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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벨트의 정치학] 박정희 | 직접 챙기고 재임 중 단 1㎡도 풀지 않아 vs 박근혜 | 규제 풀고 해제 권한까지 지자체에 넘겨

[그린벨트의 정치학] 박정희 | 직접 챙기고 재임 중 단 1㎡도 풀지 않아 vs 박근혜 | 규제 풀고 해제 권한까지 지자체에 넘겨

정치적 이용 목적에 따라 묶고 풀고…김대중 정부 이후 해제 봇물
1971년 6월 12일. 당시 건설부 국토이용관리관(국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호출을 받았다. 박 대통령 집무실에 도착하니 이미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와 있었다. 박 대통령은 국토이용관리관을 바라보며 뜬금없는 지시를 내렸다. “그린벨트란 것 있지. 그것 한번 해봐.” 이 말과 함께 박 대통령은 집무실에 준비돼 있던 도면에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를 그리기 시작했다. 서울시 경계로부터 약 20㎞ 폭의 원형벨트. 이곳에서는 건축을 억제해 보존하라는 지시였다. 당시 서울 인구가 600만 명을 넘어서고, 한 해 30만 명씩 서울로 몰려와 땅투기와 난개발을 일삼고 있던 때였다. 정치권은 물론 학계에서도 그저 ‘뭔가 하기는 해야 하는데’하며 주춤할 때 박 대통령이 ‘무분별한 외곽 확산을 그린벨트로 막고, 밖에 위성도시 개발’이라는 수도권 개발 마스터플랜을 세운 것이다.

