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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작가 벗들의 고희 발자취 고이 담아낸 시선전

아트스페이스선 ‘홍대 75전’ 7월 24일까지

 
 
‘홍대 75전’ 전시장 초입에 김정수 작가의 100호 규모 ‘진달래 축복’(2022)과 작품 대신 글을 전시한 윤진섭 평론가의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위하여’가 보인다. [이영훈 이데일리 기자]
진달래꽃 아름 따다 뿌린다고 했던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사실 이것만 해도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 그런데 가는 걸음걸음 사뿐히 즈려밟고 가란다. 죽어도 눈물은 흘리지 않겠다고.
 
100년이 다 된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1925)은 서러움이었다. 아니 애써 감춘 지독한 격정이었다. 떠나는 너를 원망도 않고 매달리지 않고 ‘쿨’하게 보내주마. 다만 진달래꽃으로 전하는 내 처절한 사무침은 알아 달라. 그러니 밟고 가라, 가버려라. 그게 속 편하겠다.
 
그런데 여기, 눈앞의 이 장면은 한술 더 뜬다. 갈 땐 가더라도 대소쿠리 한가득 올린 진달래 고봉밥은 ‘한술 뜨고 가라’고 하지 않는가. 속이 허하고 마음은 더 허한 모든 이들이 도저히 눈과 발을 뗄 수 없게 말이다. ‘진달래 작가’ 김정수(67)가 소담스럽게 눌러담아 세상에 내놓은 ‘진달래 고봉밥’이 첫 시선을 붙드는 여기는 서울 중구 통일로 KG타워 아트스페이스선. ‘홍대 75전’이 열리고 있는 곳이다. 전시장 초입에 걸린 100호(162×130㎝) 규모의 ‘진달래 축복’(2022)은 그 뒤로 펼쳐질, 우리의 한 시대가 빚어낸 서정의 깊이를 귀띔한다.  
 

와우산 아래서 뭉친 그날 이후 47년  

어느덧 반백 년을 바라본다. ‘붓을 뽑았으면 점이라도 찍겠다’며 덤벼들었던 세월. 그 지난한 시간만큼 이루고 해냈다. 한국미술계의 허리, 바로 중추로서의 역할 말이다. 정확히 47년 전이다. 1975년 홍익대 미술학부로 패기란 깃발 하나씩 들고 모인 학생들. 그해 입학한 새내기 ‘75학번’이었다. 다들 스무살 남짓, 하지만 어리고 여리다고 대충 볼 면면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섰던 사연, 과정이야 제각각이겠지만 대한민국에서 ‘미술천재’란 소리 한 번씩은 들었을 이들이 아닌가. 동양화·서양화·조각 등 순수미술 수업을 같이 들으며 이후 4년을 함께했던 이들 예비작가들은 유독 돈독했단다. 그래도 어쩌겠나. 졸업을 기점으로 섭섭하고 애틋한 마음만 잔뜩 품은 채 뿔뿔이 흩어져 갈 수밖에.
 
하지만 그리 아쉬울 것도 없었다. 이들이 휘어잡은 동네가 말이다. 어차피 미술계였으니. 그렇게 ‘따로 또 같이’ 보폭을 넓히던 어느 날 이런 말이 들려왔단다. “우리 한번 뭉쳐보자!” 누가 말을 꺼냈는지는 희미하나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는 선명하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75동기전’, 화끈하게 줄여 ‘홍대 75전’이 결성됐으니까. 그렇게 1985년 ‘홍대 75전’ 첫 전시가 열렸다. 75~80명 동기 중 30여명이 깃발 대신 이번엔 작품 하나씩 안고 모여들었다.  
 
아트스페이스선의 ‘홍대 75전’은 그때 그 이름, 그 얼굴, 그 작품이 다시 모인 자리다. 횟수로는 5번째고, 햇수로는 4년 만이다. 첫 전시 이후 1995년 제2회를, 1996년 제3회를, 2018년 제4회 ‘홍대 75전’을 열었더랬다.  
 
