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관 변씨 가문의 흥망성쇠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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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 변씨 가문의 흥망성쇠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③]

연암 박지원 소설 [허생전] 등장인물… 역관 변계영이 대대로 부를 이어간 힘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연암 박지원이 지은 [허생전]을 보면, 서울에서 제일가는 부자인 변씨가 등장한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허생이 찾아와 “내가 무엇을 좀 해보려고 하는데 집이 가난해 돈이 없소. 그대가 만냥을 빌려줄 수 있겠소?”라고 요청하자, “좋소!” 하고는 주저 없이 만냥을 내줬다(당시 쌀값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36억원 정도다). 놀란 사람들이 “어찌 누군지도 모르는 자에게 만냥이나 되는 거금을 빌려주십니까?”라고 물으니, 변씨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남에게 무언가를 얻고자 할 때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의지를 거창하게 떠벌리고, 자기가 믿을 만한 사람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낯빛은 비굴하여 같은 말을 반복하기 일쑤다. 한데 이 손님은 비록 차림새가 남루하지만 말에 군더더기가 없다. 눈빛이 당당하며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가 재물이 없어도 만족하는 자임을 뜻하는 것이니, 그가 시도한다는 방법 역시 범상치 않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허생전]은 소설이고 허생 또한 가상의 인물이지만, 이 변씨는 실존했다. 역관(譯官)으로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에 올랐던 변계영(卞繼永)이 모델이다. 그는 중국에 자주 드나드는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중국에 가서 고급비단을 사다가 국내 상인들에게 이윤을 붙여 파는 식이다. 그런데 변계영을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거부로 만든 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투자였다. 허생과 변씨의 일화는 허구이나, 실제로도 변계영은 사업자금을 빌려주길 즐겨 했다. 싹수가 보이는 인재가 있으면 허생에게 그랬듯 조건을 달지 않고 전폭적으로 후원해주었다. 그렇게 성공한 인재들이 변계영 재산을 늘리는데 일조한다.
 
변계영이 쌓은 부는 그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변계영 아들로 역시 역관이었던 변응성(邊應星)은 아홉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 넷째와 다섯째 아들이 한학(중국어) 역관, 여섯째와 일곱째 아들이 몽학(몽골어) 역관, 여덟째와 아홉째 아들이 왜학(일본어) 역관이 됐다. 역관 가문으로서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조선이 상대하는 모든 외국과 무역할 수 있는 위치가 된 것이다. 더욱이 형제가 협력한다면 중계무역(中繼貿易)도 가능해진다. 변씨 가문은 청나라의 비단을 일본에 가져다 팔고, 일본의 은을 청나라로 가져오는 등 대청-왜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손수 장부 폐기해 외부 리스크 없애  

이처럼 한 가문이 잘나가게 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질시를 받게 된다. 더구나 변씨 가문은 중인 계급이었으니 양반들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다. 또 당시 시대 환경에서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밀접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반대 세력과는 척을 지게 된다. 이는 가문의 앞날에 큰 리스크였다. 변응성의 아홉째 아들이자 변씨 가문의 3세대를 대표했던 변승업(卞承業)은 이 문제를 고심한다.
 
본래 변씨 가문은 서인을 후원했다. 한데 현종 때의 예송 논쟁 이후 서인과 남인의 대결이 극단으로 치닫자, 변승업은 남인의 금고 역할을 했던 인동 장씨 집안과 사돈을 맺는다. 변씨 가문과 더불어 조선 역관의 양대 축이었던 장씨 가문은 장현(張炫)이라는 걸출한 역관을 배출했다. 중국을 오가며 외교 전선에서 활약한 장현은 거대한 재부를 일궈 ‘국중거부(國中巨富)’, 나라의 큰 부자로 불렸다.  
 
장현의 종질녀가 그 유명한 장희빈이다. 변승업은 맏아들 변이창을 장현의 딸과 혼인시켰다. 변승업의 여섯 째 형 변승준의 손자와 손녀도 장씨 집안과 결혼했다. (변계영의 조카사위 윤성립이 장희빈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덕분에 남인 집권기에도 변씨 가문은 무사하게 된다.
 
변승업이 말년에 50만냥(약 1800억원)에 이르는 채권 장부를 불태워버린 것도 주목할 만하다. 1709년(숙종 35), 변승업의 노환이 깊어지자 아들들은 “시일을 오래 끌면 좋지 않으니 꿔준 돈을 그만 거둬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채권을 정리해야지, 돌아가신 후에는 자칫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채권이 아니라 현금으로 유산을 상속받고 싶은 마음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변승업은 고개를 저었다. “한양에 사는 사람들 중 내 돈을 빌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갑자기 돈을 회수하겠다니, 이들의 명맥을 하루아침에 끊으려 하느냐?”  
 
변승업은 손수 채권 장부를 폐기하고, 앞으로 이 돈에 대해 거론하지 말며 절대 돌려받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는 말한다. “내가 보건대, 권세가 있거나 재물을 모은 사람 중 삼대를 넘기는 이가 없었다.  
 
지금 이 돈을 흩어 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우리 집안에 재앙이 닥칠 것이다.” 높은 이자를 붙인 것도 아니고, 자기가 빌려 준 돈을 반환 받는 것인데 굳이 포기할 필요가 있냐 싶겠지만, 이는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심사숙고한 결정이었다.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사람들의 질시에서 벗어나고 민심을 얻으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돈을 갚기 싫어하는 자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생각해보라. 한다 하는 사람들이 변승업에게 돈을 빌렸다. 그런데 막상 갚으려니 아깝다. 변승업이야 노회한 거물이니 맞상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변승업의 아들들이야 만만할 터이다. ‘변승업이 죽고 나면 걱정할 게 뭐가 있는가. 우리가 손을 잡고 변씨 가문을 몰락시킨다면 이 돈을 갚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런 마음을 품게 된다. 역사 속에서 이렇게 몰락한 부자가 한 둘이 아니다. 변승업은 차제에 그 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가문의 안위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대대로 지켜온 가문, 내부 싸움으로 몰락  

그렇다면 변승업 이후 변씨 가문은 어떻게 됐을까. 역관으로서 삼대가 연이어 당상관에 오르며 ‘국중거부’가 된 이 집안은 얼마가지 않아 쇠락하고 만다. 변승업이 죽고 25년 뒤인 1734년(영조 10), 예조판서 이사철은 영조에게 변승업의 뒤를 잇기 위한 후손들의 싸움이 인륜의 변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아뢴다. 이후 변씨 가문은 점점 몰락의 길을 걸었다. 변승업의 노력으로 외부의 리스크는 막았지만, 내부의 분열로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상 변씨 가문의 사례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 돈은 사람이 벌어다 주는 것이다. 좋은 인재를 발견했다면 과감히 투자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둘째,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 변승업의 방식이 꼭 정답은 아니겠지만, 자신의 편을 만들고 적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돈을 아끼느라 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내부 단속이다. 외부의 공격보다는 내부의 분열로 붕괴되는 일이 훨씬 더 많다는 것,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 김준태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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