명령을 받은 국토이용관리관은 서울시와 합동작업팀을 구성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영국 런던시의 외곽 녹지대를 상상하며 보름여 동안 밤샘 작업 끝에 그린벨트 초안을 만들었다. 초안을 본 박 대통령은 한술 더 떴다. 여기저기 추가할 곳을 지시했다. 지금의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과 경기도 고양시 삼송리도 그린벨트에 넣으라는 추가 지시가 떨어졌다. 군사적인 목적에서였다. 그린벨트는 그렇게 순식간에 쳤다. 현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5만분의 1 지도에 그려진 그린벨트는 박 대통령의 지시 한 달여 만에 현실화했다. 그해 7월 30일, 건설부 고시 447호에는 서울 세종로에서 반경 15㎞의 원형을 따라 폭 2~10㎞에 영구 차단 녹지를 지정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대한민국 부동산 지도에 한 획을 그은 그린벨트가 쳐진 순간이다.
 국민적 공감대 없이 지정
그린벨트 해제를 두고 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도 첨예하게 대립해 왔다. 녹색연합·환경운동연합 등 27개 환경사회단체로 구성된 ‘그린벨트 살리기 국민행동’이 서울 광화문에서 정부의 그린벨트 해제 방침을 철회하라며 밤샘농성을 벌였다(1997년 7월 13일),
그로부터 1977년까지 총 8차례에 걸쳐 5379㎢가 그린벨트로 묶였다. 전 국토의 5.4%나 되는 엄청난 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그린벨트는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 억제와 녹지 쉼터 제공, 군사적 목적 등이었다. 한편에서는 박 대통령의 그린벨트 도입 목적이 녹지 보존이 아닌 다른 데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정치지리학자인 임동근 교수는 2015년 펴낸 저서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에서 그린벨트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관련돼 있다고 주장했다. 건설 재원 마련을 위한 영동 체비지(替費地) 매각이 신통치 않자 투기 붐이 일던 서울 외곽을 그린벨트로 묶어 민간 자본을 체비지 쪽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그린벨트는 이후 많은 논란을 낳았다. 전체 면적의 80%인 4303㎢가 사유지였기 때문이다. 각종 개발행위가 제한되는 그린벨트의 사전적 의미는 도시 주변을 둘러싸는 반영구적 녹지대다. 그런데 그린벨트라고 해서 꼭 숲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녹지의 개념에는 임야(林野)는 물론 농경지 등이 모두 포함된다. 따라서 당시 벼락처럼 쳐진 그린벨트에는 임야는 물론 사유지인 과수원이나 전답(田畓) 등이 모두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적 동의없이 벼락처럼 쳐진 그린벨트에 민심이 호의적일 리 없었다. 땅값이 10분의 1 토막 났다는 땅 주인들의 하소연이 연이어 터졌다. 아들 장가보내려 집 터를 샀다는 한 서울시민은 날벼락을 맞았다고 흥분했다. 땅값이 급락하고, 각종 개발 행위 제한이 걸리면서 민원도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박 대통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재임 중 단 1㎡의 그린벨트도 풀지 않았다. 이후 들어선 군사정권도 그린벨트를 손대지 않았다. 그러다 1998년 12월 24일, 헌법재판소가 축산업자인 배모씨 등 3명이 그린벨트 내 개발행위 제한을 규정한 도시계획법 21조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해당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그린벨트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 배씨 등은 1989년 그린벨트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인천시로부터 축사 철거 요구를 받자 헌법소원을 냈다.
 헌재 결정 이후 급속도로 해제
전국개발제한구역주민연합회 회원들은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개발제한구역 전면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2006년 4월 13일).
헌재는 그린벨트 제도 자체는 합헌이나 토지 소유자가 토지를 종래 용도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 등에까지 피해보상 규정을 두지 않은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봤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그린벨트 제도는 도시기능의 적정화 및 환경보존, 국가 안보상 필요에 따른 것으로 공공이익에 부합하므로 합헌”이라며 “특히 그린벨트로 지정되더라도 토지를 종전 용도대로 이용할 수 있으면 지가 하락 등의 불이익이 있더라도 이는 토지 소유자가 마땅히 감수해야 할 사회적 제약”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토지 소유자가 토지를 종래의 용도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거나, 토지의 이용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경우까지 아무런 보상 규정을 두지 않은 것은 토지 소유자의 재산권을 지나치게 침해한 것인 만큼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명시했다. 헌재의 결정은 개인의 희생이 공익보다 크다면 그런 규제를 해서는 안 되고, 공익이 더 크다면 개인 희생을 보상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재산권이 공공의 이익과 충돌했을 때 어디까지 개인 재산권이 인정돼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법적 기준을 최초로 제시한 것이다. 더불어 토지가 갖고 있는 공공성을 명확히 한 결정이었다.

이후 들어선 정권마다 서로 다른 정치적·경제적 목적에 따라 그린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헌재 결정으로 규제 완화 명분이 생기면서 그린벨트를 정치·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그린벨트 완화를 공약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서 그린벨트는 변화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헌재의 결정대로 보상을 강화하거나 규제 완화를 넘어 아예 해제 쪽으로 방향이 정해진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우선적으로 녹지보전 등 본래 목적에서 동떨어진 7개 중소도시권의 그린벨트를 전면 해제했다. 7개 대도시권 그린벨트도 부분 조정했다. 헌재의 결정은 물론 그린벨트가 너무 많고 규제가 너무 과하다는 국민적 여론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진주·제주·춘천·여수·통영·청주·전주권 등 7개 중소도시권역의 그린벨트를 전면 해제했다. 나머지 수도권과 부산·대구·광주·대전·울산·마창진권(당시 마산·창원·진해) 등 7개 도시권은 부분 해제로 선정돼 전체 구역면적의 15%가량이 풀렸다.