‘홍대 75전’에 참여한 작가들이 전시를 개막한 6월 21일 서울 중구 통일로 아트스페이스선에 4년 만에 다시 모였다. 작품 대신 글로 동기들을 격려한 윤진섭(맨 왼쪽부터 시계방향) 평론가를 시작으로 강기욱·김경희·김정수·황찬수·박헌열·정대현·손기환·한진섭·이상권·김동백·최기봉·김정순·황혜련·왕인희·이신명·이경혜·박은서·성순희 작가들이 정겹게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영훈 이데일리 기자]

작가 27명이 회화·조각 등으로 더듬어낸 ‘세월’ 29점

회화와 조각, 설치작품 등 29점을 걸고 세운 이번 ‘홍대 75전’에 참여한 작가들은 27명. 강기욱·공미숙·김경희·김동백·김승연·김정수·김정순·김준권·박은서·백낙선·성순희·손기환·심인혜·왕인희·이경혜·이신명·이정규·이희중·정해숙·차대영·황찬수·황혜련 등 22명이 회화작품을, 박헌열·이상권·정대현·최기봉·한집섭 등 5명이 조각·설치작품을 내놨다. 
 
‘없어서 못 판다’는 김정수 작가의 ‘진달래 축복’(2022)은 100호 외에 60호 한 점이 더 나왔다. ‘홍대 75전’ 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정순 작가는 ‘꽃대궐 다시 꽃시절’(2021)을 걸고, 한국조각가협회 명예이사장인 한진섭 작가는 ‘한마음’(2020)과 ‘행복하여라’(2021) 2점을 세웠다.
 
추억조차 희미해진 옛 동네의 개천가 전경을 이신명 작가는 ‘천변풍경’(2019)으로 아련하게 그려냈고, 그 어느 귀퉁이쯤 보일 담벼락은 최기봉 작가가 입체평면으로 만든 뒤 ‘시집가는 날’(2022)이란 작품명을 달아뒀다. 바라만 봐도 절절한 산의 등줄기를 겹겹이 목판에 새긴 ‘춤추는 산-1’(2021)은 김준권 작가가, 마치 그 한 등성이를 따온 듯 붉은 바탕에 단순하지만 강렬하게 올린 ‘마운틴 인왕’(2021)은 이대명 작가가 내놨다.
 
지난해 타계한 이정규·이희중 작가의 ‘계곡의 속삭임’(2011)과 ‘진달래꽃’(2001)은 절절한 초대작이다. 이들 외에도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작품 대신 ‘스스로에 만족하는 삶을 위하여’란 글로 동기들을 격려했다.  
 

이젠 일흔 바라보는 “참 특별한 홍익대 미대 75학번”  

첫 ‘홍대 75전’ 때 서른 남짓이던 이들은 이제 일흔을 바라본단다. 바래고 흐려진 옛 기억을 더듬어준 건 한진섭 작가다. “참 특별한 학번이었다”고 운을 뗐다. “고집 세고 개성이 남달랐지만 ‘함께’란 의식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유사한, 홍익대 미대 출신 다른 모임이 있지 않을까. 한 작가는 고개부터 내젓는다. “원체 작가란 사람들은 한데 뭉쳐 뭔가를 도모하기가 어려운데, 그 어려운 일을 희한하게도 75학번만 마다하지 않았다”며 웃는다. “1955, 1956년생들이니 하나둘씩 퇴직하고 은퇴한 시점이 아닌가. 이번 전시는 그 의미까지 각별하다.”
 
그 동기들 중 어느 누구 사연 없는 이가 있겠는가. 그저 묵묵히 붓과 망치로 시간을 다져왔을 터다. 그 긴 서사는 전시작들이 대신 말해준다. 산과 물, 길과 담, 나무와 꽃 등으로 관조하듯 더듬어낸 세월의 두께가 두툼하다. 전시는 7월 24일까지. 

오현주 이데일리 문화전문기자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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