시자인 달마설(達摩說)을 비롯해 전국시대 최고의 명의 편작설(篇鵲說) 등 몇 가지 있지만 차의 약성이 인간에게 유효했다는 사실은 모두 일치한다. 차를 약용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었다. 채취한 찻잎을 잘 말려주면 됐다. 지금처럼 차를 뜨거운 물로 우려내서 마시지 않고 다른 한약재와 혼용해 죽처럼 끓여먹었다. 차를 수십 년씩 묵혀 단방약(單方藥)으로 귀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선진(先秦) 시기에는 쓰고 떫지만 몸에 좋은 찻잎을 고채(苦菜)라고 부르며 날것으로 먹었다. 약용으로 출발한 야생차는 식용을 거쳐 기호음료로 거듭나는 긴 세월 속에서 야생종보다 재배차 나무의 비중이 훨씬 높아졌다.
 인류 최초의 차 재배자
우리쩐
중국에서 차를 재배한 기록은 서주의 파촉지방에서 B.C 1066년경부터라고 [사기(史記)]에 기록돼 있다. 구체적 사례는 2000여 년 전 서한시대의 우리쩐이 야생 차나무를 발견하고, 일곱 그루의 차나무를 BC 53년 몽정산에서 키우면서부터다. 우리쩐이 차나무를 키우기 전에는 차를 만들기 위해 야생 차가지를 잘라내어 찻잎을 채취하거나 아예 밑동을 잘라버리기도 하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우리쩐은 약초를 캐어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부부의 늦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소년 가장이 된 우리쩐은 홀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어머니가 구갈을 느끼며 눈이 침침해지는 병에 걸리자 우리쩐은 몽정산 깊은 곳에서 야생차를 찾아 잎을 채취하여 어머니께 달여 드려 병을 낫게 했다.

차의 종자를 심어 일곱 그루의 차나무를 키우는데 성공했다. 이 나무에서 채취한 차는 특별히 선차라 불렀다. 우리쩐이 가꾼 선차는 AD 742년 당나라 현종 때부터 AD 1911년 청나라 말기까지 황실공차로 헌공됐다. 중국 최초의 황실공차로서 1169년이라는 최장 기간 동안 이름을 떨친 선차는 지금도 황차원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받고 있다. 우리쩐은 최초로 차를 증식시킨 공로로 사후에 감로보혜묘제선사로 봉해지며 몽정차의 시조로 모셔졌다.

달마
차나무에 우리쩐이 몰두한 사연에 대한 수많은 설화가 있지만 중국인도 잘 모르는 버전을 소개해본다. 폭우가 퍼붓던 강가로 도롱이를 입고 나간 우리쩐은 하천을 따라 내려오는 나뭇가지들을 신나게 주워 모았다. 산에 가서 구하는 땔감에 비해선 물줄기를 따라 쏟아져 내려오는 나무는 횡재였다. 때마침 비가 그쳤다. 나무를 등에 가득 짊어지고 양손으로도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우리쩐의 눈에 풀잎더미에 고립되어 팔딱이는 조그만 물고기가 보였다. 비가 그치면서 물 흐름이 바뀌며 미처 강으로 돌아가지 못한 물고기를 측은하게 여긴 우리쩐은 강물로 돌아가게 도와줬다. 물고기는 한참동안 강가를 떠나지 못하며 우리쩐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 물고기는 용왕의 어린 딸 옥엽선자였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우리쩐은 방생의 기쁨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차 종자를 가지고 놀던 옥엽선자는 산속에서 우리쩐을 다시 만나게 됐다. 두 사람은 한눈에 반했다. 옥엽선자는 가지고 놀던 차 종자를 우리쩐에게 주며 “이 씨앗을 심어 싹이 나오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사라졌다. 그 날부터 차 종자를 심어 지극하게 살핀 덕에 이듬해 봄에 싹이 나왔다. 약속대로 옥엽선자는 우리쩐 앞에 나타나서 혼례를 치렀다. 아들과 딸을 낳아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행복도 잠시였다. 이 사실을 안 용왕이 옥엽선자를 용궁으로 즉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우리쩐의 생명과 안위를 걱정한 옥엽선자는 용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떠나기 전에 구름과 안개를 만들 수 있는 하얀 비단을 주고 갔다. 우리쩐은 그날 이후 평생 차나무를 키우는데만 몰두하며 살았다. 80세에 이른 우리쩐은 옥엽선자를 잊지 못해 우물에 투신해 죽고 만다. 이 슬픈 소식에 용궁을 탈출한 옥엽선자는 몽정산에 와서 용왕이 찾지 못하게 산봉우리로 변해버린다. 황차원을 내려다보는 옥녀봉이 옥엽선자의 화신이라 전해진다.

차의 세계에서 성산으로 받들어지는 몽정산은 연중 300일 정도 비가 온다. 연평균 강수량이 2000mm가 넘는다. 연평균15℃의 온화하고 습한 기후는 비가 오지 않는 날도 운무가 늘 끼어있어 연간 일조량이 1000시간이 채 안 된다. 따가운 직사광선 대신에 부드러운 산광을 받는 몽정산의 차는 최고의 생육조건을 갖고 있다. 해발1450m인 상청봉을 필두로 5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몽정산 자락에서 생산되는 명차는 감로, 석화, 황아, 만춘은엽, 옥엽장춘 등 10여 종이 넘는다. 이중 감로와 황아는 중국 10대 명차의 반열에 번갈아 올랐다.

신농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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