그린벨트가 대거 풀리면서 해제 지역 주민들은 환호했다. 그동안 비가 새는 집을 고치지도 못하는 등 생활에 불편이 많았기 때문이다. 집과 땅을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게 된 것도 성과였다. 주변 땅값에 비해 10분의 1 수준이었던 땅값도 상승세를 보였다. 그러나 그린벨트 해제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27개 환경·사회단체가 참여한 ‘그린벨트 살리기 국민행동’은 청와대 등 그린벨트 해제에 직·간접적으로 관련한 5개 기관과 집단을 ‘그린벨트 파괴 오적(五賊)’으로 선정하며 반발했다. 하지만 이후 들어선 정부에서도 그린벨트는 계속 줄어들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주택 건설 등의 목적으로 654㎢의 그린벨트를 풀었다. 중소도시권 그린벨트 458㎢와 주민 불편이 제기됐던 집단취락지구 1800여 곳 119㎢ 등이 그린벨트에서 빠졌다.

이명박 정부는 보금자리주택 사업 등 국책사업과 지방자치단체 현안 사업을 추진한다는 이유로 88㎢의 그린벨트를 해제했다. 그 결과 서울 서초구 우면동, 강남구 세곡동, 경기도 하남시 등지의 대규모 그린벨트가 현재 신도시로 탈바꿈했다. 서울 강남권과 인접한 경기도 하남시에는 망월·풍산동 등 일대 567만8689㎡ 규모의 신도시가 들어서 있다. 박근혜 정부 때는 11㎢의 그린벨트가 해제됐다. 박근혜 정부의 정책 기조였던 ‘규제 개혁’과 행복주택·뉴스테와 같은 임대주택을 짓기 위해서였다. 그린벨트를 쳤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그린벨트 해제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특히 그린벨트 해제는 물론 그린벨트 관리주체까지 바꿨다.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은 그린벨트 관리 규정이 건설부 장관 소관임에도 그린벨트 관련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결재를 받도록 하는 등 청와대 차원에서 엄격히 관리했지만, 그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5년 5월 ‘규제 개혁’이라는 취지로 30만㎡ 이하 그린벨트 해제권을 지자체에 부여한 것이다.
 아버지는 치고, 딸은 풀고
이에 따라 지자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중앙정부의 승인이 없더라도 언제든지 그린벨트를 해제할 수 있다. 당시 정부는 “도시 확산 방지 및 자연환경 보전을 위해 1970년대 초 최초로 그린벨트를 지정한 이후 반세기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린벨트 제도를 재평가하고 규제를 완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오는 2020년까지 전국에서 최대 227㎢ 면적의 그린벨트를 추가 해제하는 도시계획(2020년 광역도시계획)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환경평가에서 3~5등급을 받아 자연경관을 관리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된 그린벨트를 추가로 해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9월 7일 당 최고위원·국회의원·상임고문 연석회의에서 문재인 정부의 그린벨트 해제 시도를 비판하며 “그린벨트를 풀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것은 ‘이명박·박근혜표 건설정책’”이라고 꼬집었던 것도 그래서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어쩌면 그린벨트는 애초부터 정치적 목적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며 “태생이 그렇다 보니 그린벨트 해제 찬반을 떠나 정권마다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스기사] 그린벨트는 언제부터 있었나 - 1938년 영국이 처음으로 법제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그린벨트를 처음 도입했지만, 그린벨트라는 개념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다. 법제화 실례로는 1938년 영국이, 개념적으론 구약성서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 영국은 그린벨트 제도를 최초로 창안한 국가일 뿐만 아니라 가장 성공적으로 그린벨트 제도를 운용하고 있는 나라 중 한 곳이다. 우리나라의 그린벨트도 영국의 그린벨트를 차용해 운영하고 있다. 일본도 1956년 ‘수도권 정비법’을 제정하면서 그린벨트를 도입했다. 다만 일본은 그린벨트가 아니라 ‘근교지대’라고 부른다. 일본의 수도권정비법 제2조 4항에서는 ‘근교지대라 함은 기존시가지의 질서 있는 발전을 기하기 위해 녹지지대를 설정할 필요가 있는 기존 시가지의 근교 지역으로 정하는 구역을 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 역시 영국의 그린벨트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린벨트의 형태뿐 아니라 개발행위 제한의 대상이나 내용도 한국과 비슷하다.

-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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